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156. [역경의 열매] 이용원 (1-13) 메콩강 황금 삼각지대를 복음의 트라이앵글로
주님, 76세 은퇴 목회자에게 새 소명… 메콩강 국경지역의 나라들에 복음을
오랜 이민 목회를 마치고 인도차이나 메콩강 지역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이용원 목사가 손자를 안고 사모와 함께했다.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에서 느끼는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다. 황혼이 질 무렵 빛바랜 벤치에 앉아 세계 모든 인종이 지나가는 모습을 찬찬히 쳐다보면서 단풍을 즐기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된다. 한때 푸르름을 뽐냈던 울창한 나뭇잎들이 낙엽으로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새삼 오묘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 나이 올해 76세, 1939년생이다. 우리 나이대가 아마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6·25전쟁, 조국의 근대화와 맞물리면서 가장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세대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제 손자나 보며 소일할 수 있는 나이지만 하나님께서 '메콩강 선교'라는 귀한 사명을 주셔서 아직 일선에서 뛰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하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 3개국이 만나는 메콩강 국경지역은 '골든트라이앵글'로 불리며 마약 거래지로도 유명하다. 이 메콩강은 이 세 나라와 함께 베트남 캄보디아까지 포함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인도차이나 지역은 90% 이상이 불교권이며 태국을 제외하고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모두가 사회주의 국가다.
메콩강선교회는 내가 사는 뉴욕을 거점으로 한국까지 여러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힘을 모아 선교의 땅끝으로도 불리는 이 골든트라이앵글이 가스펠트라이앵글이 되도록 선교에 진력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천천히 소개하겠지만 이 사역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구체적으로 섭리하고 계신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뒤 교수로, 목회자로, 이민목회자로 사용하셨고 은퇴 후에는 다시 선교사로 불러 사용해 주고 계신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찬찬히 돌이키면 모두가 감사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내 삶에 좌정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어 이 역시 감사하다.
나는 지금 뉴욕 중심부 맨해튼 시내에서 북쪽으로 30여분 가면 나오는 화이트 플레인(White Plains)이란 지역의 중심가에 살고 있다. 머시 백화점과 시어스 백화점이 바로 옆에 있는, 마치 호텔같이 지어진 멋진 아파트다. 아파트 약자가 PHIG인데 이는 펜트하우스란 뜻이다. 15층 중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호실에 리빙룸과 부엌, 발코니까지 딸린 우리 집을 와본 손님들은 입을 떡 벌린다. 말은 안 해도 "은퇴 목회자가 이런 호화판 아파트에 살아도 되느냐? 엄청 비쌀 월세는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표정이 읽히곤 한다.
그러나 이곳은 집이 없던 내게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가 분명하다. 사택에만 살아 은퇴를 해도 집 한 칸 없던 나는 "하나님, 이제 살 집 하나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사회복지가 잘된 미국은 은퇴한 노인들을 위한 아파트를 잘 지어 싸게 월세를 주는데 좋은 조건일수록 경쟁이 심하고 자리가 나지 않는다. 나도 몇 곳에 서류를 넣었는데 집수리까지 깨끗하게 끝낸 이 아파트에 와서 살라는 매니저의 통보가 온 것이다. 웬만한 중심가 아파트 월세가 3000∼4000달러인 미국에서 내가 매달 400달러를 내고 노인복지시설까지 잘 갖춰진 이곳에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보금자리임이 확실하다.
내가 오랜 신앙생활과 목회 생활,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얻어진 분명한 진리가 있다. 그것은 내 중심을 하나님의 사이클에 맞춰놓고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도 나의 가정과 자녀, 내가 기도하는 부분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의 이야기보따리를 출생부터 차근차근 털어놓아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용원 (1) 메콩강 황금 삼각지대를 복음의 트라이앵글로
* [역경의 열매] 이용원 (2) 광복 맞아 만주에서 충남 공주까지 '엑소더스'
* [역경의 열매] 이용원 (3) "주의 종으로 살자" 중앙대 졸업후 신대원 도전
* [역경의 열매] 이용원 (4) 아들에게도 유전처럼 전해진 '고백 후 중생 체험'
* [역경의 열매] 이용원 (5) "목회학 영역 넓히자" 성균관대서 심리학 공부
* [역경의 열매] 이용원 (6) 30대에 기숙사 사감… 신앙을 군대식으로 훈련
* [역경의 열매] 이용원 (7) 살벌한 교도소 부흥회… 400여명 회개의 기적이
* [역경의 열매] 이용원 (8) 유신 반대 '한모임' 사건으로 남산 중앙정보부로
* [역경의 열매] 이용원 (9) 美 유학길에 맡은 이민목회… '민족목회'로 승화
* [역경의 열매] 이용원 (10) 미국교회서 쫓겨난 지 1년도 안돼 새 성전 입당
* [역경의 열매] 이용원 (11) 목회자 사명은 양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
* [역경의 열매] 이용원 (12) "4200㎞ 메콩강 유역은 선교의 땅 끝입니다"
* [역경의 열매] 이용원 (13·끝) 한국, 선교 1등 주자 되는 날 세계 대국으로 도약
◇약력=중앙대 법대 및 서울신학대학원 졸업, 미주성결대학 명예신학박사, 서울신대 조교수 역임, 미국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 뉴욕한빛교회 담임목사 역임, 현재 메콩강선교회 대표
***[역경의 열매] 이용원 (2) 광복 맞아 만주에서 충남 공주까지 '엑소더스'
소련군에 쫒겨 걸어서 58일만에 도착 장로 아버지 따라 가족들 믿음의 생활
조선족들이 모여 살던 만주에서 삼촌과 함께 사진관을 찾아 찍은 이용원 대표의 어린시절 모습. 8·15 광복 후 모진 고생을
겪으며 만주에서 고향 공주로 돌아왔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일제 강점기 가난을 피해 한국인들이 이주했던 만주 호림(虎林)이란 곳이다. 부친(이봉주)은 어린 나이에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결혼하고 선진문물을 체험한 뒤 한국에 돌아와 만주 목단강의 철도국 직원으로 근무했다. 일본 회사 직원으로 파견나와 나를 낳은 것이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했던 부친은 이 때문에 광복 후 호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보통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는데 우리가 살던 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부친은 일본사람으로 오인돼 바로 러시아군에게 체포됐다가 조선인인 것을 증명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몸을 많이 상한 부친은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가족과 두만강을 건넜다.
만주에서 부친의 고향인 충남 공주까지 무작정 걷고 걸어야 했던 우리 가족은 무려 58일 만에 고향에 도착했다. 당시 만주에서는 횡행하는 마적단에 몸을 숨겨야 했고, 한국에 와서는 기진해진 가족들이 쉬다 걷다를 반복하다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오는 내내 추위 때문에 고생했던 나는 공주에 와 폐렴에 걸려 생사를 오가기도 했다. 간신히 생명을 건진 나는 공주초등공민학교 1학년에 들어가 자동차도 기차도 본 적 없는 친구들에게 만주에서 고향까지 걸어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구들은 귀를 쫑긋 세워 듣곤 했다. 내 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학년 때 6·25가 일어난 것이다.
전쟁의 고생이야 당시 모두가 겪은 아픔이기에 그냥 넘어가고자 한다. 계속적인 세파를 겪은 아버님은 신문물을 경험한 영향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후일 장로가 되셨다. 이것은 우리 집안의 놀라운 변화였다. 따라서 우리 가족은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내게 미션스쿨을 가도록 권유하셔서 중고등학교를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부친은 내게 기독교 신앙에 눈뜨게 해주셨다. 또 아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쌓으셨기에 오늘 내가 이만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감사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서울로 올라와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당시는 사법고시 패스가 인생 최고의 성공으로 귀결되던 때였다. 그러나 법을 공부하다 보니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신 도산 안창호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의 생각과 글에 매료돼 문학과 심리학, 인문학에 더 관심을 쏟았다.
대학 3학년 때인 1960년 4·19가 일어났고 애국사상에 심취돼 있던 나는 친구들과 머리띠를 두르고 데모 현장에 나가 중앙청과 경무대를 향해 뛰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어진 5·16군사정변을 보며 군 입대를 했고 모진 고생을 하며 3년 군생활을 마쳤다.
4학년에 복학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법고시는 보기 싫었고 내가 어떤 직업을 갖고 평생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생각을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졸업을 앞둔 2월의 어느 추운 날, 전차를 타고 을지로6가에서 내려 장충단공원을 향해 올라가는데 갑자기 "이용원. 난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넌 뺀질거리기만 하느냐?"는 생각인지 음성인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 음성은 없어지지 않고 자꾸 나를 따라다녔고 나는 어느 작은 교회에 들어가 난생 처음 철야기도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오버코트를 입었지만 교회 안은 추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내 몸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기도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 내 몸을 포근히 감싸안아 주는 느낌 가운데 밤이 훌쩍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은 주일이었다. 교회에서 밤을 새운 내게 정동철 목사님(당시 서울신대 교수)이 '서울신학대학 학보'를 내밀며 보라고 주셨다. 이날 설교자로 초빙된 정 목사님은 아무런 생각 없이 내게 주신 신문이었는데 이곳에 '서울신학대학원 입학요강'이 실려 있었다. 난 조용히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거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3) "주의 종으로 살자" 중앙대 졸업후 신대원 도전
학기초 부흥회 철야기도 마지막 날 맨발로 강단 올라 "난 죄인…" 고백
중앙대학 재학 중 군입대해 복무하던 시절의 이용원 대표(가운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서울신학대학원생 모집 광고를 보고 입학하게 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 난 신학대학은 일반대학에 가기에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장충동의 한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한 후 내가 신학대학원을 가야겠다고 갑자기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앙대학교 졸업식날과 서울신학대학원 입학시험 날짜가 같았다. 졸업식을 포기하고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증을 받았다. 대학생활을 할 때 학비는 대전에 계신 부친이 보내주셨지만 생활비는 가정교사를 하며 벌어 썼던 나였다.
이제 아들이 졸업을 해 돈을 벌어 학비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할 부친에게 다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신앙이 돈독하신 부친이시니 내가 주의 종의 길을 간다고 말씀드리면 기뻐하실 것도 같았다.
대전집을 찾아 과정을 상세히 말씀 드렸는데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야, 이놈아. 신학대학은 아무나 가는 곳이 줄 아느냐. 고작 하루 기도하고 일시적인 감정으로 가는 곳이 아니야. 그렇다면 아직도 안 늦었으니 당장 그만둬."
난 내 행동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던 차에 부친의 말은 큰 충격이 되었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등록금을 받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내가 소중히 갖고 있던 손목시계를 비롯해 이것저것 모두 팔고 남아 있던 생활비까지 털어 간신히 등록을 마쳤다. 대학원 강의를 듣기 시작하는데 교과서를 살 돈도, 밥을 사먹을 돈도 없었다. 당시 신대원은 현재 아현성결교회 자리에 있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면 슬쩍 밖으로 걸어나와 아현동 일대를 배회하다 들어가곤 했다. '금식'이 아닌 '굶식'이었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배가 너무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 취직이나 할 것을 괜히 신학대학원에 온 것이 아닌가 후회도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기 초마다 부흥회를 여는데 공군 군종감이셨던 임동선 목사님이 강사로 오셨다. 마지막 날 금요일은 철야기도회로 모두 뜨겁게 기도했다. 동료 신학생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성령 충만하게 기도하는데 나는 냉랭했다. 왜 친구들과 달리 조금만 기도하고 나면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는지 나도 답답했다. 내가 아버지 말대로 사명을 받지 못한 채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새벽 4시가 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내가 그 자리에서 구두를 벗고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설교자가 있는 강단으로 뛰어갔다. 강사는 웬 학생이 맨발로 자기를 향해 뛰어오니 정신이 이상한 학생이 온 것으로 판단하고 옆에 있던 한 교수에게 나를 진정시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교수는 내 머리를 내리 누르며 "학생 정신 차려 왜 이래. 여기 나오면 안되지"라고 했다. 이에 "저는 정신이 말짱합니다. 회개하려고 이곳에 나왔습니다. 제게 회개할 시간을 주세요. 시간을 안 주시면 전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교수는 할 수 없이 나의 뜻을 강사에게 전했고 난 10분간이란 단서 하에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전 교수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공개회개의 봇물을 터뜨렸다. 숨길게 없었다. 아니 이것은 성령이 시키는 회개였다. 나도 모르게 내 죄의 고백과 회개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갔고 난 시간이 얼마나 지나는지도 몰랐다. 마이크를 돌려받은 강사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왔다.
"신학생이면 이 정도 회개는 미리 하고 들어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하고 정직해서 좋았습니다. 아직도 이런 회개를 하지 않은 분 있으면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거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무릎 꿇고 통곡하는 회개운동이 예배당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나는 이날에서야 비로소 중생의 체험, 본 어게인(Born Again)을 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4) 아들에게도 유전처럼 전해진 '고백 후 중생 체험'
서울신대 신대원서의 공개 회개 사건… 장남 대연이도 대중 앞에서 같은 체험
1966년 5월 30일 신학교 후배의 주선으로 만난 아내와 약혼식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생의 체험, 하나님을 뜨겁게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 세상은 온통 다른 색깔로 보였다. 그동안 초등학교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으나 형식적이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것이 부끄러웠다. 학생회장도 했고 주일학교 교사도 했지만 나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다. 나는 남들처럼 기도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 앞에서 요란하게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며 하나님을 만났는데 이것도 유전인가 하는 것이다. 부친이 예수님을 만난 날짜가 1950년 6월 11일이다. 부친도 기도하다 새벽 4시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회개를 하셨다. 그때 같이 있었던 분들의 말을 빌리면 뜨겁게 회개하던 모습이 마치 제 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고 한다. 성령에 온전히 취하면 이성적인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회개는 목사가 된 나의 장남(이대연 목사)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면서 회개한 것으로 또 이어졌으니 회개도 기질과 관계있는 것인지, 유전되는 것인지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신학대학원 기숙사에서 지내며 거의 굶다시피 보낸 1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때가 내 삶에 있어 가장 경건하고 은혜로웠던 시기였다. 육의 만족은 영성을 키우지 못한다. 철저한 자기부인과 내려놓음, 절제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기숙사 방을 같이 쓰던 친구(최치규)는 결혼하고 딸도 있는데 뒤늦게 사명을 받아 신학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먹을 것이 생기면 챙겼다가 꼭 나눠 먹곤 했다. 1학년 평균성적이 90점이 넘었던 나는 OMS선교회 장학금 수혜자가 되어 학비에 기숙사 식비까지 제공받아 지긋지긋했던 배고픔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따라서 남은 대학원 2년은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친구와 나는 서로 이렇게 약속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의 종으로 부르신 것에 감사하자. 그래서 그 어떤 곳에서 우리를 부르더라도 가리지 말고 가자. 설사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는 오지 산골짜기라도 말이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1960년대에는 목회자에 대한 인기가 바닥이었다. 목사 사모가 된다는 것은 고난을 각오해야 했기에 아주 믿음이 좋지 않고선 신학생과의 만남을 꺼렸다. 나도 나이가 차 이제 목회지로 나가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면 아무도 안 가는 산간벽지라도 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 악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돈 없고 힘없는 가난한 유학생과 결혼해 전기도 수도도 없는 산골에 가서 내조해 줄 사모감은 없을 것 같았다.
이때 난 신앙이 한창 불붙어 있었다. 내 만족을 위해 연애하고 놀러 다니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끼고 있던 터라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아주 단순했다.
"하나님. 제게 짝을 주시면 하나님이 맺어주신 배필이라 믿고 결혼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던 후배 신학생이 내게 신붓감을 소개해 주었다. 박정자란 이름을 가진 신앙심 깊은 여성이었는데 나를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몇 번의 데이트 후 우린 결혼을 약속하고 1966년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가난한 신혼생활이 시작됐다. 이후 어려운 목회자의 생활에서 기도와 믿음으로 자녀를 교육하고 가정을 잘 이끌어준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다.
주님이 명령하는 사역지는 어디든 가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던 중 첫 번째 임지가 결정됐다. 그곳은 오지가 아닌 서울의 가장 중심인 청와대 옆 체부동성결교회였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5) "목회학 영역 넓히자" 성균관대서 심리학 공부
전도사에서 대학 조교, 전임강사까지 신학에 가장 도움될 일반 학문에 도전
오지 사역도 하려 했던 나는 서울 중심부 청와대 옆의 체부동성결교회 전도사가 됐다.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던 당시 황경찬 담임목사(오른쪽)와 함께 했다.체부동성결교회 전도사가 된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신앙의 열정을 사역에 쏟아부었다.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을 황경찬 담임목사님이 예쁘게 보시고 지원을 많이 해주셨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고급 종이에 교회 신문을 발행했고, 교인수첩도 디자인을 멋있게 해 나눠주었다. 교패도 예쁘게 만들어 심방 때마다 직접 망치를 두드려 달아주면 좋아들 했다. 교회 행정서식이나 교적부 등도 새롭게 시도했는데 이런 모습들이 내가 속한 성결교 교단에서 소문이 좋게 난 것 같았다.
이렇게 전도사로 3년이 흘렀다. 하루는 서울신대 조종남 학장님이 나를 보자고 해 만났는데, 학교 조교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셨다. 조 학장님은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막 귀국한 유학파셨다. 당시 학교에서는 교수로 키울 만한 인재를 세 사람 선정하기로 했는데 내가 졸업성적도 좋았지만 일반대학에서 법학을 했고 전도사로서 평도 좋아 이 중 한 사람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선정된 두 사람은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의 박장균, 서울사대 국어교육과를 나온 이정근 등이었다.
우리는 조교생활을 하면서 각자 가르칠 과목을 정했는데, 내가 맡은 것은 '전도학'과 '목회실습'이었다. 전도사로 활동한 경험을 살릴 수 있도록 배려를 받은 셈이다.
난 강의를 좀 새롭게 시도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중심의 교육방법을 택했다. 대학과정이지만 마치 대학원 강의처럼 자기가 관심 있어 하는 전도 분야를 글로 써오게 해 발표를 시킨 것이다.
그러자 학생들이 따분해 하지 않고 각자의 전도방법을 재미있어 하며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질문도 받고 대답을 하게 했는데, 이 전도학 수업이 후일 목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여려 명에게서 들었다. 목회실습 과목도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해 각기 교육전도사로 활동하며 갖는 내용을 발표시켰다. 나는 전도학 마지막 강의에서 항상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여러분, 교회는 지역의 중심(센터)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을 위해 설교하셨고 정신을 위해 교육하셨으며 육을 위해 먹을 것을 주셨고 병든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전인구원입니다. 교회 성장에 급급한 교회는 외형은 커질지 몰라도 영향력을 잃고 종국에 무시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목회할 때 24시간 교회 문을 활짝 여시길 바랍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모두 개방하고 나누십시오. 섬기시길 바랍니다. 교회가 주민들의 친근한 이웃임을 느낄 때 저절로 교회로 발길이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많이 질수록 높아지고 커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교회 안에서만 제한시키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과 이웃에 하나님의 권능이 물결침으로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앞당길 수 있길 희망합니다."
전임강사로 강단에 섰지만 강의하면서 내가 계속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신학과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반 학문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심리학을 더 공부하기로 했다. 당시 일반심리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은 몇 곳 없었는데, 성균관대학원에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학부에서 심리학을 안 했기에 전공과목 30학점을 더 하는 조건이었다. 이 공부는 내게 학문의 폭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서울신대가 아현동 시대를 마감하고 경기도 부천 소사동으로 이전했다. 그런데 내게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강의하는 것 외에 기숙사 사감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신학생들은 1학년 때 무조건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다. 이때부터 목회자가 되기 위한 철저한 신앙훈련을 시킨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6) 30대에 기숙사 사감… 신앙을 군대식으로 훈련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시위 한창 "이왕 하려면 타 신학대보다 먼저하라"
서울신학대학 조교로 선발된 세 사람. 왼쪽부터 이용원 목사, 박장균 이정근 교수로 이들은 모두 일반대학을 나온 뒤 신대원을 졸업했다.
서울신학대학 기숙사 사감을 맡게 된 나는 아직 팔팔한 30대라 기숙사 학생들의 신앙을 군대식으로 훈련시켰다. 새벽기도회 후 전원 운동장에 모이게 해 국민보건체조를 하고 운동장도 몇 바퀴씩 돌게 한 뒤 식당으로 가도록 했다. 당연히 한 사람도 빠지면 안 되었다.
그런데 저녁 외출을 나갔다 돌아오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학생들을 모아 놓고 몇 시까지 돌아오는 것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더니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밤 10시로 정했다. 못 지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물었더니 '때려도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난 정말 다음날부터 귀교시간을 어긴 학생들을 엎드리게 하고 엉덩이를 때렸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의 유신체제 하에서는 가능했던 일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내게 엉덩이를 맞았던 신학생들은 지금 모두 60대 목회자가 되어 있다. 가끔 그들을 만나면 "그래도 엉덩이 맞을 때가 좋았다"고 말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당시 1970년대 대학은 정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대학교마다 데모가 한 창이었다. 나라의 문제도 컸지만 모두가 가난하고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신학교들에서도 데모를 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오히려 "이왕 데모하려면 다른 신학대학 학생들이 한 뒤에 하지 말고 먼저 하라"고 부추겼던 기억도 난다. 이때 내가 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에 가장 강조했던 내용은 '삯군 목사가 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러분, 목회를 직장과 직업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보따리를 싸기 바랍니다. 목회해서 큰 교회 세우고 잘먹고 잘살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면 이런 사람도 보따리를 싸세요. 목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주어진 분량만큼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교회 세웠다고 칭찬하는 분이 아니고, 교회 재정이 넉넉하다고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들어온 성공지향주의 목회가 오히려 한국교회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주위에서 가끔 만류할 정도로 거침없이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어도 바른 목회를 하고 주의 종을 잘 키우는 데 일조하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리고 체부동교회에서 청소년부를 맡아 잘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청소년 부흥 집회를 가끔 나가곤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청소년들을 잘 이해해 주고 눈높이 설교를 한다는 평을 받았던 것 같다. 197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루는 한 여학생이 교수실로 날 찾아왔다.
"교수님, 저희 아버님이 인천소년교도소장이신데 한번 꼭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난 잘못한 것 없는데 왜 보자고 하시나."
농담을 건네며 웃었지만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 교도소를 가서 K소장을 만났다.
"교수님, 제가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곳에 와보니 교화를 위한 행정이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도움을 좀 주세요."
한국에 소년원이 많지만 재판이 끝나 형이 확정된 후 오는 소년교도소는 김천과 인천 두 곳에 있다고 했다. 이 중 초범은 김천에, 재범 이상은 인천으로 오는데 이곳에 13세부터 24세까지 죄수 1400명이 있다고 했다. 그중 여자는 200명 정도인데 이곳에서 매일 사건 사고가 난다고 했다. 통제가 너무 힘들어 고심하다 기독교인인 소장이 '청소년 부흥집회'를 잘한다는 나를 초청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교수님, 이 청소년들을 말씀으로 좀 교화시켜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 외에 없습니다. 제가 모두 모이게 할테니 교도소 부흥회를 열어주세요."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부흥회 날이 되어 인천소년교도소 대강당으로 들어간 순간, 난 내가 잘못 판단해 멋모르고 온 것임을 깨닫고 절절히 후회하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7) 살벌한 교도소 부흥회… 400여명 회개의 기적이
교도관들 소총 들고 만일의 사태 대비… 갑자기 성령의 비둘기가 강당 안으로…
첫 번째 부흥성회에 대한 재소자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1975년 두 번째로 열렸던 인천소년교도소 부흥회에서 설교하는 이용원 목사.
교도소 대강당 안은 수의를 입은 13∼24세 청소년과 청년 죄수 1200명으로 가득했다. 무더운 여름인 데다 잘 씻지 않은 죄수들의 몸에서 나는 땀 냄새가 진동해 코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40여명의 교도관들이 장총을 들고 서 있었다. 혹시 한꺼번에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즉시 총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장이 나를 소개하고 내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섰지만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재소자는 10%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옆사람과 떠들거나 눈을 감고 자거나 온통 따로 놀았다. 크지 않은 강당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그 소음들이 얼마나 큰지 "내가 못 올 곳에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시장통 같은 분위기를 잡을 방안이 나오지 않았다. 난 먼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원생들을 쳐다보며 마음으로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게 "저들을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게 해 분위기를 잡으라"고 가르쳐주셨다. 하기야 한창 공부하거나 친구들과 뛰놀아야 할 친구들이 악한 죄를 연속 지어 이렇게 붙잡혀 있으니 마음의 불만이 대단할 것 같았다.
"여러분. 이렇게 모였으니 소리나 한번 질러봅시다. 제가 큰 소리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면 여러분도 한번 따라 해보세요."
그러나 처음엔 아무도 따라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하고 또 하고 끝없이 내가 선창을 하다 보니 이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응어리진 것들을 토해내듯 강당이 떠나갈 것처럼 큰 소리가 나왔다. 소리가 커질수록 이들의 표정도 상기되며 말씀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 같았다.
난 한센병을 가진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설교 주제로 삼았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인데 아무리 중한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주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원론적인 기독교 영접 설교였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더니 무려 30%가 넘는 400여명이 걸어 나왔다. 분위기가 완전 반전되었고 하나님의 큰 은혜가 강당 안을 가득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둘기 한 마리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강당 안에서 나갈 곳을 못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난 "하나님께서 너무 좋으셔서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를 이곳에 보내주신 것 같다"며 "이번 부흥회 기간 동안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 거듭나자"고 거듭 강조했다.
내가 간증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더니 재소자 한 사람이 울먹이며 강대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갈아서 만든 작은 쇠칼을 들어 보인 뒤 이를 강대상에 올려놓았다.
"전 이 칼로 저를 괴롭히는 간수를 찔러 죽인 뒤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만나고 제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를 만나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3일간의 부흥회가 은혜롭게 잘 끝났다. 이후 K소장님이 반갑게 나를 찾아 오셨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 많던 교도소 사건 사고가 이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업하다가 누가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면 모두들 이를 따라하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살기와 분노에 찬 얼굴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서 많이 변했다고도 했다. 난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이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성령으로 인도해 주셔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니 모든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후 나는 이곳에 정기적으로 초청 받아 부흥회를 인도했다. 악한 죄를 지은 그들이지만 하나님의 강한 성령의 역사는 더 강하게 그들에게 임하는 것을 언제나 느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8) 유신 반대 '한모임' 사건으로 남산 중앙정보부로
젊은 목사 49명 규합 계획 사전에 탄로
1971년 목사 안수를 받고 있는 이용원 목사(오른쪽 두 번째). 젊은 목사들과 뜻을 같이하는 모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당시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곤 했다.
유신정권 말기로 부활주일을 앞둔 토요일로 기억된다. 그날 교회 청년부 강의를 끝내고 내려오는데 후배 전도사가 다가오더니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분들이라고 했다.
교회 밖으로 나가니 감색 양복을 입은 건장한 두 사람이 나에게 잠시만 좀 보자고 했다. 위세에 눌려 따라나섰는데 큰 길로 나오더니 미리 세워둔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나를 밀어넣었다. 내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붙잡혀 간 곳은 당시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던 남산 중앙정보부였다.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하던 나를 취조실같이 생긴 작은 방으로 데려갔는데 점퍼를 입은 한 사람이 들어와 나를 째려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이 새끼가 이용원이야?"하면서 내가 앉은 회전의자를 냅다 걷어찼다. 충격으로 몸이 의자와 함께 한 바퀴 돌게 된 나는 화가 치밀었다.
"이용원 목사입니다. 그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시민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됩니까?"
나도 눈을 똑바로 뜨고 큰소리로 항의하자 "야 이 새끼 봐라. 난 2국 6과장인데 네놈이 잘못한 것을 몰라?"라고 다그쳤다.
당시 난 우리나라의 내일을 걱정하는 젊은 목사들을 중심으로 '한모임'을 만들어 함께 기도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 회원 목사 49명이 횃불데모를 하고 감옥으로 자진 투옥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시행되기도 전에 발각된 것 같았다. 서슬 퍼렇던 유신시절이라 난 다시 눈을 감고 기도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내게 임해 두렵지 않았고 '말의 권세'를 주신다는 믿음이 왔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됐다. 나는 평소에 생각하던 소견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의 장점을 살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는 의도로 젊은이들을 깨우고 교육하자는 취지로 모임을 갖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사실 영구 집권하려는 독재정치야말로 잘못된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는 저를 한밤중에 이렇게 잡아오는 정권을 하나님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엔 내 기세에 상대가 눌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사님. 제가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취조했습니다. 밖에서 큰소리 쳐도 이곳에 오면 모두들 기가 죽는데 목사님처럼 당당한 분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제가 보고서를 잘 쓸 테니 이해하시고 좀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에서 나를 목사님으로 대접해 주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말의 능력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나에 대한 보고서가 잘 올라갔는지 난 이곳에 온 지 이틀 만에 "다시는 목사들을 규합해 단체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 내보내주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난 그런 서약을 할 수 없다고 버텼는데 함께 끌려온 친구 목사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더니 담당자가 그럼 당분간 안 하겠다고 서약하면 풀어주겠다고 해 지문을 찍고 나왔다. 유신시대 이곳 남산에 끌려온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우리 시대 어두운 한 단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후유증은 있었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나를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조종남 학장은 '교육을 잘 시킨다'는 조건으로 그 요청을 무시했다고 내게 이야기해주셨다. 그 후에도 내가 관여가 되지 않은 일로도 붙잡혀 가는 일이 생겼다. 난 혼란한 한국을 좀 떠나 있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해외에서 신학적으로 더 공부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9) 美 유학길에 맡은 이민목회… '민족목회'로 승화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를 맡아달라" 주위 부탁에 함석헌 등 초대해 강좌를
시무교회 은퇴식에서 선교사 파송 안수를 받는 이용원 목사 부부. 조기은퇴와 함께 메콩강선교회 사역에 앞장서고 있다.
미국 유학을 계획하던 중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미국 포틀랜드에 있는 웨스턴복음주의신학교에 가서 1년간 공부하고 돌아오라는 허락이 난 것이다. 나의 전력 때문에 신원조회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상이 없었다.
1979년 7월에 나는 아내와 두 아이를 한국에 남겨둔 채 유학길에 올랐다. 이곳에서 신학석사(M.Div) 과정을 1년 하고 귀국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사실 난 서울신학대학원에서 이 과정을 미친 상태였기에 대학교수를 하려면 박사학위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다. 이왕 미국에 왔으니 목회학박사(D.Min) 과정을 하겠다고 학교에 간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를 한국에서는 미국에 눌러 살고 싶어 한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난 의지대로 풀러신학교 목회학박사 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4개월간 대학원 학기를 끝내고 풀러신학교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중 경치가 좋다는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 2개월 후 학교 등록을 하기 때문에 시간 여유도 있어 이곳에 계신 선배 서정락 목사를 찾았다.
선배는 대뜸 "이 목사, 미국에서 목회할 생각 없어?"라고 물었다.
내가 풀러신학교 목회학박사 과정에 입학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자 지금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에 목사가 없어 어려움이 많다며 나를 대선배인 조명석 원로목사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조 목사님은 나를 보더니 "이 목사, 여기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에서 당분간만 설교해 주면 좋겠어요. 나도 설교할 수 없는 형편이고 잘못하면 교회가 없어질 것 같아요."
사연이 있었다. H목사가 여기서 3년 목회하면서 교회가 많이 부흥되었는데 얼마 전 새너제이에 교회를 개척해 떠나는 바람에 많은 교인들이 따라가 교회가 어려워졌다고 했다. 노 선배가 눈물까지 보이시는데 신학교 입학까지는 2개월이 남아 있어 내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당분간만 설교한다고 시작한 것이 무려 13년을 목회하게 되었으니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맞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이곳에 눌려 앉히셨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유학 와 공부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하게 되면서 2년6개월 동안 가족과 떨어져 있었는데 아내가 남편 없이 3남매를 키우며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다른 면에서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셨다. 아내가 금요철야기도회와 금식기도를 하다 은혜 체험을 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방언 은사와 통변, 신유 은사를 받아 기도하면 난치병 환자들이 기적적으로 치료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매우 힘든 시기였지만 보람과 의미를 찾는 기회가 된 것은 고난도 유익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 믿는다.
난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를 맡으면서 이민교회를 신앙훈련만 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민족의 동질성을 함께 지켜나가는 '민족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오시는 분, 버클리대학에 오시는 훌륭한 인사들을 모시고 강좌를 많이 열었다. 함석헌 홍종인 안병무 김동길 한완상 안병욱 등 이런 분들을 강단에 모셨다. 가족들이 들어오면서 나 역시 목회에 안정을 얻었고 성도가 늘면서 교회가 여러 사역을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자체 건물이 없어 미국교회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은 한인교회들이 이런 형태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걸핏하면 여러 문제를 제기하며 나가 달라고 했는데 세 번째 또 나가 달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까진 사정을 해서 간신히 눌러앉곤 했는데 이젠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 나가라면 나갑시다."
"목사님, 어디서 예배 드려요. 갈 데가 없는데…."
"날씨 좋잖아요. 야외예배 드립시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10) 미국교회서 쫓겨난 지 1년도 안돼 새 성전 입당
"한달 후에 8만 달러 중도금 내라" 온 교인 기도에 오병이어 기적이
1980년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 새 교회 건물을 매입하고 교회 간판을 달고 있는 이용원 목사. 빌려 쓰던 미국교회를 나와 자체 건물을 소유하게 됐다.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다 쫓겨나온 우리는 돌아오는 주일, 경치 좋은 해변에서 야외 예배를 드렸다. 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가 야외에서 예배를 드린 것은 예배 장소가 없어서 온 것 아시죠. 우리가 맘대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당을 주세요."
당분간 연속으로 야외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여기 경치도 좋은데 괜찮다고 다독였지만 성도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교회 없는 서러움을 신자들은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밤 10시가 되면 전 교인들이 각자의 집에서 성전을 달라고 합심기도를 했다. 건축비는 하나도 없었지만 교회당 나온 곳 없는가 묻고 교회를 찾아다녔다.
하루는 부동산업을 하는 장로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가보니 교회로 그대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는 회관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좋다고 당장 오퍼를 내자고 했더니 중국교회 성도가 하루 전 오퍼를 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크게 실망했지만 우리도 오퍼를 내보자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주인이 양쪽을 불러 가격 20만 달러 중 한 달 후에 8만 달러를 먼저 보내는 사람에게 건물을 주겠다고 했다. 경쟁이 붙어 가격도 2만 달러나 올라간 상태였다.
우리 교회에 8만 달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교회 장로님과 상의했더니 "목사님, 마음대로 하세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 호기롭게 돈을 마련하겠다고 했고 중국교회는 한 달 후까지 돈 마련이 어렵다며 결국 나와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장로님이 마음대로 하라고 한 것은 교회에 돈이 하나도 없는데 산다니 어이가 없어 거절의 뜻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내가 승낙의 뜻으로 받아들여 계약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당을 주십니다. 개인과 각 가정이 정성껏 기도하시면 8만 달러를 하나님께서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성도들을 독려하며 돈을 지불하기 전 주일, 건축헌금을 하기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나에게 맘대로 하라고 했던 장로님이 "저도 책임이 있으니 오늘부터 이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5000달러를 헌금하셨다. 헌금 당일이 되었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하고 헌금을 했다. 예배 후 헌금을 계수하던 집사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목사님. 8만 달러입니다. 1달러도 남지 않고 1달러도 모자라지 않는 8만 달러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온 성도가 함께 감격했다. 우리는 교회당을 구입하고 바로 입당 예배를 드렸다. 없어질 것이라고 한 교회가 1년도 안 되어 교회당까지 자체 건물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우리를 쫓아낸 미국교회에 감사패를 주자고 말한 성도도 있었다. 교회를 떠났던 장로님도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며 교회를 다시 나오겠다고 했다.
자체 건물을 갖게 되니 교회가 안정되고 성장되어 갔다. 지역에서 대표적인 한인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느 날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당분간만 설교한다는 것이 발목이 잡혀 무려 13년이 흘렀음을 발견했다. 목회하느라 목회학 박사과정도 못했고 무엇보다 서울신대로 돌아가 교수일을 계속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제 이 정도 지났으니 샌프란시스코 교회도 나 대신 새로운 목사가 와서 변화를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바깥 다른 세상으로 나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성도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내 결심을 꺾을 순 없었다. 이후 LA에서 1년, 시카고에서 2년5개월, 그리고 뉴욕한빛교회에서는 7년5개월을 목회했다. 그 기간에 뉴욕한빛교회 새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어 특별히 감사했다. 뉴욕한빛교회 목회 중 어느 목사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11) 목회자 사명은 양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
뉴욕한빛교회가 안정을 찾은 어느날 13년 헌신했던 첫 교회서 SOS 청빙이
메콩강선교회가 선교지에 설립한 교회를 찾은 이용원 선교사(뒷줄 왼쪽 세 번째). 목회자를 훈련시킨 후 교회를 설립해 주는 사역을 펼치고 있다.
"목사님, 저는 침례교단에 소속된 K목사입니다. 이용원 목사님 맞으시지요."
이름이나 전화 속 목소리가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한참이나 대화를 하다가 그가 인천소년교도소에서 나의 신앙지도를 받아 대학예비고사에 합격했던 원생이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내가 인도한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공부에 매진, 출소해 침례교신학대학을 졸업해 목사가 된 경우였다. 한때 범죄조직에 몸담아 한국의 알카포네가 되겠다며 권총을 차고 다니던 그가 예수를 만나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 또 그의 뒤에는 그를 위해 눈물 뿌려 기도한 장로인 그의 부친이 있었다.
나는 아주 반가워하며 다음 주 강단에서 간증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와 만나 감격의 포옹을 한 뒤 내가 자신의 '영의 아버지'라며 정성어린 선물까지 준비해 왔다. 나 역시 보람이 컸다.
"여러분, 저는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돼 불만과 반항의 시간을 보내다가 이 목사님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렇게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서운 죄수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니 첫째가 하나님의 은혜요 두 번째가 이용원 목사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어 참으로 감사했다.
뉴욕한빛교회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던 어느 날, 내가 13년 목회했던 샌프란시스코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교회가 어려움을 당해 분열되는 위기에 있으니 한번 와 설교해 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오랜만에 샌프란시스코 옛 목회지를 찾았다. 정말 가보니 교회 내부 갈등이 생겨 그대로 두면 교회가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교인들을 만나 인사하고 설교를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교인들은 12년 만에 온 나를 만나기 위해 100여명이나 집회에 참석했다.
"목사님이 다시 이 교회로 오신다면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성도들에게서 계속 이 말을 들었다. 나 역시 13년이나 목회를 한 교회라 애착이 컸다. 내가 목회하고 있는 뉴욕한빛교회는 이제 자리를 잡았고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목회자는 양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가야 사명을 다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환경적으로 물질적으론 뉴욕이 더 나았지만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나는 그들에게 "저도 이제 나이가 65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식으로 청빙서를 보내면 뉴욕을 떠나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금방 청빙서가 도착했다. 이제는 뉴욕한빛교회 당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과제였다. 나는 분위기를 보아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제가 13년을 목회했던 교회가 지금 심한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저보고 다시 오면 회복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여기는 성전 건축도 잘 끝났고 저 없어도 얼마든지 잘될 수 있으니 떠나가도록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이 말에 연세 많으신 성도들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느 권사님은 자기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고 했다. 13년 목회하던 샌프란시스코교회를 떠난 지 12년 만에 나는 다시 옛 교회로 부임했다. 그러니 내가 이 교회의 3대와 5대 목사가 된 셈이다.
내가 다시 샌프란시스코교회에 부임하자 친구인 오관진 목사가 "어떻게 13년이나 있던 교회에 그것도 65세가 되어 다시 또 오냐? 이런 일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놀라운 일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부임 후 1980년에 이어 두 번째 목회를 하며 계속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싸워 이겨야 했다. 그런데 교회는 나날이 단합되어 좋아지고 있었다.
나의 목회는 딴 것이 없다. 내가 먼저 섬기고 헌신하고 나누려 노력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바로 서서 성도들에게 바른 신앙을 제시해 주고 풍성한 꼴을 먹일 수 있도록 설교 준비와 영성 관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12) "4200㎞ 메콩강 유역은 선교의 땅 끝입니다"
태국 치앙라이에 세워진 메콩강선교회 선교비전센터 모습. 이곳에서 어린이 선교와 트라이앵글 3개국에서 모인 기독교 지도자 교육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2006년 어느 날, 후배 최봉일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최 선교사는 중국에서 탈북자 선교를 하다 감옥에 갔다 추방돼 방콕에 살면서 라오스와 미얀마 선교 및 탈북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이 목사님. 라오스 남욘 지역에 교회당이 필요하니 꼭 하나 지어주시면 좋겠어요."
현장을 확인하고 돕고자 방콕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라오스에서도 선교하다 발각돼 감옥에 갔다 왔다며 나 혼자 들어가 지원을 해주고 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라오스 남욘교회에 혼자 가서 현지 목회자를 만났고 건축 예정지에서 기도한 후 1만불을 건축비로 주었다. 6개월 후 성전이 완공돼 다시 이곳을 찾았다. 난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6개월 전 이곳 벌판에 서서 생캉 전도사님과 함께 성전을 세워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주셨습니다."
500여명이 사는 마을에서 200여명이 봉헌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며 선교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몇 번 이곳을 다니면서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을 최 선교사에게 밝혔다.
"4200㎞인 메콩강은 인도차이나의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을 흘러갑니다. 불교권이고 태국 외엔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제가 신학대학 교수 10년, 미국 이민목회 30년 하면서 항상 선교에 대한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메콩강 유역이야말로 선교의 땅 끝입니다. 나 같으면 방콕에 있지 않고 3개국 국경이 인접한 치앙라이에 와 살면서 선교하겠습니다."
나의 이 말에 최 선교사는 대뜸 "목사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 방콕에서 치앙라이로 이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렇다면 선교를 나와 함께 합시다. 치앙라이에 선교센터를 짓고 교회 지도자들을 이곳에 불러 신학과 성경을 가지고 교육과 훈련을 시킨 다음 자기 나라에 돌려보내도록 합시다."
우리는 선교회 이름을 메콩강선교회라고 지었고 2층 규모의 비전센터를 치앙라이에 건축했다. 본부건물과 2층 기숙사, 교회당 등 3개동의 건물이 세워졌고, 길과 배수로 공사까지 모두 마치도록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옆에 치앙라이 라차팟국립대학과 큰 호수가 있고 500m 거리에 온천까지 있어 휴양지로 으뜸가는 곳에 센터가 세워진 것이다. 태국, 라오스, 미얀마 국경과 가깝고 치앙라이 국제공항과도 10분 거리로 최적의 위치였다.
이곳에서 매년 2월과 7월에 라오스, 미얀마, 태국에 있는 교회 지도자 재훈련과 함께 대학생들에게 공부할 방을 제공해 주면서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군대생활도 최전방에서 하는 이가 있고 후방에서 하는 사람이 있듯 어디서 선교해도 선교는 선교다. 하지만 미전도 종족을 찾아가는 선교가 바울의 선교정신이며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선교임을 확신하기에 열심히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메콩강선교회를 시작하면서 조기 은퇴를 결심한 나는 후임(김종수 목사)을 정한 뒤 은퇴식 후 그 다음날 17년 살았던 샌프란시스코를 훌쩍 떠났다. 원로목사가 되었고 지금 메콩강선교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신학대학 사무처장을 지낸 조남진 장로가 선교회 총무로 수고하고 있다. 최봉일 선교사는 안타깝게도 지난해 12월 지병으로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선교센터는 부인인 오갑순 선교사가 상주하여 선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믿고 있는 크리스천에게는 예배가 축복이고, 예수의 제자 되는 것(교육)이 축복이며 선교가 축복이다. 로마가 제국이 된 것과 19세기에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 20세기 미국이 세계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모두 선교 때문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 시대이고 우리 한국이 21세기에 세계의 주인공 되는 길도 선교를 통해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메콩강선교회의 역할과 책임은 참으로 막중하다.
***[역경의 열매] 이용원 (13·끝) 한국, 선교 1등 주자 되는 날 세계 대국으로 도약
선교 성적표 현재는 미국 이어 2위
뉴욕에 모인 이용원 선교사 가족들. 신학교 교수와 이민목회를 거쳐 선교에 매진하고 있는 이 선교사는 자녀들이 바르게 잘 커 준 것에 항상 감사한다.
메콩강선교회 선교센터는 어린이들을 부모와 함께 초대해 식사대접은 물론, 인형극과 태권도 등을 공연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영어교육과 영어성경공부, 영어예배까지 시작해 호응을 얻고 있다. 앞으로 한글교육, 유치원교육, 미용·재봉·제빵 등의 생활교육과 직업훈련도 실시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내 취미는 글쓰기다. 은퇴 후 연작 장편소설 3권을 선교하면서 탈고했고, 2013년 그 첫 권인 '탈출'이 출판됐다. '하늘의 지혜, 땅의 지식'이란 칼럼집도 냈다. 나는 선교와 글을 통해 그동안 교수생활과 목회를 하면서 부족하고 못다 한 것들을 보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내(이정자 사모)가 목회를 돕고 자녀들 양육에 힘써 온 것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장남 대연(David)은 버클리대학과 풀러신학교, 트리니티신학교를 나와 현재 미국 그린스보로에서 미국인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둘째 수연(Paul)은 산호세주립대학과 미시간대학 대학원 작곡과를 나와 음악박사로 작곡을 하고 있으며 셋째인 딸 혜연(Helen)은 버클리대학, 컬럼비아대학원, 뉴욕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후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심리학자로 일하고 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장손자 정준(Chris)이가 듀크대에서 생활비까지 받는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해 할아버지가 공부했던 법을 이어 전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여선지 손자 대학교육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잘 책임져 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1979년 한국찬송가협회의 요청을 받고 찬송가 작사를 한 것이 21세기 새찬송가 76장과 571장에 수록됐다. 미주성결교회 1987년 총회에서 총회장이 돼 봉사하기도 했다.
첫 회에서 이야기했지만 은퇴 후 갈 곳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뉴욕에서 가장 좋은 노인 아파트를 주셨다. 살아온 75년을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축복인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한국의 선교 성적표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그리고 바짝 따라오는 곳이 중국과 인도다. 그런데 두 번째인 한국 선수가 지금 지쳐 있다. 그동안 한국선교는 주로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는 선교였다. 선교사 중심, 교회 중심의 선교는 선교사가 선교지를 떠나면 지속되기 어려워진다. 교회 건물만 먼저 세워놓으면 후에 사역자가 없어 교회 건물이 창고로 전락돼 버린 곳을 많이 보았다.
나는 은혜받아 사명감 있는 현지 사역자를 키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런 교회지도자가 있는 곳에 교회당을 지어주면 큰 부흥이 일어나 그 지역의 복음화를 속히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현지인 사역자가 뜨거워져야 자기가 사는 나라와 지역에서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에 '메콩강 선교센터'는 그 지역 사역자를 훈련시키고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도와주고 있다.
미얀마에 제2의 선교센터를 세우고 라오스에도 제3의 선교센터를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다. 그동안 라오스 미얀마 태국에 교회를 세운 것이 6곳이다. 미얀마 선교사역은 첸퉁침례교회(담임 리처드 목사)를 중심으로 2년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선두권 주자로 한국을 세워주심에 감사하고 선교의 1등 주자가 되는 날, 우리 민족은 아시아·태평양 시대에 세계 제일가는 대국이 될 것을 믿는다. 이것이 민족목회이다.
메콩강선교회 2차 계획이 이루어지면 캄보디아와 베트남으로도 계속 진출하여 우리 민족이 번영과 축복의 선두주자가 될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바짝 뒤따르고 있는 중국과 인도에 밀리지 않고 지친 마라톤 선수가 재충전하고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메콩강선교회(031-375-8953)에 대한 여러분의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리며 연재를 읽어 준 독자들께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