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주에서 가장 부조리한 사건은 나의 죽음입니다. 내게 닥쳐올 죽음입니다. 내가 죽을 것을 미리 알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주어진 시간으로 자라고 배우고 일하고 가정을 꾸려 자식을 낳고 또 기르고 사회에 봉사하고 …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놔두고 죽다니요. 애당초 자라지도 배우지도 말았어야지 왜 다 그런 것을 다 하고나니 그냥 죽으라니요. 죽고나면 어찌되는데요. 그냥 없어지잖아요? 부조리 아닌가요?
나무가 우거지니 사람들 세상이었습니다. 차소리가 가까이 들렸습니다. 알프스 산골짜기를 빠져나가려면 아오스타 지역을 일주일은 더 걸어야 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하늘의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풀 뜯는 소와 양들이 조그맣게 보였습니다. 가파른 산길을 지그재그로 내려가 SS27번 도로를 만났습니다. 산 베르나르도 터널로 연결된 2 차선 도로였습니다. 급경사 지역은 일단 벗어났습니다. 길 오른 쪽 소로를 걸었습니다. 풀밭길이어서 발이 유쾌했습니다. 우비를 벗었습니다.
해발 1620m의 센트 리미 암 보시스(Saint-Rhémy-en-Bosses)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 땅 첫 번째 마을. 아름다운 산골 마을입니다. 집들은 모두 얇은 돌판으로 지붕을 이었습니다. 좁은 산골 동네 골목을 걸었습니다. 산 로렌조 성당에 들어가 감사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당 방명록에 앞서 내려간 한국인 부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카페에서 커피, 케이크 한 조각에 2.5유로라니 더 아름다웠습니다. 이 동네에서 자연건조시켜 만드는 염장 돼지 뒷다리를 햄(Aosta Valley Bosses ham)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마을 길에서 만나는 맑은 물, 상록의 가문비 나무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그리고 아기자기한 골목길. 청량한 냄새와 적막감. “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
해방감도 아니고 안도감만은 아닌 긴장되지 않은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길가의 수도 꼭지에서 손으로 물을 받아 마시며 가로등에 붙어 있는 순례자 문양의 장식을 발견했습니다. 그란 산 베르나르도 개울(Torrente de Gran San Bernardo)의 나무 다리를 건너며 마을 뒷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 개울은 아르타나바(Artanavaz) 개울과 합쳐지고 부티에 천을 만나 흘러서 아오스타에서 도라 발테아 강을 만납니다. 결국 포(Po) 강의 말단 실개천입니다.
6.5 km 걸어왔습니다. 인구 330명. 로마시대에는 이 지역을 관장하는 저택이 있었습니다. 5 세기에 이곳을 지나던 왕이 성 리메로부터 세례를 받아 마을이름이 성 리메가 되었습니다. 5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도록 알프스를 넘는 길목이어서 훈족, 반달족, 롬바르드, 샤를마뉴, 사라센의 침략을 당했습니다.
그림출처: https://es.wikipedia.org/wiki/Anexo:Etapas_de_la_Vía_Francígena_en_el_Valle_de_Aosta_(Italia)
Saint-Rhémy-en-Bosses 마을
그늘진 산길을 2 km 내려갔습니다. 남향 산비탈에 아름다운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집 몇채가 모여 있는 산 레오나르도 (San Leonardo)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서 동서방향 골짜기를 만났습니다. 서쪽 끝은 크레바콜(Crevacol) 스키장이 있고 동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면 에뜨루블스 (Etroubles) 마을까지 대략 7 km 골짜기입니다. 겨울철에는 2800m 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알파인 스키가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골짜기에서는 크로스 컨트리 스키를 탑니다. 여름철에는 같은 코스를 트래킹 하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이 골짜기의 아름다움으로 조각가 화가들이 자주 찾습니다. 여기저기 목각 조각들을 전시했습니다.
산 레오나르도 카페에서 나오는 한국인 부부를 만나 잠시 한국어로 이야기했습니다. 한달여만에 사용하는 한국어. 이분들은 의과대학 교수 부부였는데 여름 휴가를 받아 알프스 산악지대 트래킹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들은 서쪽 크레바콜 쪽으로 다음 트레킹 코스를 찾아가며 헤어졌습니다. 골짜기에는 아르타나바(Artanavaz) 개울이 흘렀습니다.
산 레오나르도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었습니다. 이탈리아 관광객들을 만났습니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은 산 나물 뜯는데 재미 부쳤는지 한 주먹씩 들고 다녔습니다. 동서양이 떡 같았습니다. 배낭에서 비닐 봉지를 꺼내 주었습니다. 산비탈에 붙은 길가에 산의 등고선처럼 수평으로 난 수로에 물이 흘렀습니다. 루 뇌프(ru neuf) 또는 수오네(suone)라고 부릅니다. 알프스 산악지역 특유의 관개 시스템입니다. 처음에는 응달에 흐르는 많은 물을 건조한 양달로 끌어오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산 꼭대기에서 밑으로 층층이 계단식 수로 시스템으로 모양이 갖추어졌습니다. 이 관개 시스템은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에 땅을 가졌던 영주들이 만들기 시작했고 최근까지 자체적으로 수자원을 관리했습니다. 이제는 중앙 정부가 나서서 체계적인 수자원 관리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타나바(Artanavaz) 개울에서 끌어들이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르고 있었습니다. 물길을 따라 3 km를 더 가면 사인트 오이엔(Saint Oyen) 마을입니다. 인구 190명. 해발 1373m. 이 마을에 있는 샤또 베르둔 (Château Verdun)은 1137년부터 순례자들을 재워준 숙소였습니다.
소설 “적과 흑”으로 유명한 작가 스땅달은 이 마을에서 마음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군대에 가담하여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이 골짜기를 지나며 짜릿한 행복을 맛보았던 모양이었습니다. 그의 자전적 소설 앙리 브훌라의 일생 (Vie de Henri Brulard ) 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1]
사인트 오이엔 마을을 지날 때
대자연은 부드러워져서
나는 행복의 절정이었다.
Vers un hameau nommé Saint-Oyen
La nature commença à devenir moins austère
Mon bonheur fût extrême.
그란 산 베르나로도 고개 일대의 황량함과 가혹한 기후에 비하면 이곳은 낙원일 것입니다. 아침에 그곳을 출발하여 나무 한 그루 없었던 골짜기를 지나며 이곳에 이르는 변화는 실로 극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어려서 부친의 가혹한 규율로 숨 막혀 있던 차에 이탈리아에 파병된 군대조차 그에게는 행복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잠자리 불편했고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고개를 넘어왔다면 이 마을에서 느꼈을 스땅달의 행복감에 동의할 것입니다.
2 km를 더 내려가면 에뜨라블스(Etroubles) 마을입니다. 인구 1270명. 해발 1260m. 고개에서 13 km 지점입니다. 이 지역 중심마을입니다. 여관과 식당이 여러 곳 있었습니다. 마을 가운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종탑이 보였습니다. 1400년경에 지은 성당 터였습니다. 이곳에 1815년에 지은 새 성당 건물이 있었습니다. 종탑과 성당 건물은 완전히 다른 양식이었습니다. 건물 벽면에 그려놓은 벽화는 솜씨 좋은 예술가의 작품이었습니다. 낡은 건물과 어우러져 마을이 로맨틱해졌습니다.
예술가들이 찾아오는 마을. 길거리에 세워둔 란제테 (Landzette) 목각 인형도 그랬습니다. 쿰바 프라이다 축제(Carnevale della Coumba Freida) 의상을 입은 춤꾼을 조각한 것입니다. 이 축제는 1800년 나폴레옹의 통과를 축하하는 춤과 거리음악의 행렬을 주축으로 꾸며졌습니다. 외국군대가 원정와서 지나간 것을 기념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이려웠습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침략군이었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봐야 했습니다. 나폴레옹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 아니라 도시국가 형태였으니 저항이 적었을 것이란 생각. 이곳을 점령했던 오스트리아 군대에 대한 저항. 프랑스어를 같이 쓰면서 생기는 동질감. 아오스타 밸리 지역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용어입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 군복 형태에 붉은 색을 바탕으로 장식을 더하여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붉은 의상은 힘과 용기를 상징합니다. 노새꼬리를 머리 높이 흔들어대며 악귀와 불운을 쫓아냈습니다. 가면을 쓰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음식과 술을 얻어마시고 춤을 추는 행사입니다. 이 춤추는 조각을 만든 사람은 시로 비에린(Siro Vierin)입니다. 그는 지역 조각가로 해발 3000m 의 몬테 팔레르(Mont Fallère) 산 근처 고원지대에서 호텔 겸 노천 목각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트래킹에 3일 걸리는 코스입니다.
Landzette 에 헌정된 목각 인형
란제테 축제: https://travel.fanpage.it/il-carnevale-napoleonico-della-coumba-freida/
마을 안쪽 성당에서 좀 올라가면 주택가 속에 옛 성이 있습니다. 뚜르 드 바쉐리(Tour de Vachery) 입니다. 옛 로마 파수 대 자리에 12세기에 건축한 성입니다. 성은 바쉐리 가문 소유였지만 가문이 15세기에 멸문했고 성 이름으로만 남았습니다. 군사적 용도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찌가 보복성 방화로 파괴한 곳을 복원한 것입니다.
점심은 보 세쥬르 호텔에서 맥주와 소시지 요리를 먹었습니다. 23유로. 근처 캠핑장을 찾아가 캠핑카를 빌렸습니다. 52유로. 화장실이 멀어서 불편했습니다. 부드러운 산비탈에 자리잡은 마을은 결코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적지 않게 돌아다녔습니다. 배낭 맨 이들, 꼭 끼는 복장의 자전거 꾼들, 편안한 관광객들, 주민들… 저녁은 캠핑장 식당에서 라비올라를 먹었습니다. 10유로.
성당을 찾아갔는데 이탈리아 형제가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 들어오는지 모를 정도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묵상과 기도를 바쳤습니다.
부조리한 세계에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그래서 육신은 먼지오 되돌려 보내고 영혼은 거두어 불멸의 세계로 데려 가십니다. 그자 잠시 이승에 소풍나왔다가 되돌아가는 영혼이었습니다. 산을 열심히 올랐다가 내려가는 겁니다. 산 베르나르도 고개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그저 한낮 꿈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게 우리들 목숨인 겁니다. 산중의 밤은 빨리 찾아왔습니다.
[1] Stendhal, Le Rouge et le Noir, A. Levasseur, 1830
[2] -, Vie de Henri Brulard, 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