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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2]
2. 소모전의 가능성은? ― 두 번째 시나리오
다음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압도적인 전력에 맞서 전쟁이 지구전 내지 소모전으로 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가능성은 필자가 보기엔 첫 번째 가능성 즉 ‘단기전’ 보다는 그리 크지 않다. 우선 지금의 전투양상이 정규군 간의 정면대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이다. 그럴 경우 작전상 후퇴를 통해 전투력을 보존하기 어려운 관계로, 우크라이나 군이 만약 정면 전투에서 패배하여 게릴라전으로 전환할지라도 러시아군을 소모전으로 이끌 만한 역량은 최소화된다.
여기에 러시아군의 공격 방식과 점령지 정책에 대해서도 관찰할 필요가 있다. 현재 러시아군은 최대한 시가전을 피하면서, 무차별한 도심 포격을 자제하고 있다. 이는 국내 언론들이 서구 언론 보도를 인용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러시아군은 시민들과의 원한을 너무 깊게 사거나, 지나치게 과도한 경제적 피해를 주어 나중에 러시아가 싸움에 이기고서도 우크라이나의 사회질서를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이런 점들은 푸틴과 러시아군이 과거 체첸 반군과의 장기 전투의 경험을 통해 게릴라전에 대한 대책을 일정 마련한 때문으로 사료된다. 푸틴은 소련 해체 후 러시아를 오랜 동안 괴롭혀온 체첸 반군을 평정한 공로로 옐친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다.
러시아 군의 점령지 정책과 관련해 마침 참고할 만한 기사가 있다. 이는 영국 BBC가 3월 12일 보도한 내용에 기초해 중앙일보 기자가 작성한 것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BBC 등 외신에 따르면 남동부 자포리자주의 멜리토폴시에 친러 성향인 새로운 시장이 선임됐다. 전 시의회 의원이었던 갈리나 다닐첸코는 이날 현지 방송에 출연해 ‘멜리토폴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행정적 책임을 질 인민대표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 2일 러시아군이 장악한 남부 헤르손주에서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주민 투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BBC에 따르면 (기존) 헤르손주 의회 유리 소볼레프스키 부의장은 12일 ‘헤르손주에 인민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면서 ‘긴급회의에서 헤르손주가 우크라이나로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영국 BBC 보도에 기초한 것이기에 ‘비우호적인’ 기조를 깔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사를 보면서 러시아가 전쟁 상황에서 ‘군 통치’가 아닌 선거를 통해 ‘인민대표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주민자치를 통한 점령지 관리를 실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러시아 군의 점령지 정책은 질서를 신속히 회복하고, 잔여 무장병력이 향후 게릴라전으로 전환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점령’이 아닌 ‘중립화’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정부나 시민들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다.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와 유럽연합 사이에서 최소한 ‘등거리 외교’를 펼침으로써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쌍방의 무력충돌의 장소가 아닌 ‘경제적 가교’로서의 역할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전만 해도 매년 러시아로부터 상당한 가스관 사용료 수입을 얻어 왔다. 예컨대 러시아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었던 2006년의 경우, 우크라이나는 자국 가스의 30%(240억㎥) 가량을 러시아에 의존하였는데 그중 170억㎥는 가스관 통과료 명목으로 공짜로 사용하였다. 그때 돈으로 환산하면 약 391억 달러나 된다. 그밖에 유럽으로 보내는 가스 통과료를 별도로 받았는데, 이로부터도 100㎞마다 1.6달러씩 모두 7억6400만 달러의 수입을 획득했다.
또 한반도 전체 면적의 3배에 가까운 국토를 가진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로 유명하다. 러시아와 함께 그간 유럽의 식량기지 역할을 해왔으며, 양자의 곡물수출은 전 세계 물동량의 29%를 차지한다. 또한 옛 소련의 중공업 기지였던 관계로 공업 기반 역시도 훌륭하다. 풍부한 수력전기를 이용한 기계제조공업· 화학공업이 잘 발달하였으며, 항공우주 및 로켓공장, 조선소, 핵기술도 상당하였다.
그런데 2014년 색깔혁명의 일종인 ‘존엄의 혁명’이 발생하여 반러시아‧친서방 노선을 채택한 이후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우크라이나는 점차 산업과 농업이 균형 있는 국가에서 단순한 원자재공급 국가로 변모하여갔다. 예컨대 2013년 기계 제작 수출은 18.9%를 차지했지만, 2017년에는 9.9%로 떨어졌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철금속, 곡물, 동식물성 유지 등의 수출로 메꾸었다. 부채도 늘어났는데 2013년 우크라이나의 대외 부채는 279억 달러였으나 2021년 말에는 477억 달러에 달했다.
만약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러시아와 유럽연합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취해 ‘동서 가교’의 역할을 한다는 새로운 국가 발전 전망에 동의한다면, 지금 진행 중인 평화협상의 전망은 밝을 수 있다. 비록 이번 전쟁의 상처가 작지는 않을 지라도, 그 상처는 그간 300년 가까이 지속돼 온 양국 간의 유대를 고려하면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이 지금처럼 중간에 개입해서 젤렌스키 정권을 지원하는 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평화협상은 순조롭지 만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쟁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는 결국 다음 두 가지 요소, 즉 젤렌스키 정부의 결사항전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와 사실상 배후에서 이 전쟁을 지휘하는 미국의 태도에 달려있다.
우선 젤렌스키 정부의 항전 의지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외신이 전하는 것처럼 그것이 그렇게 확고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젤렌스키 정부는 개전 전 이미 러시아의 핵심요구인 ‘중립화’를 수용할 가능성을 내비췄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을 지낸 바딤 프리스타이코 주 영국 우크라이나 대사는 2월 14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과 관련한 입장을 바꿀 수도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럴 수도 있다"라고 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젤렌스키의 태도는 미국과 나토 등의 외부지원 상황에 따라 자주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서방 언론의 지지 분위기가 높을 때는 이에 고무되어 끝까지 항전할 것이라고 호언 하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여러 차례 나토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신속하게 승인해달라는 공개적인 요청을 했음에도, 확전을 우려하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고립감을 느꼈다. ‘비행제한구역’ 설치나 전투기 인도 요구도 거부되자 그는 비로소 미국과 나토가 평소 말하던 바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유사시 신뢰할 수 있는 세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젤렌스키는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 담화에서 “우리는 혼자 남겨져 나라를 방어하고 있다. 누가 우리와 함께 싸울 준비가 돼 있나. 솔직히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고립무원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원이다”라고 호소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 러시아 측이 내민 협상의 손길을 잘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겉으로는 미국이 권유하는 망명 제안을 거부하며 항전의지를 계속 다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러시아와의 회담에 꾸준히 응하고 있다. 지금까지 3차례 직접 회담과 1차례 화상회담을 가졌으며, 3월 10일에는 터키에서 첫 장관급 회동도 가졌다.
그렇다면 지금 협상은 어디까지 진척되고 있을까? 러시아 측의 요구사항은 ▲ 나토 가입 포기를 위한 헌법 수정 ▲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할 것 ▲ 분리주의 지역인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공화국의 독립 인정 이상 3 가지인데, 하나씩 검토해 보도록 하자.
젤렌스키 정부는 러시아 측의 첫 번째 요구안인 ‘나토 가입 포기’에 대해선 이미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이미 그 가능성은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대신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다자간 협의체에 의한 확실한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 ‘국민의 종’은 3월 8일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대신 미국‧ 러시아‧ 터키 등이 참여하는 ‘새 안전 보장 조약’에 서명하는 안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앞으로 관련 당사국들의 합의 도출이 큰 과제로 남게 된다.
나머지 요구안은 첫 번째 문제가 풀리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역시 구체적인 영토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쉽지 많은 않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자신은 영토주권이 침해되는 것에 대해선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오명을 남길 일은 하지 않겠다는 자연스런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 영토들에 대해 논의하고 타협점을 찾을 것" 이라고 말해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
두 번째 요구사항인 ‘크림반도 문제’는 러시아의 입장에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항이다. 이곳 주민들 다수가 러시아계일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러시아가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만약 이곳을 우크라이나에 넘겨줄 경우 최근 미국과 나토 군함들이 이곳까지 들어와 러시아를 ‘배꼽 밑에서’ 위협하는 상황이 재현될 것이기에 러시아는 안보상의 큰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 역사적으로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에 속했던 땅인데, 소련 시기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이를 인위적으로 우크라이나에 귀속시켰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한다면 그것을 다시 러시아에 돌려준다고 한들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는 박탈감이 상대적으로 덜할 것으로 보인다. (혹은 홍콩처럼 ‘100년간 조차지’ 형식의 타협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요구사항인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 루한스크 두 공화국의 독립 문제를 살펴보자. 그런데 러시아는 왜 이 지역에 그토록 강한 관심을 갖는 것일까? 서방 언론들은 마치 러시아가 그곳 풍부한 석탄 등 지하자원을 탐낸 ‘영토적 야심’ 때문인 양 보도한다. 그보다는 러시아로선 그곳 러시아계 사람들의 안전과 지역 안보를 더욱 고려한 때문이다. 그곳에는 러시아계가 40%나 생활하고 있는데, 신나치분자와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활개치는 바람에 사회 치안이 상당히 불안한 상태이다. 그 때문에 그 지역 주민 대다수는 이번 기회에 우크라이나 문제가 영원히 해결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다음 기사 내용을 한번 보도록 하자.
“도네츠크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할 때 대개 웃는 얼굴로 말한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패닉은 없다. 전쟁은 이미 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전쟁이 조금(또는 더 많이) 격화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러시아와의 통일이 궁극적인 역사적 사명이며 해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오데사 출신의 친러시아 DPR 전사와의 인터뷰”, 통일시대, 2022.3.12.)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 전의 원래 푸틴의 요구 사항에는 이 두 지역 러시아계의 안전 보장을 위한 ‘민스크 평화협정’ 준수만을 요구했을 뿐, 독립국가로서 지위 승인과 관련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푸틴은 곧 바로 이 두 지역의 독립 국가 지위를 승인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이러한 과정은 비록 이미 러시아가 법률상으로 이 두 지역이 독립국가 임을 승인하긴 했지만, 애초 이들 지역의 평화와 안정만 확보된다면 러-우 두 나라 간 타협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 된다.
이렇게 볼 때 이상 협상의 쟁점들은 모두 타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망은 많은 부분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 미국은 분명 이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정면 승부로는 현격한 객관 전력상의 차이로 우크라이나 군이 러시아군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다른 대안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수도 키예프가 포위되기 전에 폴란드로 피신해 줄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곳에 ‘망명정부’를 세워 우크라이나 서남부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역에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구상이다. 일종의 ‘시리아 내전’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미국의 구상은 필자가 보기엔 실현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러시아와 시리아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재래식 병기로 싸움을 하더라도, 만약 유럽에 국한한 국지전일 경우 러시아군은 나토군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하물며 3차 세계대전을 우려해 미국과 나토 군대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우크라이나 군대를 대리로 내세워 측면 지원하는 상황에서, 이 전쟁은 오래 균형을 맞추기가 힘들다. 결국 시리아처럼 수년간의 내전이 아닌 길어야 몇 개 월 내지 1년 내로 결말을 보는 전쟁이 될 것이다.
수도 키예프와 제2 도시인 하르코프 전황이 시간이 흐를수록 우크라이나 측에 불리한 것이 분명해지면서, 협상의 쟁점들은 하나 둘씩 풀려나갈 것이다. 그것은 물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나토 중간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방향에서이다. 최종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서남부 지역에 러시아군에 맞선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한다는 미국과 나토의 구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말은 이루어 질 것이다.
3. 세 번째 시나리오: 러시아의 내부 붕괴 가능성은 낮다
마지막 시나리오인 러시아의 내부 붕괴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자.
이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 경우에 성립한다. 하나는 러시아군이 초반에 우크라이나 군과의 대결에서 패배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른 하나는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서방의 전 방위적 제재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경제가 붕괴되고 대중적 불만이 폭발할 경우이다. 따라서 이 시나리오는 우선 전쟁이 ‘지구전’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럴 경우 초점은 러시아 대중들이 경제적 불만 때문에 과연 푸틴 정부를 내부에서 하야시키는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있다. 필자는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가 초전에 완강히 버틴 것이 대중들의 ‘항전’ 의지 때문이라고 한다면, 똑 같은 이유가 러시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소련 해체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과 전쟁 그리고 경제제재를 겪었으며, 그 때문에 그로 인한 관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전쟁 시작 직전에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가 조사한 푸틴의 지지율은 69%였으며, 대다수가 그의 정책을 지지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반대 의견은 2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러시아 국민들은 왜 이처럼 푸틴을 지지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은, 개전 사흘 전인 2월 21일 그의 대국민 연설 내용을 보면 대충 납득이 갈 것이다.
“오늘날 서방 국가들이 나토 동진 불허에 관한 약속을 어떻게 ‘지켰는지’ 지도를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기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 차례에 걸친 나토의 확장의 파도를 계속해서 맞았습니다. 1999년에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가, 2004년에는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가, 2009년에는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가, 2017년에는 몬테네그로가, 2020년에는 북마케도니아가 나토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비행장들이 우리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초정밀 무기 수송기를 포함하여 이곳에 배치된 나토의 전술기는 볼고그라드-카잔-사마라-아스트라한의 경계에 이르는 우리 영토 깊숙한 곳까지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영토에 정찰 레이더를 배치하면 나토는 우랄 지역 상공까지 빈틈없이 감시할 수 있습니다. ……순항 미사일 ‘토마호크’가 모스크바까지 날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35분 미만이고, 하리코프에서 탄도 미사일이 도달하는 시간은 7~8 분, 초음속 공격 무기가 도달하는 시간은 4~5 분입니다. 그야말로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권력을 장악한 급진주의자들은 반헌법적 행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그야말로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정치인, 언론인, 사회적 인사들을 조롱했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학살과 폭력, 세간을 시끄럽게 하지만 아무 처벌도 없는 살인의 물결이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덮쳤습니다. 평화적 반대시위 참석자들이 도륙당하고 노동조합의 집에서 산채로 타 죽었던 오데사의 끔찍한 비극을 떠올리면 절로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알고 있고 그들을 처벌하고, 찾아서 재판에 넘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러시아 지우기와 강제적인 동화정책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고 라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별법들을 내놓고 있고, 소위 선주민들에 대한 법은 이미 시행 중입니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 언어, 문화를 고수하길 원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외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푸틴 대통령 대국민 연설, 2022년 2월 21일)
러시아 민중은 소련 붕괴 이후 그간 진행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조국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처럼 미국과 나토의 끝없는 압박을 방치할 경우 러시아의 미래는 없다는 것쯤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나토군의 첨단 무기가 배치되고 또 우크라이나가 핵무장까지 하는 상황이 되면(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이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이제 러시아는 “가래로 막을 일을 호미로도 막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러시아 민중들이 당장의 경제적 곤란 때문에 자기 정부를 전복하고 미국과 나토에 굴복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러시아 민족을 ‘전투적 민족’이라고 평했는데 러시아인의 혈액 속에 흐르고 있는 저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나치 침략군이 900일간 철통같은 포위망을 펼쳤어도, 그 속에 갇힌 레닌그라드(지금의 페테르스부르크) 시민들은 64만 명이 아사하는 가운데서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을 들으며 배고픔을 참았다. 식물학연구소의 연구원은 식용에 쓰일 수 있었던 20만 종의 식물 종자 수집품에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아사했다.
더구나 미국과 서방이 아무리 러시아를 제재 하더라도, 러시아 뒤에는 든든한 우방이 하나 버티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국이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이처럼 뒤를 받쳐주는 한, 러시아가 비록 단기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을 지라도 결코 붕괴까지 가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 당국이 주요 생필품 가격 인상을 5% 내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 가운데, 러시아는 아직까지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모스크바 외곽에 사는 연구원 파벨은 "러시아인들은 나폴레옹 침략, 2차 대전 등 무수히 많은 전쟁을 겪었고, 1990년대 소련 붕괴 후의 대혼란도 경험했다"고 하면서, "이번 위기가 심각하긴 하지만 큰 혼돈을 초래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낮아지고, 휴가철마다 떠나던 해외여행을 못 가는 정도의 문제는 생기겠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러시아는 큰 나라이니만큼 이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모스크바 르포] ATM 앞 장사진 사라졌다", 연합뉴스, 20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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