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우(甘雨) 라디오/TV)--- http://gamwoo.tv/천수답의-새벽묵상일요칼럼-죄책감의 골방에서 이끌어 내다.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죄책감을 느끼면 주로 그 현장에서 도망치거나 숨는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고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과 그분의 말씀을 불신한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기대는 깨어지고 오히려 죄책감이 무섭게 몰려왔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았을 때 그 평화로운 행복의 동산에 살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숨었다. 그렇게 보면 천국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곳에 살아도, 아무리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어도 죄를 짓고는 죄책감의 짐에 눌려서 행복할 수 없다.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를 지으면 에덴동산도, 천국도 지옥이 된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단에게는 천국도 지옥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늘 정부의 최고 요직에 있었지만 그는 늘 불만과 마음의 불편함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다. 하늘에서의 전쟁은 사실 사단의 마음속 전쟁에서 시작된 것이다. 죄책감은 일종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낄 때 그 마음속에 다양한 감정이 자리 잡는다. 자신의 죄가 발각 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으로 발생할 수치심, 그래서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숨기거나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책감이 깊어지면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고 그런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노력은 자신을 망가뜨리고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제안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지 못하고 나이 많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의 장자의 축복을 훔쳤다. 완벽한 범죄를 준비하였지만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과 노쇠한 손이 그의 피부를 만졌을 때 이미 깊은 죄책감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창 27: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창 27:22)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어릴 때 우리 동네에는 대문집이라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 과자점이라고 해 봐야 껌이나 눈깔사탕 같은 요즘 같으면 불량과자 몇 개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 구멍가게에 들락거리는 특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초등학교시절 100짜리 주화가 유통되기 시작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어느 날 나는 큰 사고 아닌 죄를 짓고 말았다. 그 구멍가게에는 나이 많아서(연세는 정확하게 모름) 눈이 어두워진 할아버지 한 분이 구멍가게를 지키고 계셨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십 원짜리 동전을 날카로운 끌 같은 것으로 갈기 시작한 것이다.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는 크기도 차이가 났지만 백 원짜리는 끝이 매끈하지 않고 오돌오돌하기 때문이었다. 눈이 어두운 할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동전을 내밀자 할아버지가 이삭처럼 이게 얼마짜리냐? 크기는 십 원인데 만져보니 백 원이구나 하시면서 이삭처럼 대답하셨다. 할아버지가 속아 주셨는지 잘 모르지만 그날 그 사건 이후 나는 학교에 갈 때마다 그 구멍가게 앞에 지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혹시 그 점빵(가게) 문이 열릴라며 두려움에 뒤를 돌아보곤 하였다.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그날이후 도망자가 되었다. 아버지를 속인 죄책감과 형의 분노로부터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서 이십년 넘도록 형을 다시 만나기까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체 죄책감의 심연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어느 날 주님은 새벽 일찍부터 제자들을 깨워서 여행을 재촉하셨다. 그리고 여섯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사마리아 땅 수가라는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다. 그녀는 자신의 살아 온 삶의 무게와 죄책감 그리고 남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때문에 칩거 중인 여인이었다. 그래서 남들과 같이 우물도 같은 시간에 쓰지 못하고 정오 한 낮에 물을 걸러 나온 그 여인을 만나서 그녀를 죄책감의 골방에서 끌어 내셨다. 누구도 그녀 앞에서 말하지 않고 늘 사람들은 뒤에서 그 문제를 속닥이면서 비아냥거렸지만 주님은 그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요 4: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리고 그날 주님은 그녀의 죄책감을 치료해 주셨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지적은 비난이 아니라 우리를 죄책감의 골방에서 이끌어내어서 죄로부터 정죄가 아닌 용서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돌아갈 때에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