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대중문화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거나 혹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최근 대중문화에서 엿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화두는 분명 아버지 혹은 부성애다. 심지어 부성애 신드롬을 들을 정도인데, 그 까닭은 대중가요와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영화 등의 대중문화에서 아버지와 부성애를 다룬 작품들이 연이어서 제작되고 심지어 흥행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부추기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자는 의미는 아니다. 혹시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는 있다 해도 영화에서 과거 회귀를 고무하는 장면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성애와 관련해서 일단 영화에 국한해서 살펴보면, 오래 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는 차치하더라도, <아이 앰 샘>(2001)과 비슷한 소재를 다룬 2012년 작품 <7번방의 선물>은 어린 딸에 대한 장애인 아버지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2014년에 개봉한 <인터스텔라>와 <국제시장> 역시 부성애를 다룬 영화로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특히 <인터스텔라>는 우주물리학 이론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영화임에도 크게 흥행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단연코 감동적인 부성애가 큰 역할을 하였다.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거야. 그저 추억의 조각이 되는 거지”라고 말하는 영화 중 아버지의 말은 부모로서나 혹은 자식으로서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국제시장>은 한국 전쟁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경제 성장의 이면에 감춰진 아버지 세대가 짊어져야 했던 희생의 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험한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자식이 아니라 부모 세대가 겪어야 했던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는 대사는 영화의 메시지를 대변한다. 이제는 더 이상 가족이나 자식이 아니라 ‘부모의 인생’을 말하고 강조하는 시대에 다시금 부모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특히 아버지의 삶 뒤에 숨겨진 헌신과 희생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허삼관>은 비록 관객몰이에는 성공하지 못했어도 부성애를 말하는 데에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족과 병든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해칠 정도로 매혈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국제시장>이나 <허삼관>은 혼신의 노력으로 알을 지키고 또 부화하도록 도우면서 결국엔 새끼들의 먹이가 되는 가시고기를 연상케 한다. 다양성 영화 부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부성애와 관련해서 많은 관심을 끌었던 영화에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가 있다. 출생 이후 병원의 잘못으로 뒤바뀐 아들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련의 해프닝을 통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찰한다.
영화 이야기
<워터 디바이너>의 제목 The Water Diviner는 ‘수맥을 찾는 자’를 뜻하며, 배우로 잘 알려진 러셀 크로우가 우리나라를 방문하면서까지 홍보를 위해 열정을 쏟은 작품으로 그가 감독으로 데뷔하며 내놓은 처녀작이다. 처녀작치고는 꽤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손석희의 뉴스데스크에도 나와 인터뷰할 정도로 열심을 보였지만, 아쉽게도 흥행에 있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자살자의 장례절차에 대해 보인 교회의 불친절한 태도나 영화에서 미신을 신뢰하는 듯이 보이는 장면을 생각해볼 때, 기독교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것들은 영화의 중심 메시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감상 과정에서 무시해도 좋을 것 같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동맹군에 속했던 오스만 제국(터키 지역)에서 벌어진 갈리폴리 전투에서 세 명의 아들을 잃은 후 충격으로 아내마저 자살하자, 시신만이라도 찾으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선 아버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호주의 농촌에서 평생 농부로 지낸 아버지가 낯선 외국에서, 그것도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넓은 지역에서 오직 직관에만 의지해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는 설정이 다소 황당하지만, 그 황당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더욱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수맥을 찾아내듯이 땅에 묻혀 있는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는 일이 놀랍고 또 전쟁포로가 된 아들이 살아 있다는 확신을 갖고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중인 그리스와 터키의 접경 지역으로 아들을 찾아 나서는 아버지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은 이런 장면을 통해 각별한 부성애를 관객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 듯하다.
대중문화 속 부성애
동일한 주제의 영화가 연거푸 제작되고 또 흥행하는 현상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말한다면, 논리의 비약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대중적인 영화에서 흥행의 관건은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든 잘 만들어지면 흥행되고, 어떤 주제라도 잘 만들어지지 않으면 흥행이 저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처럼 부성애와 관련한 영화에서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최근 몇 년에 걸쳐 동일한 주제로 여러 영화들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영화들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부성애와 시대정신의 상관관계를 말한다면 무리일까? 게다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영화이외의 다른 대중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화두는 단연코 아버지다.
먼저 대중문화가 아버지를 다루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아버지의 삶을 말하되 아버지의 희생을 추억하며 기리려는 면이 있는가 하면(싸이의 ‘아버지’, <허삼관>, <국제시장>), 전과 비교할 때 많이 바뀐 아버지의 역할이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들도 있다(‘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한국 영화들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에는 크게 변함이 없지만, 그동안 간과되었거나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희생을 부각시킨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희생을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표현되지 않았을 뿐, 없었던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가수 싸이의 ‘아버지’ 역시 아버지의 헌신적인 삶과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아들이 아버지의 희생을 추억하며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비해 서구 영화는 가부장적인 모습보다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인터스텔라>, <워터 디바이너>). 표현되는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런 이미지와 역할은 특히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예능 프로그램들은 한 결 같이 아버지의 역할과 이미지의 변화에 주목하는데, 대표적으로 <아빠 어디가>나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들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아이들과 아빠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그동안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아빠들의 진심어린 사랑은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였다. <아빠 어디가>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여행의 동반자로서 친구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때로는 코치나 멘토의 모습도 보인다. 이에 비해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아빠의 육아 과정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그동안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아내들의 수고를 되새겨보는 의미도 있지만, 자녀들에 대한 아빠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대중문화가 변화된 아버지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을 보면서 다분히 서구 영화에 비친 아버지 이미지를 따르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한 그것이 가족관계에서 옳다고 보는 대중의 생각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서로 다르게 보이는 두 이미지가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실을 반영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되겠다. 두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겉으로 표현하느냐 아니면 단지 가족을 위해 희생함으로 그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느냐다. 무엇이 옳은지의 여부는 쉽게 결정될 없는 일이나,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은 표현되는 사랑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그렇지 못한 아버지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아버지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결코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깨닫고 변화하길 기대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통적인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면서 곧, 부성애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친밀한 관계에서 부성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아버지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서로 갈등하는 듯이 보이는 이미지가 대중문화에 나타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성경에서 아버지 이미지
그렇다면 이즈음에서 성경에서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에서 아버지는 가족의 근원이며, 가족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가족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자녀들을 축복하고 교육하며 훈계하고 심지어 징계한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가족을 책임지는 자다.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이미지가 현실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획득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사실은 인류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했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점이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이시고 자녀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보는 아버지는 자녀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고 또 자녀들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주는 존재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나오는데,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으로서 아버지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를 통해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기를 가르치셨다. 이것은 그만큼 자녀들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그밖에 예수께서 사용하신 ‘아바(abba)’는 자녀와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자녀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며,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베푸시고, 그래서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분이다.
성경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데, 때로는 가르치며 훈계하며 심지어 징계하는 분으로, 때로는 용서하시는 분으로, 때로는 축복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녀들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일은 공경이다. 이것은 다섯 번째 계명에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공경하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부모를 높여 드리고 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늙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모가 젊었을 때는 부모의 보호아래 살면서 부모의 말을 경청하고 부모를 존중해드리며, 부모가 더 이상 생산 능력이 없을 때는 부모의 노후를 돌봐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이미지를 하나님에게 적용했을 정도로 성경은 육체의 아버지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