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절집이 어딜까? 규모로 치자면 불법승 삼보 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우렁차고, 지리산의 정기를 듬뿍 담은 화엄사는 장엄하다. 나름 내새울만한 풍광과 내공을 자랑하지만 가장 예.쁜. 이란 말에 방점을 두면 단연코 내겐 선암사가 우리나라 최고의 예쁜 절이다.
어마무시한 중창불사로 십년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달라지는 절집들을 비하면 선암사는 나무 둥치가 굵어지고 늙은 매화의 향기가 진해진 것 말고는 삼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태고종과 조계종의 선암사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해결되지 않아 순천시에서 관리해왔기 때문에 재산권 행사가 재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하니 중창불사는 물론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다치지 않고 지금까지 고스란히 옛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됐으니 우리들에겐 크나큰 행운이다.
구차한 속세의 인연까지 들이대며 실상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그동안 얼마나 수박 겉핧기식의 여행이었나를 확실히 깨달았다. 만물이 깨어나기 전 울린 머리맡의 도량석 소리는 만가지 풍경보다 내게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대웅전에 가면 부처님께 절을 두번 해야하나, 세번 해야하나도 헷갈렸는데 이젠 제법 가부좌를 틀고 정좌할 수 있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절마다 템플스테이가 생겨 <지나가던 과객이온데 하룻밤 유할 수 있는지요>라고 이젠 구차하게 사정하지 않아도 된다. 화장실도 멀고, 옆방의 숨소리까지 감지되는, 창호지 한 장으로 안과 밖을 경계짓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요사채지만서 하룻밤을 자야만 느낄 수 있는 참맛 몇 개를 이야기하련다. 혹시 조계산 자락 선암사에 가거든 하룻밤 꼭 묵으시라.
스님들의 발걸음은 씩씩하기 이를데 없고 친절 또한 과하다. 승과 속이 적당히 버무러진 결혼을 허용하는 태고종 특유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어쩌다 마주치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어디서 오셨습니까 혹은 편안히 쉬셨습니까>를 묻는다.
절집이 있는듯 없는듯, 박제가 되어버린듯한 문화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산 역사와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쓰윽 지나가면 발견할 수 없는 선암사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만 알 수 있는 즐거움 몇 개를 말해보고자 한다.
1. 칠전선원 4단 샘물
대웅전을 뒤 선암사 매화나무 돌담길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칠전선원 안 달마전에 4단으로 된 자연석을 판 우물이 있다. 선암사 뒤 유서깊은 야생차밭에서 흘러 내려온 물줄기를 4개의 돌확을 거치도록 만든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만든 샘이다. 둥글고 네모난 모양이 하늘과 땅을 상징하니, 샘 하나에 온 우주를 담은 셈이다.
4단 돌확의 물은 각각 그 쓰이는 용도가 다른데, 첫번째 네모난 돌확은 상탕, 청수(淸水) 라고도 부른다. 찻물(茶), 부처님께 올리는 물이다. 두번째 둥글게 옴폭 파인 돌확은 중탕, 이곳의 물로는 일반 스님들과 대중들의 음용수, 밥을 짓거나 과일을 씻을 때 사용한다. 세 번째 돌확은 하탕이라 부르며, 세수를 하거나 옷을 빠는데, 네 번째 돌확은 허드레탕으로 다비(양말)를 빨거나 해우소를 다녀온 뒤 손 씻는 물로 사용된다.
칠전선원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이므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곳이다. 언젠가 사진으로 본 적이 있어 선암사에 갈 때마다 찾아 헤맸으나 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 매향 진한 새벽 산책길에 만났다. 감격적인 해후였다. 혹 스님들께 방해가 될까봐 달마전 마당으로는 나가지 못한채 부엌 입구에서만 바라보다 왔더니 못내 아쉽다. 다음에 선암사에 가거든 정식으로 부탁말씀 드리고 두번째 돌확의 물을 떠서 때묵은 갈증을 삭혀야겠다.
2. 원통전 꽃문살과 토끼, 천정의 물고기
천개의 손과 눈으로 중생들을 살펴보다 그 명호를 부르면 바로 달려오는 관세음보살을 안치한 원통전의 참맛은 사방에서 염불소리가 들리는 밤에 빛을 발한다. 세심하게 조각한 모란꽃 창살과 문 아래의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 우물정자 천정에 조각된 물고기를 찾아보는 재미는 숨은그림 찾기의 진수이다.
<5월이 되면 자산홍도 피고 왕벚꽃도 피어 우리절이 가장 아름다운데, 올해는 꽃이 덜 피었네요. 목련이 해걸이를 하는지 작년에는 흐드러지더니 올해는 몇 송이 피지 않았어요. 꽃 필 때 한번 더 걸음하시지요> 어둠 속에서 예불을 마친 스님이 말씀하신다. <밤이 되니 더욱 진해지는 매화향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걸음인걸요. 감사드려요> 스님과 객은 무심히 말하고 스쳐 지나간다.
3. 뒷간 혹은 깐뒤
수리 보수하여 고졸한 옛맛은 사라졌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화장실이다. 해우소 혹은 정랑이란 점잖은 말대신 뒤깐, 좋지 아니한가.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 데리고 갔던 남도 여행에서 아이가 가장 오랫동안 기억했던 건물이다. 깐뒤에 들어가야 해? 라고 물었던 뒷간 혹은 깐뒤... 2010.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