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위공자(魏公子) 무기(無忌)는 위나라 소왕(昭王)의 막내아들이며, 안희왕(安釐王)의 이복동생이다. 안희왕은 즉위하자 무기를 신릉군(信陵君)에 봉했다. 위공자는 사람됨이 어질어 선비를 존중하였고, 그 선비가 어질거나 불초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다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그들과 사귀었으며, 자신이 부귀하다고 해서 선비들에게 교만하게 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선비들이 사방 몇천 리에서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당시 제후들은 위공자가 어질고 식객이 많아 감히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침범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위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70세 된 은사가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이문을 지키는 문지기 일을 하고 있었다. 위공자는 후영을 스승처럼 모셨으며, 후영이 백정 주해(朱亥)가 어질다고 하자 주해를 잘 받들었다. 하지만 주해는 한 번도 위공자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없었다.
위공자가 출발하여 이문을 나가다가 후영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작별 인사를 했는데도 후영은 자기는 따라갈 수 없다고만 말할 뿐, 별말이 없었다. 위공자는 평소 자기가 후영에게 그렇게 잘 대해 주었는데도 일언반구 작별의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은 혹시 자기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아, 되돌아와 후영을 만났다.
「후영은 위공자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사람들을 물리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이야기를 했다. “제가 듣기로는 진비의 병부는 항상 왕의 침실에 두고 있는데, 가장 총애를 받는 여희(如姬)만이 왕의 침실에 출입하므로 훔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여희의 아버지가 살해를 당했는데, 여희는 3년 동안이나 왕 이하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주기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여희가 공자(公子) 앞에서 울자 공자께서 사람을 시켜 그 원수의 목을 벤 후 여희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여희는 공자를 위해 죽음으로 보답하기를 원하나, 아무런 말이 없으므로 돌아보아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공자가 입을 열어 부탁하기만 하면 여희는 분명 부탁을 들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호부(虎符)를 손에 넣어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북으로 조나라를 구하고 서로 진나라를 물리치면 이는 오패의 정벌에 해당합니다.” 위공자는 그 계책에 따라 여희에게 부탁을 했다. 여희는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 위공자에게 주었다.(侯生乃屛人間語, 曰, 嬴聞晉鄙之兵符常在王臥內, 而如姬最幸, 出入王臥內, 力能竊之. 嬴聞如姬父爲人所殺, 如姬資之三年, 自王以下欲求報其父仇, 莫能得. 如姬爲公子泣, 公子使客斬其仇頭, 敬進如姬. 如姬之欲爲公子死, 無所辭, 顧未有路耳. 公子誠一開口請如姬,如姬必許諾. 則得虎符奪晉鄙軍, 北救趙而西却秦, 此五霸之伐也. 公子從其計, 請如姬. 如姬果盜晉鄙兵符與公子.)」
위공자가 출발하려 하자 후영이 말했다. “장군이 밖에 있으면 왕의 명령도 따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공자가 가지고 간 병부가 부합한다고 해도 진비가 이를 의심하고 확인하면 위험해집니다. 백정 주해와 함께 가십시오. 이 사람은 역사(力士)입니다. 만약 진비가 말을 듣지 않으면 주해를 시켜 쳐 죽여 버리십시오.” 후영은 날짜를 따져 위공자가 진비의 군중에 도착하는 날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위공자를 전송하겠다고 말했다. 업에 도착해 위공자가 왕명을 사칭하여 진비를 대신하려 하자 진비는 병부를 맞추어보고 의심을 하며 군사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주해가 소매에서 40근짜리 철추를 꺼내 진비를 때려 죽였다. 위공자는 군중에 명을 내렸다. “부자가 함께 군중에 있으면 아버지는 돌아가라.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으면 형은 돌아가라. 독자나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이렇게 하여 8만을 골라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고, 위공자는 한단을 구하고 조나라를 살려냈다. 후영은 위공자가 진비의 군중에 도착하여 군사를 손에 넣은 날, 스스로 목을 찔렀다.
안희왕은 이런 사실을 알고 크게 노했다. 위공자는 위나라에 돌아가기가 두려워 조나라에 10년 동안 머물렀다. 그러자 진나라가 자주 위나라를 침공했다. 위왕은 위공자를 위나라로 돌아오게 했다. 공자가 위나라로 돌아와 상장군이 되자 각 제후국이 군사를 파견하여 위나라를 도왔다. 위공자는 이 군사들을 이끌고 함곡관까지 진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진나라는 위공자가 상장군으로 있는 동안 감히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위공자의 위세는 천하에 진동했다. 그 후, 진나라 왕이 진비의 식객들을 찾아 위공자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흘렸다. 반간계(反間計)에 넘어간 안희왕은 위공자의 직위를 박탈했다. 위공자는 계속 배척을 당하자 자신의 식읍에서 칩거하면서 4년 동안 술과 여자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결국 BC242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진나라는 위공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위나라를 공격하여 20개 성을 함락시켰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 나오는데, 위공자가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했다는 데서 ‘절부구조’가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