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
1) 해방의 신학과 문익환
해방이라는 단어는 1945년 이래 우리역사를 가로지르는 핵심단어이며, 문익환 목사 또한 함께 동참했던 민중신학의 중심명제이자 기독교성서역사의 주요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신학사상을 해방의 신학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예언자로서, 문익환은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불꽃같은 생을 살았다.”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대학로에서 진행된 노제에서 그의 영정이 움직이자 누군가 격정을 못 이기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문익환 목사는 단순히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사회선교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예언자였다.
목사님의 독특한 삶은 그의 독특한 가족배경에 기인한다.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던 1899년 2월 28일 관북의 네 가문 1백 41명은 북간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키울 것을 약속하고 함께 국경을 넘는다. 문익환의 고조부 문병규는 이 새 공동체의 웃어른이었다. 일제시대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의사 안중근 등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문씨네 식객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장로와 전도사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된다. 당시 캐나다 선교부는 미국 선교부와는 달리 장차 조선의 교회는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겨 유능한 인재를 눈 여겨 보고 있었는데, 문재린이 그 첫 수혜자가 되어 캐나다 유학을 하게 된다. 유학 후 용정의 한 교회를 섬기던 문재린 목사는 3.1 봉기에 가담했던 일로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에 구속된 이후, 조선공산당 그리고 소련사령부에 차례로 체포를 당해 옥고를 치르면서 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오고간다. 이는 당시 북간도의 현실이 외세가 난무하는 살벌한 전쟁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문 목사님이 방북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을 당시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이 글은 재판정에서 어머니 김신묵 여사에 의해 직접 낭독이 되었다.)
“재판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아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아들은 72살이고 나는 95살이오. 익환아! 너는 우리 7천만 민족을 위해 일하고 감옥에 들어갔으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익환의 어머니 또한 젊은 시절 기독교 여성해방 운동에 힘입어 ‘고만녜’ 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갖는다. 이때 명동촌에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여성이 50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기독교 신(新)여성운동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신묵은 이 ‘신’자 여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명동여학교 동창회장과 여전도사로 일하면서 용정 만세시위에 참가한 지도자였다. 문익환과 동생 문동환 형제의 민족사랑은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었다.
2) 예수 가문, 그리고 문익환 가문
이 대목에서 나는 문익환 목사를 ‘오늘의 (작은) 예수’로 이해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가문과 문익환의 가문을 연계시켜보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예수라고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가족 얘기는 극히 작은 몇 구절에 불과하기에 신학적 상상력을 더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얘기는 서구의 전통 성서 해석 방법인 기록된 문자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는 ‘문자주석’(exegesis) 방식이 아닌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상황주석’(eisegesis) 방식이다. 강연자는 ‘문자주석’을 넘어선 ‘상황주석’이야 말로 예수께서 ‘사람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바, 성서의 본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진리 추구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족 또한 문익환의 가족과 같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의 피압박민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수 탄생에 관한 얘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둘 다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만, 마태가 아버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우선 관심하는 것은 예수의 가족이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는 마태의 얘기이다. 물론 마태는 그의 전체 신학 틀을 모세 오경에 맞추고 있기에 편집사적 관점에서 예수가 제2의 모세로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해방의 역사를 펼쳐 나갈 메시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보다 실(實) 역사적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문익환의 고조부로 시작하는 가족사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하였듯이 예수의 가문 또한 요셉 이전 세대에 다윗 왕조의 회복과 독립을 꾀해 로마와 헤롯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요셉 또한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아들 예수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을까?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교리에 물든 사람이라면 필자의 얘기에 대해 코웃음을 치겠지만, 역사적 예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해방을 염원하는 문익환의 정신세계가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듯, 예수의 정신세계 또한 그의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언제나 한반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압박과 지배를 받았고, 그래서 외세 어느 한쪽이 지배세력이 되면 유대는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과 해방을 추구해 왔다. 우리나라 근세 짧은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중국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을 때는 갑오개혁이 보여주듯 일본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고, 일본이 지배세력이 되었을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의 세력을 빌리고자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 탄생 직전 유대왕국은 헬라제국의 후예들인 북방 시리아의 셀류크스 제국과 남방 애굽의 프톨레미 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바 있으며, 예수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 제국의 지배가 가시화되자 이미 바벨론 제국의 포로에서 해방을 안겨주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아 제국의 힘에 의지했고 이 희망은 동방박사의 출현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한때 파르티아제국은 로마제국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적도 있었고 이때 헤롯대왕은 로마로 피신을 가기도 했었다. 따라서 요셉 가족의 애굽 피신은 단순한 도피로 보기보다는 문 목사님의 가족 이야기에 견주어 볼 때,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아니면 요셉의 죽음 또한 십자가라는 정치적 죽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머니 마리아의 얘기로 옮겨가 보자. 신학자 피오렌자는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라는 기도에서 ‘비천한 신세’를 로마군에 의한 강간 임신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갈릴리 민중 전체가 갖고 있는 반제국반식민 저항운동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리아가 노래하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돌려보내셨다’는 구절이 유대왕국의 독립과 민중혁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실현된 바 있다. 어린 문익환이 고조부부터 이어지는 선조들의 투쟁의 역사를 들었던 것처럼 어린 예수 또한 선조들의 영웅적인 투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갈릴리가 마치 예루살렘의 유대주류사회로부터 밀려난 변방이었듯이 북간도 또한 변방이었다. 변방은 밀려난 자들의 한이 넘치는 땅이지만, 이 한은 공동체적으로 해방의 새 역사의 꿈을 키우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문익환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그의 37년간의 삶은 로마제국 당시의 갈릴리의 예수가 33년간 겪었던 그 억압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문익환 또한 출애굽으로서의 민족 해방,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 해방은 삶 자체의 지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