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백파대사비(禪雲寺白坡大師碑)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이 비는 1858년(철종 9년)에 세운 것으로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 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있어,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巖) 등 백파의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고 하였다.
선운사 백파대사비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한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것에 해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율사로 썼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혹자는 기(機), 용(用)을 살(殺), 활(活)로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하기도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에서건 살, 활, 기, 용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살, 활, 기, 용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한 가지 법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의리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 활, 기, 용을 백파를 구속했던 착상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파를 충분히 아는 것이겠는가.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분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곳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온갖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여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巖)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 다음과 같이 써서 붙인다.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기개는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였네.
부모 섬기기를 부처 섬기듯 하매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하도다.
그 이름 긍선(亘璇)이니
전전(轉轉)한다 말할 수 없다네.
완당(阮堂) 학사(學士)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철종 9, 1858년) 5월 일 건립하다.
華嚴宗主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
年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杀活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
殺活機用雖大藏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妄以殺」
活機用爲白坡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與白坡」
頗有往復辨難者卽與世人所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難萬般苦」
口說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
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爲白坡碑也畫正雪竇白巖諸門徒果老記付」
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眞實厥名兮互璇不可說轉轉」
阮堂學士金正喜撰幷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