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2.21.기초과제/이은규
1. 그 지점
우리는 그 지점이 추억이다. 언어다. 그 지점에는 사랑이 있고 흔적이 있다. 거리에 있고 까페에 있다.
우리는 그 지점을 찾아 길을 떠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길은 즐겁다.
즐거운 추억과 사랑이 있다.
2. 햇빛 속
햇빛은 물 속에 녹아 있다. 파랑주의보가 내리면 햇빛은 파도처럼 반짝이며 물 속에 녹아든다.
햇빛이 녹아 있는 자리에 물총새가 훑고 간다.
3. 어제처럼
어제는 어제처럼 지나갔고 오늘은 오늘 나름으로 지나간다. 어제 핀 냉이꽃 지듯 오늘도 지나간다.
4. 흙의 집
황토를 반죽해서 벽과 기둥을 세워서 대들보를 얹어 상량식을 하고 서까래를 깐다.
나머지는 온통 황토를 발라서 흙으로 벽을 발라 흙집을 짓는다.
흙의 집은 황토방이다.
5. 개미떼
태풍이 오려나?
개미떼가 한 줄로 이사를 간다. 어디로 가는지 부지런히 걷고 있다. 관상대에서 발표하는 일기예보보다 개미의 촉각을 더 믿어야 할지 모른다.
6. 하루가 간다
노을이 지면 대숲에 날아든 비둘기.
초승달이 대나무 끝에서 들여다 보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서 하루를 보낸다.
대숲은 하루가 가는 곳이다.
7. 산 그늘
산 그늘 우거진 비탈에는 봄꿩이 제풀에 운다.
산그늘에는 노루귀꽃 토끼풀꽃 양지꽃 까마중꽃 달개비꽃 냉이꽃 봄까치풀꽃이 봄꿩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이 바쁘다.
8. 말이 두꺼워진다
입술이 두꺼우면 말이 두껍고 말이 두꺼우면 국어사전이 두꺼워진다.
말이 쌓여서 두꺼워지면 추려내고 촐개내야 한다. 다듬고 줄여내야 한다.
9. 연장들
연장상자 속에는 톱 칼 망치 낫 드라이브 송곳 자 못 철사줄 전정가위 등등이 빼곡히 얽혀 있다. 금방이라도 작업을 시작할 기세다.
10. 멍석 위
멍석을 깔고 앉아서 손가락을 꼽작꼽작 사주를 본다. 오행은 만물의 오원이니까 오원으로 나눠보면 세상이 보인다.
목화토금수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으로 다 풀린다.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이니 문제가 생긴다.
세상은 오행이다.
11. 밥상이란
밥상은 원형의 좌상이다. 식탁은 원형의 입상이다.
밥상은 가정의 예절과 문화가 있다.
물려 받고 창조하는 사회와의 통로다.
밥상은 세상을 먹는 곳이다
12. 식구들이 모인다
집은 식구들이 모이는 곳이다.
퇴근 시간에 맞춰서 오는 사람. 저녁에 오는 사람, 밤중에 오는 사람, 새벽에 나가는 사람, 아침에 나가는 사람.
집은 식구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장소다.
13. 밤새 울음이 들린다
소쩍새의 피를 토하는 울음이 멀다. 아우성처럼 깃발이 바람에 흔들린다.
사는 게 인생이면 죽는 것도 인생인 것을 피를 토하는 회한의 울음이다.
비둘기의 숨 넘어가는 울음처럼
밤새 울음이 들린다.
14. 하루를 베어 문다
개가 달을 물고 서산을 넘듯이 우리는 하루를 베어 물고 집으로 향한다.
저녁 한 귀퉁이 안방으로 잡아 당겨서 하루를 산다.
식구가 다 모여야 하루다.
15. 냉수 한 사발
여름 한 낮 계곡에서 폭포수 한 줄기를 얻어 맞는다.
등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내리는 짜릿함은 여름을 보내는 환송식이다.
냉수 한 사발은 막걸리 한 잔이다. 환송식 술잔이다.
16. 별 몇 점
바닷가에 팬션은 사방이 창이다. 술상을 마주하고 술잔에 술을 따르면 별이 몇 점 안주처럼 따라온다.
질투나 하듯이 달이 따라 온다. 밤바다에도 반달이 예저기 출렁인다. 술잔속에 별 몇점은 자꾸 내린다.
17. 풀벌레 울음소리
벌레들은 자기들이 사는 풀속이 숲이다. 몸둥이를 감추고 대화를 한다. 짝을 부르기도 하고 새끼들을 부르기도 한다. 먹이를 구할 때도 얘기를 하고 나간다. 소나무 숲속같은 개망초 밭 냄새가 좋은 쑥 밭 난초같이 시원하게 뻗은 깩살 밭, 어디든 몸을 숨기고 울어댄다.
풀벌레는 울면서 산다.
18. 사립을 나서면
사립을 나서면 그림자가 뒤를 따른다.
무대는 바뀌고 새로운 연기가 시작된다. 엑스트라에서 조연으로 조연에서 주연으로 연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무대는 펼쳐져 있다.
다시 돌아와 사립을 열고 들어가면 사립은 다시 닫친다.
그리고 말이 없다.
19. 숨이 가쁘다
목에 있는 숨은 리듬이 있다.
목에 있는 숨은 코 목 허파를 주기적으로 오르내리면서 미세한 소리를 낸다. 목에 숨이 오르내리는 동안 보일듯 말듯 콧구멍이 벌어졌다 좁아졌다 하면서. 가슴과 배가 부풀어 오르다 내리며를 주기적인 리듬으로 반복한다.
때론 아주 크게 코를 골기도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듬의 주기도 불규칙적으로 빨라졌다 느려졌다 할 때가 있다. 때론 아주 가빠지기도 한다.
리듬이 깨진 가쁜 숨소리, 급하고 가쁜 숨소리, 숨이 끊어질듯 이어지는 가쁜 숨소리.
숨은 목에 있고 숨쉬기를 하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숨은 목숨이며 생명이다
20. 거친 숨소리
거친 숨소리는 나이테다.
운동을 하고 난 뒤라면야, 일을 하고 난 뒤라면야, 노래하고 춤을 춘 뒤라면야. 그것들도 다 좋지만 거친 숨소리. 신혼 부부의 거친 숨소리, 젊은 부부의 거친 숨소리, 화가 났을까? 거칠기야 중년 장년으로 갈수록 점점 더 거칠어지고 언젠가는 가빠지고.
거친 숨소리는 주기적으로 생겨나는 나이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