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호는 1958년 8월에 두 명의 고아를 데리고 무등산 제2수원지 위 숲속에 움막을 치고 생활하다가 10월에 수원지 관리 공무원에게 발각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결핵환자를 경원시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김준호 선생은 무등산 여러 곳에 흩어져 생수가 나는 곳에다 움막을 치고 기독병원에서 6개월 입원 기간이 끝나 강제 퇴원당한 무의탁 환자들을 수용하여 요양시켰다.
1956년부터 시작된 송등원은 이현필의 수제자 김준호가 책임을 맡아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김준호는 방림동 동광원 본원과 항상 깊은 관계를 갖고 광주 기독병원에서 강제퇴원당한 환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무등산 전역으로 땅과 집을 매입하고 움막을 지어 환자들을 수용 돌보게 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송등원에서 무등원으로 탈바꿈 하였다.
또한 광주 기독병원의 카딩톤 원장은 방문실을 운영하면서 퇴원환자들의 지속적인 치료를 위하여 간호사와 전도사를 보내면서 의료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생활비를 조금씩 지원함으로써 육적인 면까지 보살펴 주었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남자 제자들은 대다수 결혼생활을 함으로써 동광원 원내 생활을 할 수 없음으로써 동광원에는 남자 제자들이 드물었다. 특히 남자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오북환 정인세 김광석 서재선 배영진 등의 초기 출발 당시부터 함께 하였던 분들은 제자라기보다 동지였다. 특히 이세종 선생의 남자 제자들인 박복만 이상복 화순 한천의 정씨 4형제와 화학산의 한종식 문제현 등은 다 결혼한 사람들로서 동광원 원내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동광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사회로 나가서 결혼 생활을 이끄는 남자 제자들이 모여서 형성한 ‘삼온회’는 동광원 외곽 단체에 불과하였으며 항상 발언권은 약하였다.
이렇게 동광원에서 결혼 생활을 하지 않고 끝까지 이현필과 삶을 같이 한 제자는 대표적으로 김준호를 비롯하여 오북환 장로의 아들인 오세휘 그리고 복태경과 박영규 김익선 이목일 등이며 또한 한국 전쟁 이후로 가입한 한영우 등이 독신과 수도로 오늘의 동광원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독신 수도하며 지내는 남자들은 그 수가 적고 흩어져 있어 자연히 각 분원에서 실질적으로 원내 생활을 하는 제자들은 자연히 여성의 제자들이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광주 방림동 화순 도암 경기도 오원과 벽제 계명산 진도 함평 남원 서리내와 갈밭과 대산면 운교리 등에서도 여성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이 여성 주류를 이룬 동광원을 이끌어가기 위해서 이현필은 여성 제자들 사이의 화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현필은 1960년 7월 12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피력하였다.
‘협동 정신을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의 대원칙 하에서 피차 개성들을 살려두는 자유를 주고 행복을 향유하는 협력을 주옵소서.’
이현필은 자신이 주님의 부르심을 언제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떠난 후의 동광원 운영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제자 훈련과 인재 양성에 더욱 주력하여야 했다.
여제자 중심의 동광원 운영에서 여성 특유의 성격이 보이지 않게 나타나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현필의 남제자로서 스승 이현필을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모셨던 김준호는 방림동 동광원 본원에서 거의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부분을 일찍이 감지한 이현필은 김준호에게 양림동 다리 밑에서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였으며 이 생활이 끝나자 이번에는 무등산을 중심으로 결핵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겼다.
송등원 체제로 있을 때에 김준호를 도와서 광주 동구 산수동과 지산동 딸기밭(현 광주 신양파크호텔 아래 지역)에서 생활을 당시 환자들의 식사 빨래 온방 등을 책임졌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주로 김천자 김은자 등이 맡아서 수고하여 주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해방 이후에 광주에서 가입한 여제자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남제자들은 동광원 여제자 사회에서 주류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찾고 영성 수련과 교육의 장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무등산을 중심으로 한 무등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제자로서 김준호와 여제자들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여제자들이 힘을 합하여 이끌어가는 공동체가 ‘무등원’이었다.
무등산 북서쪽으로부터 시작하여 북동쪽으로 펼쳐진 무등원에서 결핵환자들을 따뜻한 배려와 영양 공급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의 국가적 혹은 지역적 경제 상황으로는 이들에게 까지 구호의 손길이 펼쳐질 수 없었다. 다만 광주 기독병원 원장 카딩톤과 한미 구호재단 등에서 베풀어 주는 혜택이 고작이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비교적 조직의 동일성과 지휘체계가 잘 갖추어진 천주교의 입지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