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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면서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요즘 우리 계속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오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우리는 네 할렐루야 다 같이 우리는 저음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대단하십니다.
세 번째 우리는 이야 박수 박수 이 정도로 박수밖에 안 되나요? 다시 한 번 서로에게 박수 3주 치를 기억하고 계신 게 대단한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 근데 기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고 또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그 정체성으로 승리하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간 우리 신앙의 선배입니다.
원래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던 가장 앞잡이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가장 열심히 일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삶이 180도가 바뀌어서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다. 예수의 일꾼인데 이 예수의 일꾼으로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방인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런 역할을 하는 제사장이다.
이게 바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서신서 곳곳에 자신은 이 사명을 갖고 있음을 명확하게 고백하면서 로마서를 기록하기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또 로마서를 거의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자신은 예수님의 일꾼으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하는 고백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도 우리랑 똑같은 성정을 가진 한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그 사명을 딱 붙들고 그 사명,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붙들고 그렇게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이 바울을 만나셨을 때 이 바울이 앞으로 해야 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핍박자였던 사도 바울이 지금 다메섹 도상으로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기 위해서 지금 뛰어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만나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엄청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말씀을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가라라고 하는 이 말은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바울입니다. 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저 지금 사울, 지금 핍박자 사울 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잘 인도해 줘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장면이 이 장면입니다.
근데 아나니아는 이미 그 사울이 누군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묻죠.
주님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알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어떻게 제가 그 사람을 도와줍니까? 저는 못합니다.
근데 이 아나니아에게 해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에요.
이 사람은 내가 택한 그릇이다.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러니 가서 데려오고 그를 돌봐라.
아나니아는 자기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울을 데려다가 그를 케어하고 또 그에게 이 말들을 전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아나니아와의 대화 속에 지금 자기가 이 경험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 같은 이 죄수와 같은 나를 왜 부르셨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들은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바울도요.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 속에 자기가 이방인들을 위해 세워진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인지 처음에는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의 현장 속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복음의 첫 대상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데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근데 오히려 이방인들이 받아지고 그 이방인들이 막 변화되는 모습을 경험하면서 사도바울의 사역의 방향이 점점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져 가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4절에서 46절에 보면 이 내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머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이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아멘 바울이 지금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어디로 향한다고요? 이방인에게 왜요?
너희들이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이는데, 이 상황 속에서 유대인인 너희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너희들이 오히려 우리를 반박하고 비방하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전하는데 지금 이렇게 계속 반박하고 이렇게 하는 너희들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향할 거야.
바울은 복음을 전할 당시 처음에 원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민사상 이 있었기 때문에 이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동족이니까요. 말도 잘 통하고 문화도 똑같고 서로 잘 이해가 잘 되니까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 속에 유대인들은 거부합니다. 거부를 떠나서 박해합니다.
그런데 반면에 이방인들은 복음을 막 받아들이는 거예요.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사역의 방향이 점점점점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받고 그 감당하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난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 난관을 만날 때마다 좌절하거나 낙망하거나 그렇게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이것이 지금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지금 이러한 역경을 허락하실까
왜 나에게 이러한 실패를 허락하실까
왜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까
그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 나는 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내 사명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나를 보내셨구나.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구나.
그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그의 사역의 방향이 점점 전환되었습니다.
또 이러한 예가 사도바울의 사역 가운데 한 가지가 더 있죠. 사도바울은 복음을 들고 아시아 지방으로 가서 그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튀르키예의 지방입니다.
그런데 가려고만 하면 뭔가가 막히는 거예요. 아시아 지방으로 가서 나는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는데 가려고만 하면 막히는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 꿈속의 환상을 보게 되죠. 마귀의 도야지 지금의 그리스 지방에 있는 청년이 바울을 향해서 외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
이 환상을 본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가려고 했었던 아시아 쪽에서의 방향을 틀어서 유럽으로 가서 그리스로 가서 그리스로 가서 내가 복음을 전하리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고 복음의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유럽 쪽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 사도바울은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실패를 경험하면 또 자기의 뜻과 어긋나는 어떤 상황을 경험했을 때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분석하고 그 상황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도 내 생각, 내 뜻, 내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상황 상황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유럽까지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귀한 사명을 온전히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다 생각하고 내가 뭔가를 다 계획하는 것 같지만 정작 내가 다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예 없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은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사람을 세워주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하면 그러면 일은 이루어지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 즉 씹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멘 바울 자신은 심었다는 거예요. 내가 심고 내가 물을 주고 내가 자라나게 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내가 다 한 것이 아니라 나는 심는 것이 나의 사명이구나라고 여긴 이 바울은 열심히 심었다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심었다는 겁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을 세우셔서 물을 주셨다는 거예요. 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다른 일들을 이루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수고 신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는, 그래서 자라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됐다고 하는 이 고백이 바로 이 말씀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바울과 같이 지금 우리 성도들 사명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이뤄낼 것인가 그 결과는 내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까 어떤 열매를 맺을까 그건 내가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우리가 던질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명을 발견하고 최선을 다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열심히 심으십시오. 물을 주라고 하셨습니까? 열심히 물을 주십시오. 전하라고 하셨습니까? 전하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옆에 사람이 못한다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내게 맡겨진 그 일을 최선을 다하면 자라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일꾼의 자세예요. 일꾼은 맡겨진 바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일꾼이고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그 기라성과 같은 사도 바울이 한 고백을 그 고백을 우리한테 갖다 붙이냐고 사도바울은 놀라운 이런 일을 일으킨 사람이니까 예수님의 일꾼이라고 제사장 역할을 한다고 말을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나는 그런 사명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이 말씀이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울과 같이 전문적으로 사역자로서 또 전문적인 선교사로서 정말 내 모든 것들을 내어놓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그러한 전문적인 선교사가 아닐지는 모릅니다.
아니요. 아닐지 모르는 게 아니라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이 동일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길 원합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여기 앉아 계신 우리 동역자들 가운데는 의사도 있고 간호사도 있고 전문인들이 있습니다. 근데 우리 모두가 다 의사가 아니고 다 간호사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전문인이 아니니까 누가 아프든지 다치든지 나는 상관없어 그러고 살아갑니까? 여러분들 자녀가 저녁에 막 열이 나는데 요즘같이 응급실에 가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러분들 나는 전문인이 아니니까 내일 아침에 해 뜰 때까지 나는 지켜봐야지 이러고만 있을 겁니까? 해열제를 찾든 뭘 찾든 아니면 물을 갖다 대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돌보지 않을까요?
내 가족 가운데 누가 넘어져가지고 다쳐가지고 피를 철철 흘리면 가서 뭘 갖다가 피가 안 나게 좀 가로막고 빨간 약을 발라주고 후신이라도 발라주는 거 여러분들 안 할까요?
여러분들 옆에 누가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쓰러졌어요 나는 전문인이 아니니까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만 할 겁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요즘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정말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이게 지금 심폐소생술을 하든 119에 전화를 하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사도바울처럼 뭔가 전문 사역자가 다 되라는 거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우리가 이 사도 바울과 같은 똑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예수님의 일꾼이고 또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정체성을 우리 이 시간 분명하게 붙들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옆에 분 모시면서 한번 우리 말해볼까요?
당신은 예수님의 일꾼입니다.
당신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옆에 사람 보지 말고 이제 손을 나한테 이렇게 하고
나는 예수님의 일꾼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야 할 제사장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야 할 제사장입니다.
아멘 여러분 이 정체성을 다시금 분명하게 기억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근데 여러분 이 정체성을 가지고 해야 할 사명들이 참 많은데요. 그중에 가장 핵심 돼 있는 사역이 뭘까요?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인처럼 강도를 만난 사람이 쓰러져서 지금 죽어가는 그 상황 속에 나는 전문인이 아니니까 그냥 지나가버릴 겁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그 사람을 감싸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약이라도 발라주고 또 포도주를 붓고 어떻게든지 이 사람을 도우려고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금 현재 시점에서 우리 주변에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그 강도 만난 사람처럼 피를 철철 흘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죽어갈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 주변에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을 몰라서 영원한 멸망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꾼으로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야 할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보면 또 부담이 확 들어오죠. 요즘 같은 분위기에 내가 그러면 나가서 어떻게 노방전도를 해야 되나 뭐 어떻게 예수 천국 불신지옥을 외쳐야 하는가 예전같이 선포함만으로 복음이 증거되는 시대가 우리나라에서는 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불가능하다고 무조건 여기지는 않아요.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도 역사하시니까요. 근데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복음의 확장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요? 여러분 찾는 이들은 지금 분명히 존재해요. 근데 그 찾는 이들이 자기가 궁금해 하고 지금 자기가 갈급해하는 그 찾는 것을 여러분들을 통해서 발견하기만 하면 그 사람들은 올 겁니다. 교회로 올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일꾼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야 할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의 삶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갖고 살아간다면 내가 직장에서 또 삶의 자리 어느 자리에서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왜 하나님이 허락하셨는가를 우리는 기억하길 원합니다.
바로 그 사람들에게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붙여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가운데 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때에 일꾼으로서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다르다는 거예요. 은사가 다릅니다. 어떤 이는 씹는 일에, 어떤 이는 물 주는 일에, 어떤 일은 또 다른 작은 어떤 일에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이 그 역할들을 맡기십니다.
다만 내게 맡겨진 일이 작든 크든 그 일을 최선을 다하여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한다면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들이 만나게 될 그 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붙여주신 전도 대상자라고 하는 인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양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어쩌다가 만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제사장으로서 그 사람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셨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나아가길 원합니다.
어떤 자세로 만날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더 높아지라고 더 대접받는 자리에 앉으라고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계속 강요합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크리스천으로서 오히려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 더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시작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이 땅의 왕으로 군림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온전히 드리고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섬김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예수님의 일꾼 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섬길 일이 무엇일까 저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을 저 사람에게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을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높아지고 갑질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하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온전히 다가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교회는요 거룩하고 멋있고 좋은 사람들, 성숙한 사람들, 천사 같은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 환자가 어디에 제일 많이 있을까요? 환자 병원에 제일 많이 있어요 그렇죠 아픈 사람들이 제일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인해서 변화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회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영적인 환자들이 가득한 곳이 교회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공사 중인 사람들이에요.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모습 가운데 서로 판단될 때가 있습니다. 근데 그때 한 몸임을 기억하고 그리고 지체임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판단하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한 몸인 우리가 한 몸인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건강하게 세워지고 건강하게 치유될 수 있을까 그것을 묻고 함께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이기적인 생각들,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내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연약한 이들에게 디딤돌이 돼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걸림돌이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을 교회에 못 오게 하는 걸림돌이 되는 거 아시나요? 설문조사를 보면 교회 안 나오는 이유 중에 하나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아서라고 하는 이유도 굉장히 큰 퍼센테이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가나안 성도가 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깨어짐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믿지만 나는 교회는 못 다니겠다고 가나안 성도가 돼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함께해야 하는 공동체 안에서 걸림돌이 되지 않고 디딤돌이 되는 관계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만날 때마다 여러분 서로 좋은 부분들 또 격려할 부분들을 보고 말씀해 주십시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데 만나가지고 오늘 온 모양이 이게 왜 그래 오늘 화장이 왜 그래 뭔가 아파 물론 정말 그럴 때도 있겠죠. 그러면 조용히 그거는 기도해 주고 또 조언이 필요할 때 말할 필요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데 만나자마자 그냥 오늘은 왜 이래 막 이런 식으로 그냥 그게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말하시는데 상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다음 주 명절입니다. 여러분 명절 때 1년에 한 번 막 6개월에 한 번 만나는 그 친척이나 조카들한테 제발 그냥 의식이 없는 말하지 마세요. 성적은 어떠냐 언제 결혼할래 언제 취업하냐 그거 해결해 줄 마음 없으면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그냥 만났을 때 야 너 오랜만에 만나니 더 멋있다. 야 너 정말 대견하구나야 명절인데 이렇게 와가지고 도와주는 게 참 너무 멋있다.
칭찬해 주고 용돈을 쥐어주세요.
그러면 걔네들이 여러분들을 만날 때 마음이 열려서 제가 요즘 고민이 있습니다. 막 하면서 뭔가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만나자마자 야 너 요즘 살이 왜 이렇게 쪘느니 뭐가 어쩌느니 하면서 막 눈에 보이는 거를 말하는 게 여러분들 아무 의식 없이 그냥 할 때가 있어요. 절대 하지 마십시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또 이번 명절 때 특히 마찬가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와 관계를 하면서 저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교회 다니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아야 될까요?
초대교회 사람들이요. 복음의 확장이 막 날로 이렇게 더해진 이유가 뭡니까? 박해받는 시대였어요. 예수님 믿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요.
근데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날로 더 늘어났어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소음으로써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겁니다. 저 사람들은 뭔가 다른데 저 사람들은 저 위기 속에서도 왜 기뻐하지 그 다음을 발견하면서 사람들이 나도 저 사람처럼 나도 살고 싶다라고 하는 그 심령들이 일어나니까 복음이 확장된 거 아닙니까?
여러분 가족들 안에서도 선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진짜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내 나름대로의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섬김의 종으로 우리 가족들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주님의 일꾼이라고 내가 말을 하지만 내 삶, 내 말, 내 행동 때문에 가족들에게 상처 주고 있지 않습니까? 나 중심적으로 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점검하길 원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장에서도 여러분들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내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혹시 만남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걸림돌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만나는 만남의 관계 속에서 그들을 주님께로 이끌어야 할 제사장의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습을 먼저 점검하길 원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오늘 말씀을 붙들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또 그들을 이끌어야 할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결단하고 다짐하며 나아가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