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과거 제도는 거의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시행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각종 고시는 과거시험에 비하면 그 역사가 매우 짧다. 과거가 오랜 세월 시행된 만큼 그 과정에 다양하고 진기한 기록이 있을 법한 시간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전체가 기록된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안향(安珦)이 1260년(고려 원종 1) 과거에서 급제한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11대 연속으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여흥민씨(驪興閔氏) 가문은 1597년(선조 30) 민기(閔機)에서부터 1880년(고종 17) 민영일(閔泳一)까지 10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수직으로 대를 이은 직계 급제자가 이 정도이니, 방계까지 합치면 급제자 수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가문들은 대대로 세인의 존경과 부러움을 샀을 것이다.
이렇듯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급제자 개인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급제자 가문 전체의 영광이기도 했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온 가족이 평생 매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로 인해 아들을 많이 둔 집안은 과거 급제를 위해 가문이 나서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원해굉(元海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관이 원주(原州)인데 거주지도 아마 원주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본인도 생원시에 급제하였지만, 이 사람의 아들 6형제가 인조에서 현종대를 거치면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6형제가 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사관(李士寬)이라는 사람은 세종대에 다섯 아들을 모두 문과에 급제시켰다. 조운기(趙雲紀)라는 사람은 3형제를 두었는데 1800년(정조 24) 별시문과에서 한 날 한 시에 모두 급제하였다. 오늘날 같으면 언론에 대서특필 되고도 남을 진기록이며, 부모에게는 자식 교육 방법을 알려 달라는 문의와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을 것이다.
과거 급제는 영원한 영광일 수 있지만 때로는 급제 취소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연이어 듣는 경우도 있다. 1621년(광해군 13) 별시문과에서 40명을 선발하였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를 계속 미루다가 인조반정 이후 1623년 첫 문과에서 다시 시험을 본 후에야 11인만 급제하고 그 나머지는 합격이 취소되었다. 급제가 취소된 이유는 당대의 권력자이자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의 아들과 조카 4인이 한 시험에 동시에 합격하고, 1인은 같은 달에 치른 알성시에 합격하였는데, 시험관이 이들 이름과 자(字)를 부챗살에 적어놓고 시험을 감독하여 특혜를 주려던 부정이 드러났던 것이다. 그런데 서슬 퍼런 권력 때문에 합격 취소를 못하다가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다시 재시험을 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파방(罷榜)’을 검색하면 시험 부정행위 및 그로 인한 과거 취소와 관련된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이 중 상당수가 과거 취소와 관련된 것이니 합격 취소로 인해 눈물 흘린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