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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참궁궐 창덕궁(昌德宮)
담장 안에는 천연기념물인 아름드리 회화나무들이 이무기처럼 용틀임하며 도열해 섰고, 돈화문(敦化門) 지붕 추녀마루에는 잡귀와 흉액의 범접을 막는 잡상(雜像)이 쪼르르 앉았습니다.
잡상은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도교의 잡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이귀박(허리의 앞과 뒤에 뿔이 난 짐승), 이구룡(두 개의 입을 가진 용), 마화상(말의 형상), 삼살보살(보살상), 천산갑(뒤통수에 뿔이 있는 짐승), 나토두(작은 龍의 얼굴형상)등이 그들인데, 건물의 격에 따라 3, 5, 7, 9, 11의 홀수로 올려진다고 하나 4개 같은 잡상이 올려진 것도 있다.
창덕궁에는 천연기념물이 넷이나 되는데, 돈화문 안쪽에 심어진 여덟 그루 회화나무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라 심은 것이라 하는데, 《주례》에는 에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孤卿大夫)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인 외조 중에서 삼공의 자리에 회화나무를 심어 표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화려한 이층 누각 돈화문(敦化門) .
태종 때인 1412에 처음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이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인데, 웅장한 5칸 규모로 된 유일한 문입니다. 보물 제 38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돈화(敦化)'는 사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따온 것으로 '큰 덕으로 백성들을 도탑게(정이나 사귐이 깊고 많음) 한다.'는 뜻을 담고 있고 있습니다.
궁궐의 정문이면서도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것이 의아스러운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합니다.
궁궐 정면에 북악의 매봉 지맥이 이어지는 곳에 종묘가 있어 그곳을 침범하여 문을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한 정궁인 경복궁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배치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원래 돈화문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날마다 인경(人定)을 울려 정오와 통행금지 시간임을 알리고, 새벽 파루(罷漏)에는 북을 쳐 통행금지 해제를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돈화문 밖 모습은 옛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궁궐 등 건물 앞에 돌로 쌓은 널찍한 대를 월대(月臺)라 하는데, 돈화문은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돈화문 앞으로 도로가 나고, 거기에 거듭 포장되면서 돈화문은 높아진 도로에 갇힌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의 월대는 도로면 보다 낮아져 마치 땅에 파묻힌 것을 발굴해 낸 듯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인 1912년 창덕궁과 종묘 사이 지맥을 끊는 도로를 계획하였으나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는데,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고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맥을 건드리지 않으려 궁궐 정문조차 서쪽 모퉁이에 만들고 인정문 바깥뜰까지 반듯하게 만들지 못했는데 일제가 폭거를 저지른 겁니다. 창덕궁 너머 창경궁은 아예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린 일제였지요.
또 돈화문 양 옆에 궁궐 문을 지키는 관청인 수문장청(守門將廳)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월대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탈 때 딛고 올랐던 두 개의 노둣돌과 가마를 올려 놓는 두 개의 목마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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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서쪽 담장을 따라 남쪽에는 금호문(金虎門), 북쪽에는 경추문(景秋門)이 있는데,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 때 쓰이던 상징적인 문이었으므로 평소에 신하들은 금호문으로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추문은 평소에 닫혀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에만 쓰였다고 합니다.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곧장 들어가다 직각으로 방향을 틀며 금천교(錦川橋)라는 다리가 나타납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라는 이 내를 건너면 지엄한 임금이 계시는 곳이니 궁인들이 얼씬거릴 수 없는 터부의 공간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두 개의 아치 위에 올려진 난간석이 견고하고 장중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건축학적 가치가 큰 이 다리는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홍예와 홍예 사이를 메꾸는 역삼각형 돌을 청정무사(蜻蜓武沙) 또는 잠자리무사라 하는데, 도깨비 얼굴이 부조되어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아래에는 해태상이 보인다. 반대편(북쪽)에는 거북상(玄武)이 있다.
금천교는 돈화문보다 한 해 이른 1411년에 축조되었습니다.
궁궐 입구에는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는데, 금천은 나쁜 기운이 건너지 못하게 하여 궁궐을 보호한다는 주술적인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금천교의 네 모서리에 산예(狻猊)라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석수들이 조각된 것도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리 아래쪽 가운데 교각 남쪽에는 해태상, 북쪽에는 거북상을 배치하여 수호신으로 삼았고,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 쫓는 도깨비 얼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辟邪)의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지금의 금천교가 예전의 모습과 달라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리의 윗면이 반원형으로 무지개다리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이 지금은 거의 평평한 모습으로 바뀌었네요. 언제 어떤 연유로 지금처럼 바뀌었는지 어디에도 설명이 없어 아쉽습니다.
○ 박자청(朴子靑, 1357(공민왕 6)∼1423(세종 5)).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영해(寧海). 황희석(黃希碩)의 가인(家人)이다. 내시로 출사해 낭장(郞將)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입직군사(入直軍士)로 궁문(宮門)을 지킬 때에 왕제(王弟)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들어가려 하자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알고 은대(銀帶)를 하사해 내상직(內上直)에 임명하고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철야로 직무에 충실해 선공감소감(繕工監少監)이 되고, 1396년(태조 5) 호익사대장군(虎翼司大將軍)으로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오랑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불러 타일렀다. 1402년(태종 2) 공조·예조전서, 1406년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中軍摠制兼繕工監事)가 되는 등 주로 영선(營繕 : 보수 공사)을 맡았다.
문묘(文廟)를 새로 지을 때 역사의 감독을 맡아 주야로 살피고 계획해 4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그러나 모화관(慕華館)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는 작업은 시일만 끌고 완성하지 못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공조판서를 역임할 때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의 공사를 감독하였다. 1413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경성수보도감제조(京城修補都監提調)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좌우군도총제(左右軍都摠制), 1415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이 해 창덕궁 돈화문(敦化門)과 금천교(錦川橋)을 만들었으며. 인정문(仁政門) 밖의 행랑 축조를 감독했으나 측량 실수로 기울어지자 직무 태만으로 하옥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익위(翼魏)이다.
금천교를 건너면 궁궐로 들어서는 진선문(進善門)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태종과 영조 때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와서 북을 울리도록 하였다는 신문고(또는 등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선정(善政)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치 않으나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건물은 일제 통감부 시절인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 의해 인정전 개수공사로 헐려 사라져 버렸는데, 1996년에 복원을 시작하여 1999년에 완공하였습니다. 현판 글씨는 서예가 정도준이 썼다고 합니다.
돈화문 주변에서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건물은 돈화문과 금호문, 금천교 정도... 진선문과 행랑, 내각과 옥당의 행랑, 어도 등은 모두 1991년 이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시기 언젠가 없어진 것을 지금 완공해 제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금천교와 진선문은 엇갈려 있다. 옛 사진을 보면 금천교에서 눈을 감고 곧장 걸으면 바로 진선문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축이 똑바르지 않아 보인다.
○ 진선문에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와서 치면 왕이 듣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주마고 하는 큰북이 달려 있었는데,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 한다. 이 북을 “신문고(申聞鼓)” 혹은 “등문고(登聞鼓)"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궁궐 문으로 들어가서 북을 쳤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진선문을 지나면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의 바깥뜰이 사다리꼴로 길게 펼쳐집니다.
이 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극도로 단순화되고 절제된 공간으로, 정전인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궁궐의 깊숙한 영역으로 통하는 숙장문이 있는 연결 공간입니다.
궁중의 깊은 곳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공간이라고나 할까요.
박자청은 종묘를 짓는데 관여했는데 창덕궁도 진선문(進善門)과 숙장문(肅章門) 사이의 공간배치를 종묘에 비슷하게 사다리꼴로 구성해서 행랑(行廊) 또는 행각(行閣)을 설계하였다.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 당했다고 한다.
이 곳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과 더불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인정전 외행랑 뜰'이라고 부릅니다. 마당 모양이 불균형한 사다리꼴을 이룬 까닭은, 돈화문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동쪽 숙장문 바로 뒤에 종묘로 이어지는 지맥을 건드리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입니다.
대궐 본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서는 인정문(仁政門)은 보물 8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인정(仁政)'이란 '어진 정치'를 펼친다는 뜻이니, 조선 군주의 통치 이념을 반영한 이름입니다.
인정전 외행랑 뜰과 인정전 마당을 연결하는 인정문(仁政門)은 왕이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임금이 세상을 뜬 후 엿샛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임금이 나와서 조회하는 궁궐의 으뜸 건물인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 왕의 즉위식은 선왕이 승하한 지 6일이 지난 후 거행된다.
선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의 동쪽에 왕세자가 머물 여막을 치고, 유언장과 국새를 여러 가지 의장물과 함께 설치하여 새 왕에게 국새를 건네 줄 준비를 한다. 왕세자는 여막 안에서 입고 있던 상복을 벗은 다음 예복인 면복(冕服)을 갈아입고 빈전의 뜰로 나아간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장과 국새를 받아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전해주고는 여막으로 돌아간다.
여막에서 다시 나온 왕세자는 붉은 양산과 푸른 부채를 든 자들에게 둘러싸여 가마를 타고 어좌에 설치된 정전으로 향한다. 이리하여 왕세자가 오른쪽 계단을 통해 어좌에 올라앉는 순간, 새로운 왕이 탄생하게 된다.
즉위교서가 반포된 후 정전에서는 향을 피우고, 즉위식장을 가득 매운 대소 신료들은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에 얹으면서 “천천세(千千歲).”라고 외친다. 이는 왕조의 운명이 오래도록 영원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이곳 창덕궁 인정문에서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단으로 된 월대 위에 서 있는 장중하고도 화려한 이층 누각 인정전(仁政殿)이 보입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창덕궁 내의 유일한 국보 건물(225호)입니다.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웅장한 중층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여 있어 실제로는 1층 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정전은 궁궐의 으뜸이 되는 건물로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은 것입니다.
태종 때인 1405년에 처음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순조 때인 1803년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인정전 지붕 하얀 용마루에는 구한말부터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으로 쓰였던 오얏꽃 문양 다섯 개가 고른 간격으로 늘어서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양은 원래는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언제 어떤 연유로 설치되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곳 외에도 덕수궁 석조전의 정면과 측면, 창경궁 장서각 등에 이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대한제국은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성씨인 '오얏 리(李)'를 본 따 오얏꽃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인정전의 월대를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가 있습니다. 뜻 풀이로는 '밟는 길'인데, 임금이 이 돌을 밟고 지나는 것이 아니라 가마를 탄 왕이 그 위로 지나가는 길입니다.
평평한 돌에 도드라진 문양,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서 있으며 봉황이 조각되어 천상의 세계로 묘사되는데, 이는 임금의 신성한 권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정전 내부를 들여다 보면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 용상이 있고, 그 뒤로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있습니다.
어좌 위에는 닫집이 있어 위엄을 더합니다.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 한 쌍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은 쪽마루가 깔려 있지만 인정전 바닥은 원래 진흙으로 구운 네모난 벽돌(전돌)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1908년 무렵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등을 달고, 서양식 가구를 들이며 유리창문과 커튼 등 서양식 실내 장식이 도입되면서 마루로 바뀌었다 합니다.
내부를 보고나서 인정전 월대에 서서 넓은 마당을 내려다봅니다. 마당에는 반듯반듯한 박석(薄石)이 질서정연하게 박혀 있고, 가운데에는 정일품에서 종구품까지의 품계석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습니다.
일본인은 조선왕조가 다했음을 상징하는 의미로 조정에 박석을 걷어 내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창경궁은 아예 벚꽃과 모란을 곳곳에 심고, 연못을 파고,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어 돈받고 입장하는 곳으로 1984년까지 유지했습니다.
창덕궁의 정전(政殿)인 이곳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거행했던 공간입니다.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데, 눈앞에는 일본인 관광객 한 무리만 가득합니다.
나무 한 그루까지 사실적으로 그린 《東闕圖)》를 보면 원래의 박석은 품계석 안쪽 어도는 반듯한 네모진 모양이지만 그 바깥은 일정한 모양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이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갖도록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근래에 복원한 박석은 거의 균일한 네모 모양으로 지나치게 곱게 다듬어져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이지 않나요. 복원을 하면서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합니다.
동쪽 회랑에서 바라보니 인정전의 모습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이제 인정전을 다 보았으니 임금님의 집무실이 있는 동쪽의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정전인 인정전의 동쪽 회랑 바깥에 남향하고 있는 선정전(宣政殿)은 이름 그대로 임금이 정사를 펼치던 편전(便殿), 말하자면 임금님의 일상적인 집무실입니다.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이 '정전(正殿)'이라면, 선정전처럼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은 편전(便殿)이라 합니다.
선정문을 들어서면 좁은 뜰이 있고 바로 선정전으로 이어집니다.
선정전은 정전인 인정전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건물이며 마당도 아주 좁습니다.
다만 지붕은 푸른 유기기와(청기와)로 되어 있어 위엄을 보이는데,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로 보물 8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선정전 앞쪽으로는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가 있어 인정전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돌출된 전면 복도는 정조 임금이 돌아가신 뒤부터 선정전이 혼전(魂殿)으로 쓰인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선정전은 정조의 혼전으로 쓰인 이래 순조, 헌종, 철종 등 역대 임금의 혼전으로 쓰였고, 그래서 전면에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혼전(魂殿)으로 빈번하게 쓰이면서 선정전은 편전의 기능을 잃게 되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熙政堂)이 대신 편전(便殿)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조 이후 혼전(魂殿)으로 사용된 흔적인데 이 부분은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선정전 내부 모습입니다. 인정전에 비해서 공간이 아주 작습니다. 임금은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모든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또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宴會)를 열기도 하였답니다.
선정전 바닥에는 지금은 마루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방전(方專)이라는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마루로 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선정전은 선정전만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있고 선정전 앞의 정자각과 선정문, 그리고 선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것이라 합니다.
선정전과 희정당 앞마당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정원과 함께 시원스레 넓은 마당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원래 이곳에는 궁궐에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던 온갖 건물들이 선정전을 겹겹이 에워싼 모습으로 들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맨 왼쪽에 푸른 지붕을 한 선정전 일부가 보인다. 정면은 희정당이고 그 뒤로 왕비의 처소인 대조전이 있다.
선정전 바로 앞에는 임금을 호위하는 일을 맡은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임금을 모시는 내시가 있던 장방(長房)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이 동서로 길게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선전관청 바로 아래 마당에는 사관이 머물던 우사(右史)와 당후(堂后)가 있으며,
마당 중간에는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보관하는 문서고(文書庫)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사와 당후가 있는 마당의 바로 남쪽 마당을 중심으로 은대(銀臺)와 상서성(尙書省)이 있었는데 이는 도승지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일을 담당하던 승정원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그 외에도 승정원의 다락인 육선루,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의 악기를 보관하는 악기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임금의 옳고 그름을 아뢸 일이 있을 때 모이던 대청(臺廳) 등이 사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東闕圖)》일부. 인정전 동쪽에 선정전이 있고 선정전 앞쪽으로 수많은 관청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으로 보면 선정전 앞마당이 복원된 지금보다 훨씬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사, 당후, 은대, 대청이 있는 마당 오른쪽에는 장방, 활과 화살촉을 관장하는 궁방(弓房), 왕의 식사와 궐내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였던 사옹원(司甕院) 또는 주원(廚院), 생선과 채소 공급을 맡았던 공상청(供上廳), 문서 처리와 연락 등 행정 실무를 맡았던 서리방(書吏房),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무를 보던 정청(政廳), 대은원(戴恩院),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등촉방(燈燭房),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임금을 알현하는 것에 관한 일을 맡은 사알방(司謁房), 임금의 식사를 비롯한 궐내의 더운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 궐내의 잡무를 맡았던 내시의 내반원(內班院) 등이 각각 작은 마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기관들이 선정전을 둘러싸고 모인 까닭은 물론 임금의 편의와 관련된 것이지만, 임금의 거처를 여러 겹으로 에워쌈으로써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하는 기능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관청이 있는 전각이 모두 사라지고 빈 마당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일제 36년을 거치며 궁궐이 철저히 훼손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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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해설
부용지라는 아름다운 인공 연못을 둘러싸고 주합루(규장각)와 영화당, 부용각, 서향각 등 크고 작은 전각들이 어울린 멋진 공간입니다. 사계절마다 변하는 주변 경치가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곳.
연경당 일원이 정조 임금의 손자로 할아버지 정조를 롤모델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효명세자의 정신이 빛나는 공간이라면, 이곳은 바로 정조 임금의 얼로 가득한 공간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물은 부용지 동쪽 높은 월대 위에 우뚝 선 단층 누각 영화당(暎花堂)입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二翼工)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 익공(翼工) / 초익공, 이익공
익공은 기둥 윗몸과 창방의 짜임 부분 또는 기둥머리에 건물 앞뒤 방향으로 날개 모양으로 짜맞춘 공포 형식이다. 임진왜란 후에 급격히 보급된 것인데, 주삼포(柱三包)의 약식인 것처럼 보이는 구조이다.
'이익공'은 기둥 위에 덧붙이는 쇠받침(살미)이 둘로 된 익공. 하나면 초익공이다. 살미는 소혀처럼 생겨 소혀의 사투리인 '쇠서'라고도 부른다. 기둥과 도리 사이에 보의 방향으로 꾸미는 공포의 한 부재이다.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정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정조 임금 때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왕이 친히 참석한 가운데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시관이 내린 시제에 따라 마지막 시험을 본 곳이랍니다.
원래는 건물 앞에 '춘당대(春塘臺)'라는 마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른 마당에 과시를 보느라 엎드린 팔도 선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그러나 지금은 '춘당지(春塘池)'라는 커다란 연못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나마 담장으로 막혀 창경궁 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춘향가'에서 이도령이 장원급제할 때의 시제가 바로 춘당대와 관련된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아니었던가요.
영화당은 광해군 때 처음 지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숙종때(1692)에 재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애련지와 애련정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지요. '영화(暎花)'는 햇살처럼 환한 꽃이 핀 아름다운 풍광을 나타낸 것이니 부용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나타낸 당호로 보입니다.
현판 글씨는 영조 임금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영화당 왼쪽을 돌아들면 커다란 인공 연못 부용지가 나타나고 북쪽 언덕에는 규장각으로 흔히 알려진 주합루라는 이층 건물이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그 서쪽으로는 서향각(書香閣)이라는 단층 전각이 보입니다.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 처음에는 연지(蓮池)라고 불리다가 부용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부용(芙蓉)'은 요즘에는 무궁화를 닮은 아욱과의 커다란 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연꽃'의 딴이름이었습니다.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연못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하여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의 형태로 조성되었습니다. 장대석으로 쌓아올린 연못은 동서 길이가 약 35m 남북 길이가 약 30 m인데,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하나 떠 있습니다.
이곳에서 임금은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 임금이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곳의 전각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동쪽에는 영화당, 남쪽에는 부용각, 북쪽에는 주합루와 서향각, 그리고 서쪽에는 사정기비각이라는 작은 전각이 있습니다.
연못은 남쪽 모서리에는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튀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입니다. 이런 생강을 표현한 문이 주합루로 오르는 어수문(魚水門)이지요.
오른쪽 전각이 영화당, 어수문이라는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마주 보이는 이층 건물이 주합루입니다. 주합루 서쪽에 있는 건물이 서향각입니다.
주합루(宙合樓)는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지었습니다. 아래층은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 서고로 위층은 열람실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에서 점차로 정책연구 기관으로 기능하면서 정조의 개혁 정치와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됩니다.
주합루의 정문 어수문(魚水門)은 이름이 특이한데,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한자 성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임금은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3갈래로 되어 있는데 임금은 가운데로 올라 어수문으로, 신하들은 그 옆의 작은 문으로는 출입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어수문 출입이 금지 되어 있어 아쉽게도 주합루와 서향각 등은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없습니다.
어수문은 일주문 형태의 작은 문이지만 팔작지붕에 용조각을 치장하는 등 화려한 단청 장식이 돋보입니다. 어수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상징적인 문이자 인재들의 등용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문의 이름은 《삼국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후 나날이 가까워지자 도원결의를 맺었던 관우와 장비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에 유비는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 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하는 고사성어가 생겨난 것입니다.
정조 임금도 제갈량을 만난 유비처럼 빼어난 신하들을 만나 천하를 도모하며 의기투합하고 싶었던 뜻을 '어수문(魚水門)’이라는 이름을 통해 표현했던 것입니다.
주합루(宙合樓) 아래층에는 조선 왕실의 족보·서책을 보관하고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던 공간으로 규장각이라 하였고, 2층은 열람실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주합루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규장각이 인정전 서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지금은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릅니다. 1776년 정조 임금이 즉위한 해에 건립되었는데 이 곳에는 정조의 어제, 어필,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 인장 등을 보관하였습니다.
이곳은 채제공, 정약용을 비롯하여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이덕무 등 빼어난 학자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입니다. 젊은 학자들이 밤낮으로 학문의 증진에 힘쓰고,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정사를 논하고 연회를 즐겼던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었습니다.
정조의 친필 현판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양식인데, 건물 기둥은 둥근 것과 모난 것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하늘과 땅의 이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합루가 자리 잡은 곳은 산비탈을 적절히 활용하여 자연과의 조화가 빼어납니다. 주합루에올라 부용지와 부용각을 바라보는 전망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 싶지만 출입이 허용되지 않고 있으니 상상만 해 봅니다.
주합루 서쪽에 있는 서향각(書香閣)은 규장각의 부속건물입니다. 이곳은 주합루나 봉모당에 봉안된 임금의 초상화(御眞)와 글(御製)과 글씨(御筆)를 옮겨와 바람과 볕에 말리던 곳이라고 합니다. 서책을 말리며 책의 향기를 맡으니 그래서 전각의 이름이 '서향(書香)'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4개월에 한 번씩 말리고 봉모당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서향각 안에는 정조임금이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이 걸려 있는데, 이는 정조가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정하고 그 내력을 서문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궁중 곳곳에 걸어 달(임금)이 모든 시냇물(신하)에 비추는 이치를 실제 구현해 보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존덕정(尊德亭)과 서향각 안에 같은 글이 하나씩 전하여 걸려 있다고 합니다.
서향각은 또한 왕비가 양잠을 직접 시연하는 친잠례를 행했던 장소이기도 했답니다. 서향각의 안쪽에 순정효황후가 쓴 것으로 전하는 '친잠권민(親蠶勸民)'이란 현판이 있는데 '친히 누에를 쳐서 백성들을 권장한다' 는 뜻이니, 이는 1777년에 양잠소를 설치하여 왕비가 아녀자들의 모범이 되고자 누에를 쳤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상시적으로 누에를 친 것은 아니하고 합니다.
1911년에 총독부가 서향각을 누에 치는 양잠소로 만들어서 그 기능이 변질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 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수문 옆으로 굵은 대나무 줄기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 살아 있는 대나무를 심어 이중의 울타리를 만든 모습 말입니다.
이 울타리가 바로 '취병(翠屛)'이라고 하는 한국 고유의 울타리입니다. '푸른 병풍'을 뜻하는 취병은 살아있는 나무를 이용해 만드는 울타리로, 대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작은 나무나 넝쿨식물을 올리는 그야말로 정감 넘치는 '친환경 울타리'입니다.
이 아름답고 격조 높은 울타리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원은 물론 창덕궁 후원에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중에도 '취병'이란 말이 나타나고 있지요. 제4연의 초장 '삼곡(三曲)은 어디메오 취병(翠屛)에 닙 퍼졌다.' 라는 구절...
순조 때(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에도 취병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연과 건축의 절묘한 어울림을 추구한 전통 정원의 백미인 취병은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을 최근 문화재청이 복원하였으니 다행스런 일입니다.
부용지의 남쪽과 서쪽 방향에는 부용정이라는 작은 정자와 '사정기비(四井記碑)'라는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이 있습니다.
위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비각입니다. 사정기비(四井記碑)는 세조 때 팠다는 네 개의 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합니다. 원래 우물을 찾은 자리에 술성각(述盛閣)을 세웠는데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우물 두 개는 사라져 버렸고, 1690년에 이 두 우물을 정비하며 숙종이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운 것이랍니다.
현재는 나머지 두 개의 우물마저 사라지고 없네요.
부용정 서쪽, 이 비각이 있는 서쪽 지역도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여 있습니다.
부용지의 남쪽에는 부용정(芙蓉亭)이란 열 십(十)자 모양의 아름다운 정자가 부용지에 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연못 안에 팔각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을 올린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연못을 향한 쪽마루에는 닭다리 모양의 계자난간을 둘렀고, 반대편에는 평난간을 둘렀습니다. 정자 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뒷쪽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습니다. 창은 연못 쪽으로는 卍자 모양의 완자살창을, 나머지에는 띠살창을 달았습니다. 창을 들쇠에 매달면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 정자는 원래 숙종 때(1707)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지어 '부용정(芙蓉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이곳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합니다.
부용정 뒤 언덕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대 위에 독특한 결을 가진 자연석을 올려 놓은 장식돌이 있습니다. 자연석에 이끼가 파랗게 끼었으니 그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석물을 석함(石函)이라고 부르며, 괴석(怪石)을 받치고 있다 하여 괴석대(怪石臺)라고도 합니다. 창덕궁 곳곳에는 이런 석물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용지 주변에는 이 외에도 몇 개의 전각이 더 있습니다.
서향각 뒤편에는 성정각에도 있는 같은 이름의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1645(인조 23)년에 건립할 당시는 취향정(醉香亭)이라고 하는 초당이었으나 1690(숙종 16)년 여름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어 대신을 보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바로 비가 내려서 숙종이 이를 기뻐한 나머지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이름도 희우정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합루 동북쪽 언덕 위에는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천석정(千石亭)'인데 현판을 ‘제월광풍관'으로 달았습니다. 학자들이 독서를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제월광풍(霽月光風)'은 '비 갠 뒤의 밝은 달빛과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로 쓰입니다. 이는 북송의 문인 황정견이 염계 주돈이를 칭송하여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 속이 시원하고 깨끗하여 광풍제월과 같다."고 한 데서 유명해진 말입니다. 광풍제월은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부용지 주변의 옛 모습은 지금과 그리 다를 바 없네요.
《동궐지》를 보면서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희우당과 제월광풍관도 서향각 서쪽과 주합루 동쪽에 각각 보이네요.
이 곳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규장각 팔경'이 있다고 합니다.
봉모운한(奉謨雲漢) : 봉모당의 높은 하늘
서향하월(書香荷月) : 서향각의 연꽃과 달
규장시사(奎章試士) : 규장각에서의 시험 보는 선비들
불운관덕(拂雲觀德) : 불운정의 활쏘기
개유매설(皆有梅雪) : 개유와의 매화와 눈
농훈풍국(弄薰楓菊) : 농훈각의 단풍과 국화
희우소광(喜雨韶光) : 희우정의 봄빛
관풍추사(觀豊秋事) : 관풍각의 가을걷이
그러나 지금은 이들 건물들이 대개 사라진 상태이고 사라지진 않았더라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니, 팔경의 진면목을 즐기고 느낄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부용지 주변 경관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과 시(詩)가 있는 12폭짜리 병풍이다.
세로 1.38m, 가로 5.62m로 바탕에 수묵과 엷은 채색을 하였다. 이이가 은거하던 황해도 고산의 아홉 경치를 1803년 7월과 9월에 걸쳐 궁중 화가 및 문인 화가들이 그린 후 문신들이 여기에 시를 적은 것을 모아 표구한 것이다.
각 표구의 맨 위에는 유한지가 쓴 표제가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송시열의 한역시들이 적혀 있다. 그리고 화면의 중·하단에는 고산구곡의 각 경관들을 그렸고, 그 여백에는 각 폭마다 김가순이 쓴 글이 있다. 각 그림은 김홍도, 김득신을 비롯한 당대 이름난 궁중 화가들이 그렸다.
실제 경치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존의 다른 고산구곡도를 참고하여 그렸다. 그림마다 이이가 동자를 데리고 소요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각 경관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그려졌다.
1987년 7월 16일 국보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12첩이며 세로 1.38m, 가로 5.62m(각 폭 세로 60.3cm, 가로 35.2cm)로 종이 바탕에 수묵과 엷은 채색을 하였다. 1803년(순조 3) 현부행(玄溥行)의 발의로, 이이가 은거하였던 황해도 해주의 고산구곡의 경치와 시를 모아 화원과 문인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문신들이 시를 쓴 것을 한데 모아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각 폭의 최상단에는 유한지(兪漢芝)가 쓴 표제가 있고, 그 아래 상반부에는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송시열의 한역시 및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서인(西人)계 기호학파(畿湖學派) 제자들의 역화시(譯和詩)가 김조순(金祖淳) 등 안동김씨 일문의 문신들에 의해 적혀 있다. 이어 화면의 중·하단에 고산구곡의 각 경치가 그려져 있으며, 여백에는 각 폭마다 김가순(金可淳)이 쓴 제시(題詩)가 있다.
제1폭에는 '율곡선생 영산중사경시(詠山中四景詩)'와 '고산석담기(高山石潭記)'라는 제자(題字)가 명필 최립(崔岦 )의 글씨로 씌어 있다.
제2폭은 《구곡담총도》를 김이혁(金履赫)이 그렸으며, 이후
3폭부터 11폭에는 각각 고산구곡의 경치가 하나씩 그려져 있다. 곧, 1곡인 《관암도》를 김홍도(金弘道)가, 2곡인 《화암도》를 김득신(金得臣)이, 3곡인 《취병도》를 이인문(李寅文)이, 4곡인 《송장도》를 윤제홍(尹濟弘)이, 5곡인 《은병도》를 오순(吳珣)이, 6곡인 《조협도》를 이재로(李在魯)가, 7곡인 《풍암도》를 문경집(文慶集)이, 8곡인 《금탄도》를 김이승(金履承)이, 9곡인 《문산도》를 이의곡(李義穀)이 그렸다. 마지막 12폭에는 송시열의 6대손 송환기(宋煥箕)의 발문과 석담구곡시가 있다.
진경산수화와 남종화의 화풍을 따랐고, 구곡의 풍경마다 이이가 동자를 데리고 소요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각 경관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법으로 되어 있다. 당시 이름난 화가들의 특색과 기량이 잘 나타나 있어 그들의 역량을 비교하여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 학자들의 인적 계보와 성향을 연구하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된다
후원(後圓)은 이름 그대로 궁궐의 뒷동산인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어서 금원(禁園)이라고도 하고, 궁궐의 북쪽에 있으니 북원(北園)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한때는 비원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는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기 위하여 지은 관리소를 일컫는 이름이니 올바른 이름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곳은 오랫동안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공간이지만 지금은 예약을 통해 제한된 인원만이 관람할 수 있습니다. 야산과 골짜기에 어울리는 전각과 연못 등을 조성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하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중년 여인, 가이드가 나타나고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담장 사이로 난 길을 통하여 후원으로 연결됩니다.
후원 길로 들어서자마자 길 왼쪽으로 관물헌(집희)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망춘문(望春門)이 나타나네요.
그런데 망춘문은 성정각의 뒷문이라기보다는 원래 희정당의 동문이라고 합니다. '망춘(望春)'이란 '봄을 기다린다.'는 뜻이니 '봄'을 뜻하는 방향인 동쪽으로 향한 문 이름이라야 어울립니다. 그런데 지금 이 문은 동쪽 방향에 있으면서도 담장의 방향과는 직각으로 틀어서 남족을 향하고 있는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네요.
《동궐도(東闕圖)》에는 희정당의 동문으로서 동쪽을 향해 그려져 있는데 어찌된 것일까요. 그런데 지금의 망춘문 바로 아래에 현판이 없는 동향문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진짜 망춘문이고, 망춘문이라는 현판을 단 이 문은 원래 응경문(凝慶門)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망춘'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도 전각이나 정자의 이름으로 즐겨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과 공터에는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흔히 동궁(東宮)이라 일컫는 왕세자의 거소 말이지요. 세자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존재여서 동쪽에 집을 마련하고 동궁(東宮)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중희당은 1891년 고종의 명에 따라 이전하였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중희당과 연결된 육각누각인 삼삼와(三三窩), 칠분서(七分序), 세자의 서재로 소주합루라고도 불렸던 승화루(承華樓)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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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를 당하기 몇 개월 전, 승화루(承華樓)는 일본 경찰들이 상주하는 창덕궁경찰서(?)가 되어 버립니다.
관물헌 뒤쪽 담장을 돌아선 곳에서 가이드는 후원을 돌아보는 순서를 알려줍니다. 부용지와 주합루→애련지→불로문→연경당→관람지와 존덕정→옥류천 순입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한 숲 사이로 난 길이 너무 아름답고 상쾌합니다. 가다보니 오른쪽 골짜기 아래 숲 사이로 부용지와 부용정, 어수문과 주합루 풍경이 나타납니다.
○ 불로문(不老門)과 의두합(기오헌)
왼쪽으로 애련지를 끼고 내려서는 길, 불로문(不老門)이라는 돌문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하나의 통돌 판석을 ㄷ자 모양으로 깎아서 세운 문,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운 것이랍니다. 세로판석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아래쪽(동쪽)에도 또 하나의 불로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용지와 주합루에서 본다면 이 두 곳의 불로문을 지나 연경당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로문 안쪽, 왼편 남쪽 언덕으로는 몇 채의 전각이 보입니다.
담장을 따라 왼쪽으로 이동하면 전각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 금마문(金馬門)이 나타납니다.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의 궁궐 미앙궁(未央宮)에 있던 문으로, 문 옆에 동으로 만든 말이 있어 금마문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또 '금마'는 한나라에서 책을 갈무리하던 곳의 이름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마문 안의 전각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1809∼1830)가 독서를 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기오헌(寄傲軒)과 의두합(倚斗閤)이라는 이름의 소박하고 단촐한 건물입니다. 그러니까 금마문은 효명세자가 수많은 책을 비치하고 독서하던 의두합과 관련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순조의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의 개혁 의지를 이어받아,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약화된 왕권을 세우기 위해 주합루(규장각) 근처에 이 전각을 짓고 독서를 했던 것입니다. 독서와 사색을 위해 궁궐 내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하고 있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의두(倚斗)’'는 '북두성에 기대어 서울의 번화함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기오(寄傲)’는 ‘거침없이 호방한 마음을 기탁한다’는 뜻입니다. '기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남쪽 창에 기대어 호방함을 부려 보니, 좁아터진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
.(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입니다.
《의두합과 불로문, 애련지 일원》
부근에는 창덕궁이 보유한 네 천연기념물 중 하나인 뽕나무(천연기념물 제 471호) 가 있다고 합니다만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농업과 함께 나라의 근본이 되는 일이었고 궁궐에서도 장려되었습니다. 세종 5년 (1423년)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는 "경복궁 안의 뽕나무 3천590주와 창덕궁 안의 뽕나무 1천여 주와 밤섬의 뽕나무 8천280주로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올 정도니까요.
○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불로문 북쪽에 있는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은 숙종 때(1692년)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라고 합니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네모꼴의 연못으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습니다. 연경당 앞을 지나 흘러 내려온 개울물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애련정은 단칸 사모지붕집으로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습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지었으며,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주춧돌이 잠겨 있습니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효명세자가 순조를 위해 지은 사대부가 양식의 전각, 연경당
문간채에 있는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서면 마당 하나를 지나 오른쪽으로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長陽門)과 왼쪽으로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修仁門)이 있습니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장양문은 솟을대문인데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은 낮은 평대문으로 되어 있어 남녀에 따른 양식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연경당은 외부적으로는 담장으로 안채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편에는 서재인 선행재와 농수정이라는 멋진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경당은 사랑채로서 남자의 공간이며 내당은 여자의 공간이 되며 선향재(善香齊)는 서재이며 수학 공간입니다.
연경당(演慶堂)은 1828년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요청하여 진장각(珍藏閣)이 있던 자리에 사대부가의 형태로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순조에게 존호(尊號)와 경례(敬禮)을 올리는 경축 의식을 거행할 곳으로 건축했다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경사(慶事)가 널리 퍼진다'는 뜻의 '연경(演慶)'이란 당호가 정해진 것입니다. 이곳에서 효명세자는 어머니인 순원왕후의 생일 축하 진작(進爵:술잔을 올리는 의식) 행사와 각종 정재(呈才:궁중 행사용 춤과 노래) 공연을 거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안동김씨 세도에 휘둘리던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청을 시키고 이곳 연경당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진장각(珍藏閣)은 창덕궁 영화당(暎花堂) 동북쪽 어수당(魚水堂) 뒤편의 산기슭에 있었는데 열성(列聖)의 어제(御製) 어필(御筆)과 루판(鏤板)을 보관하던 곳이다. 규장각을 완공한 후 서남쪽에 어진과 왕실 물품을 모셔두는 봉모당(奉謨堂)으로 이안(移安)하였다고 한다.
궁궐 안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연경당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집으로 사대부가의 형태를 엄격히 지킨 가옥입니다. 그래서 연경당은 19세기 단촐하고 아담한 사대부가의 아름다움을 원형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대부 집을 모방하였다고 하지만 건물 규모는 99칸을 훨씬 넘어 모두 120여 칸이나 됩니다. 연경당(사랑채) 14칸, 내당(內堂: 안채) 10칸 반, 선향재(善香齋) 14칸, 농수정(濃繡亭) 1칸, 북행각(北行閣) 14칸 반, 서행각(西行閣) 20칸, 남행각(南行閣) 21칸, 외행각(外行閣) 25칸으로 모두 120칸입니다.
일정한 색채나 문양을 더하는 단청은 건물의 권위나 특정한 기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인데, 《세종실록》이나 《경국대전》에는 사가(私家)의 단청을 금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청이 없는 상류층의 주택이나 민가 건물을 백골집(白骨집)이라 부릅니다. 당시의 상류 주택을 모방하여 지은 연경당(演慶堂)도 순수한 백골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일부 대신들이 사가에 단청을 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고 합니다만 지금 전하고 있는 양반가옥들은 모두 백골집입니다.
그런데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연경당과 현재 연경당의 위치와 모습이 아주 다릅니다. 아래의 동궐도를 보면 주합루와 서향당의 북쪽에 멀리 떨어진 현재의 연경당과는 달리, 연경당이 주합루와 서향각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건물 구조가 ㄷ자형으로 되어 있고 안채 사랑채 구분도 없는 등 전각의 구조와 배치도 아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연경당이 실제로는 진장각(珍藏閣)이며, 《동궐도(東闕圖)》를 그린 화원이 새로 지은 연경당을 미처 그리지 못하고 진장각을 그린 데다 '연경당'이라고 써 넣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영우 교수는 《창덕궁과 창경궁》이란 책을 통해 기존 학계와는 다른 주장을 폅니다. 한영우 교수는 《궁궐지(宮闕志)》 등의 기록을 토대로 이것이 진장각이 아니라 헌종 대 이후 새로 지은 연경당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처음 지었던 연경당은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후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조선왕조에서 세자 시절 아깝게 요절한 인물 중에서도 가장 아쉽고 아까운 인물을 꼽자면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앞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과거와 근래에 이르러 그나마 알려진 인물들 이지만, 마지막으로 꼽은 효명세자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에 추존 익종대왕(文祖)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입니다.
순조 9년(180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출생 하였으며, 이때 부모의 나이는 순조 20세와 순원왕후 21세 였습니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첫 아이이자 장자로 태어난 익종은 태어난 순간부터 원자로 명명 되었고, 순조 12년인 1812년 6월 2일 휘(이름)를 대라 정하고 7월 6일 4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 되었습니다.
실로 효명세자의 탄생은 조선의 축복이었습니다. 현종과 명성왕후 슬하에 숙종대왕이 탄생한 이후로 150 년여 만에 왕후의 몸에서 난 적통 왕자였으니 순조의 기쁨은 말로다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왕세자 책봉문에서 표현된 순조의 감격은 여느 군왕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 원자 너의 모습이 준수하고 영명하다"로 시작하는 어버지의 책봉문은 어질고 현명하게 자라 세자이며 아들의 본분을 다 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기대를 한껏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그에 부응하는 성장을 합니다. 여느 역대 세자와 비교해도 빠른 학습능력을 보였고, 용모에 있어서도 조부인 정조대왕을 빼 닮아 갔으니 순조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심경으로 아들의 성장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11세가 된 순조 19년(1819) 3월 20일 관례를 경현당에서 행하였고, 그해 10월 11일 조만영의 딸로 세자빈을 삼아 책빈례를 행하였으니 세자빈 조씨의 나이 세자보다 한 살 많은 12세였습니다.
순조 27년(1827) 2월 순조는 자신의 병을 핑계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순조의 나이 불과 38세의 한창 나이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왕의 격무와 안동김씨 세도의 등쌀에 시달렸던 순조는 무기력증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명군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는 재위 초반에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친정 이후에는 아버지 정조가 자신의 후견인으로 내세워 준 장인인 김조순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정순왕후는 정조대왕의 정치적 적대관계로서 정조대왕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고 순조 재위 초년 천주교 탄압이라는 껍질을 쓴 신유박해를 통해 노론 적대 세력이며 정조대왕 친위세력인 소론과 남인을 대거 숙청 하니, 그 수가 무려 500인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등극 하자마자 그런 피바람을 목격 했으니 순조의 정신적인 충격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순조는 그 말년에 이르기까지 기를 펴지 못하고 정순왕후가 사망한 후에도 김조순이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를 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순조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효명세자 뿐이었습니다. 군주로서의 자질이 남다른 세자에게 일찌감치 정치를 가르쳐 자신의 사후에는 더욱 영향력을 확대하길 바라는 순조의 마음이었습니다.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는 불과 4개월 만에 김조순의 아들인 김유근과 조카 김교근 등을 유배 보내고 사간을 통해 김씨 일족의 비리를 탄핵하는 등 세도세력을 약화 시키는 쾌거를 이룹니다.
세자의 청정을 통해 몰락했던 남인과 소론이 정계로 복귀 시켰고, 그간 세도 세력을 위해 자행 되어 온 과거제의 비리와 부정을 혁파 하고자 관련자에 대한 문책과 벌을 엄히 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대리청정기간 3년 동안 무려 50회의 과거제를 시행 하는 등 인적 쇄신에 힘을 쏟게 됩니다.
특히 민생에 관심이 많던 세자는 자주 미행을 하게 되는데 그 길에 우연히 만난 박규수와의 인연은 군신지간을 넘어 친동기와 같은 우애로 발전하게 됩니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창시자이며 실학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로 초기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효명세자와 박규수는 북학과 실학을 함께 연구하며 개혁의 불씨를 함께 지폈습니다. 효명세자 사후 박규수 역시 은거에 들어가는데 그런 그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무려 50년 후인 고종 연간이었습니다.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는 그 방법으로 기존의 군주들과는 차별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노래와 춤을 통해 왕권 강화를 꽤한 것입니다. 효명세자는 조선의 예악을 정립하는 것이 왕실의 권위와 전통을 내세우는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연회를 11차례나 마련함으로서 연회에 참석한 대소신료들에게 왕실의 건재함과 왕권의 신성함을 내세웠습니다. 1827년 9월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첫 연회를 열었고, 1828년 6월 순원왕후의 40세 축하연을 또한 개최 하였으며,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신경 쓴 1829년의 사순연은 세자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메이드 인 세자의 연회였습니다. 사순연이란, 아버지 순조의 40세 생신과 즉위 30주년을 함께 기념하는 연회로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연회였습니다.
순조 28년 11월 효명이 직접 아버지 순조에게 사순연을 열 것을 주청하였고, 순조의 허락을 받은 세자는 곧바로 진찬소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연회 준비를 시작합니다. 전국에서 당대 최고의 기녀 85명을 선발 하였고, 한 달 동안 10여 차례에 이르는 예행연습에 직첩 참관 하여 진행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때에 궁궐에 천한 기녀들이 돌아다니고 세자가 직접 무대를 참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세도 세력들이 공식적으로 불만을 터뜨립니다. 대사헌 박기수 등이 1829년 1월 10일 이를 비판 하는 주장을 했으나 진노한 세자가 박기수 등을 유배 보내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는 사순연을 통한 세자의 계획이 비단 연회 개최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순연은 1829년 2월에 시작하여 6월에 이르기 까지 총 6회에 걸쳐 진행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순연에 선보일 춤과 노래를 세자가 직접 창작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궁중무용으로 유명한 '춘앵전'(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화문석 위에서 추는 독무)은 바로 효명세자가 창작한 노래와 무용입니다.
곱기도 하구나 달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
비단 옷소매는 춤을 추듯 바람에 가벼이 날리도다 - '춘앵전' 중
이밖에도 '무산향 '(효명세자가 만든 독무로 침상 모양의 대모반이라는 이동 무대 위에서 추는 춤.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의 기쁨을 표현), 가인전목단 (목단 꽃을 꽂은 꽃병을 가운데 두고 그 꽃을 꺾으면 추는 춤) 등을 만들었고, 고구려와 신라의 춤을 복원하는 등 한국사를 통틀어 예악에 있어서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깁니다.
세자는 시를 짓는 재능도 탁월하여 여러 수의 시를 남겼는데 특히 아버지를 향한 효심과 정국에 대한 포부 등을 담은 시가 많습니다.
봄 못이 맑으니 꽃 그림자 곱기도 해라.
온 산천 붉어 비와 이슬을 머금으니
우리 임금 깊은 덕이 창생에 미쳐 이 같이 고르구나. - 효명세자 작 '춘당대' 중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구름을 일으키고 나와 안개를 토 하더라.
이 용이 만물을 키워 내리니능히 사해의 물을 움직일 것이다. - 효명세자 작 '잠룡'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세자는 시를 지어 아버지께 바치고, 존호를 지어 바쳤으며 부모를 위해 11차례나 연회를 베푸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훗날 세자가 돌연 사망하자 이에 세자에게 효명이란 시호가 지어 진 것도 세자의 효심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왕권의 강화와 부모님에 대한 효심의 발로로서 연회를 기획했던 세자는 연회 다음날 익일회작이라 하여 연회를 지휘한 신하들을 불러 개인적인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들 신하의 대부분은 세자 개인의 친위 세력들이었습니다. 이 친위 세력들은 대부분 반 세도세력이었던지라 정치 회동적 성격이 매우 강했습니다.
또한 전 연회의 호위를 금군이 아닌 세자 개인의 친위부대에게 맡김으로서 군사적으로도 자신의 세력이 매우 우월함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할아버지 정조가 화성 연회를 베풀 때 군사적 우월함을 내세웠던 것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자의 도발이 세도세력에게는 큰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1830년 윤 4월 22일 세자가 돌연 각혈 하자 궁궐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그 전까지 세자의 건강은 문제가 없었고 각혈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순조가 약원에 숙직을 명하였고 종묘와 경모궁 등에 기도를 명하였습니다. 내의원의 탕제가 병에 효험이 없자 세자는 자신의 탕제를 직접 처방하였습니다. 정조의 경우 자신의 병이 갑자기 악화되자 스스로 처방하였던 전례가 있었는데 정조와 효명 모두 독살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5월 1일 측근 정약용을 입시케 하여 처방과 탕제를 맡겼으나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세자는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향년 22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은 3년에 불과하였지만, 세자가 내보인 포부와 개혁의 강도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자의 사망 후 순조는 모든 의욕을 상실합니다.
그 해 9월 15일 4세 된 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하였고, 4년 후인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경희궁 회상전에서 향년 45세의 나이로 별다른 업적 없이 승하합니다.
○ 고독한 왕자의 안식처 기오헌과 의두각
효명세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건물이 바로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이다. 창덕궁 후원인 비원에 있는 17개 정자 가운데 기오헌과 의두각은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청해 지은 건물이다. 기오헌과 의두각이란 이름은 효명세자가 정조를 기대고 의지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으로 그의 의중이 보인다.
화려한 궁궐 건축물 중에서 극히 소박해 보이는 이 두 채의 건물 중 왼편이 기오헌이며 오른편이 의두각이다. 기오헌은 온돌방 하나와 작은 대청과 누마루로 구성된 집이며, 의두각은 한 사람 몸을 누일 수도 없는 정면 2간 측면 1간으로 구성된 극히 작은 집으로 단청이 없다.
효명세자가 독서와 사색을 하기 위해 자주 들렀던 이곳은 북향집이며 기오헌과 의두각 뒤에 규장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왕세자답지 않게 지극히 소박한 이런 건물에 와서 독서를 즐긴 효명세자는 기오헌과 의두각에서 정조를 생각하면서 난국을 타개할 정책에 골몰하기도 했으리라.
효명세자는 학문을 좋아하던 왕자답게 12권 6책으로 구성된 경헌집(敬軒集) 6권과 학석집(鶴石集) 등 문집을 남겼다. 효명세자가 죽자 효명세자와 교유하던 서유영과 박규수 등 인재들은 과거를 포기하고 칩거에 들어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세상을 떠났으니 뜻을 펼 수 없다는 낙심과 세상에 나가기 싫은 선비의 곧은 마음이었으리라.
1830년 5월 6일 마지막 희망이었던 조선의 왕자 효명세자가 병으로 죽자 순조는 묘호를 연경(延慶)이라 하고 8월 4일 양주 천장산 의릉(경종) 왼쪽 언덕에 세자를 안장했다. 헌종이 즉위하자 아버지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해 연경묘는 수릉으로 바뀌며 왕릉이 된다.
효명의 아들인 헌종이 등극한 1834년,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숭하였습니다. 고종이 익종의 양자로서 등극한 후에는 수차례에 걸쳐 양아버지인 효명????에게 존호를 올렸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인 광무 3년(1899)에는 문조 익황제로 묘호를 추상하였습니다.
효명세자는 군주 등극하지 못하고 죽어서야 왕이 되지만, 그의 대리청정 3년은 조선왕국을 희망에 부풀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채 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이었으나 그 붉음만큼은 누구라도 돌아보게 할 만큼 찬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연경당은 정치공간이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여 순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가 15세 되는 해에 수렴청정은 거두어졌지만 정순왕후는 이로부터 1년 후에 승하하고 만다. 또 순조가 수렴청정을 벗어나 직접 나랏일을 보는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이때부터 순원왕후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통해 안동김씨 출신의 영의정, 좌의정 및 유력자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측근들로 왕권을 강화하는 권력기반을 갖추는 정치적인 역량을 보였으며 또한 예술적인 면에서도 조선말까지 전해오는 50여 종의 궁중 정재(춤과 노래) 중 30여 종에 가까운 정재를 창작하거나 새롭게 만든 들어내는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는 정조처럼 선왕의 능을 자주 참배하였다. 세자의 능행은 한편으로는 백성이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글로써 올리는 상언이나 꽹과리를 쳐서 호소하는 격쟁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심을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훈련을 통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둠으로써 대리청정은 3년 3개월 만에 끝이 나고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8세에 즉위를 한다. 그런데 헌종 역시 후사가 없어 종실에서 철종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됨에 따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약 60년을 지속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순조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자신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비로 삼는다.
그러나 풍양 조씨 역시 민생 안정에는 관심도 없고 권력을 확대만을 위해 안동 김씨와 싸움만 머리 터지게 벌인다.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싸움박질을 한심해 하던 순조는 대신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만 몰두한다고 한탄한다.
순조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고 세운 또 다른 계획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일이었고 효명세자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다.
안동 김씨를 잘 견제하던 효명세자는 순조 30년 윤사월 22일 객혈을 하며 앓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던 효명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보름도 안 된 5월 6일 타계한다.
효명세자 역시 정조의 죽음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약원에서 계속 달여 올리는 약에 직접 처방을 한 것도 정조와 다를 바가 없다. 발병하기 직전까지 전곡 관리를 철저하게 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정사를 멀쩡하게 돌보던 22살의 젊디젊은 세자가 병석에 누운 지 13일 만에 죽은 것이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다시 안동 김씨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고 순조는 그들의 그늘에서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와 민란으로 대변되는 순조대는 11세 어린 소년이 통곡하면서 왕위에 오른 순조 자신에게나 조선으로서도 혼란과 혼탁으로 얼룩진 시대였다."외척인 풍양 조씨를 배경으로 효명세자가 안동 김씨의 세도를 누르면서 순조를 위해 지은 집이 연경당이다."
사학자 한영우의 이야기이다.
"순조는 연경당에 머물며 효명세자를 후원해 세도정치를 극복하려던 원대한 정치적 포석을 지녔던 것이다."
연경당을 대문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러 바로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흘러듭니다. 작은 연못 아래에는 애련지라는 좀 더 큰 연못이 있습니다. 서북쪽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연경당 앞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애련지로 들면서 명당수의 기능을 합니다.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를 지나면 연경당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 돌다리를 건너기 전,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는 특이한 모양의 괴석 하나가 눈에 띕니다. ]그 받침돌 사면엔 토끼 모양의 짐승이 새겨져 있습니다. 장락문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상징으로 보입니다.
연경당의 정문, 장락문(長樂門)입니다.
‘장락(長樂)’은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 뜻입니다. 받침돌에 토끼를 새긴 괴석이 상징한 것처럼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한비자(韓非子)》에 "존엄한 군주의 지위를 가지고 충신을 제어하면 오랜 즐거움이 생기고 공명을 이루게 된다."라고 한 구절과의 연관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돌아보게 되는 낙선재의 대문 이름도 똑같은 장락문(長樂門)이더군요
정문인 장락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 마당으로 이어지는 장양문(長陽門)이 동쪽으로 보입니다. 연경당의 사랑채 문으로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오르게 지은 솟을대문입니다.
'장양(長陽)'은 '볕이 오래 든다'는 뜻이니, 남성의 공간의 사랑채가 바로 양기(陽氣)가 가득한 공간임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장양문 서쪽, 안채로 이어지는 평대문인 수인문(修仁門)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어진 품성을 닦는 문'이니 여성성을 강조한 것이지요.
장양문을 들어서자 넓은 마당 안쪽에 연경당(演慶堂)이 보입니다. 연경당은 이곳의 건물군 전체의 이름이면서 사랑채의 당호이기도 합니다. 연경당이라는 당호를 달고 있는 사랑채는 주인의 일상거처로 이곳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 문객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 공간입니다.
사랑채 마당 담밑에는 몇몇 괴석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건물이 서재인 선향재(善香齋)입니다.
사랑채인 연경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집입니다. 사랑채 처마 밑으로는 안채로 통하는 널문을 두어 주인이 드나들 수 있게 꾸미고 사랑채의 동쪽 끝으로는 마루를 한층 높여 시원하게 꾸민 누마루를 만들었습니다.
연경당을 동쪽에서 본 모습입니다. 뒤쪽으로 안채와는 담으로 막혀 있는 듯 보이지요.
이 담장을 '내외담(內外墻)'이라고 부르는군요. 사랑채의 마당 서쪽으로 안채와 공간을 나누고 있는데, 이 내외담에는 '통벽문(通壁門)'이라는 일각문을 두어서 필요시에 통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랑채 동쪽으로는 서재인 선향재(善香齋)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향'이란 '좋은 향기'이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책의 향기를 대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재이기도 하지만 문인들을 맞이하기도 하는 곳이었답니다. 14칸짜리 일자형 건물인데, 가운데 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이 건물은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지붕을 내어 달아 놓은 것이 특이합니다. 선향재의 바로 앞에 기둥들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덮어 차양을 만들었는데, 가로로 단 차양문을 도르래를 이용하여 작동하도록 끈을 연결하여 놓았습니다.
몇 년 전 문화재청이 목조건물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더 잘 보존된다고 하여 이곳에서 문화재보호재단으로 하여금 전통차를 파는 행사를 벌이게 허용하기도 한 일이 있었지요.
선향재 뒤 담장 곁, 3단으로 올린 높은 대 위에는 멋진 단칸 정자가 하나 솟아 있습니다. 농수정(濃繡亭)이란 이름의 이 정자는 아름다운 창살이 눈길을 끕니다. 겹처마로 나래를 편 듯한 사모지붕 위에는 큰 절병통을 얹은 모습이 창덕궁의 정자들 중에 가장 당당한 위풍을 자랑한다고 평가됩니다.
농수정 계단 아래 왼쪽(북쪽)에는 높은 문이 서 있네요. 이곳을 나서면 바로 관람지와 그 주변 승재정 등의 정자로 길이 이어집니다.
연경당 뒷마당으로 이동합니다. 연경당 뒷모습과 함께 왼쪽으로 선향재가 보입니다.
위 아래 두 사진은 모두 연경당의 뒷뜰에서 본 모습입니다. 위쪽 사진은 선향재가 있는 동쪽의 바깥채이고 아래쪽 사진은 서쪽 방향의 안채 부분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사랑채의 도리는 둥근 재목을 썼고 안채의 도리는 네모난 재목을 썼다고 합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남자가 거처하는 공간은 하늘(양)을 상징하는 둥근 재목을, 여자가 거처하는 공간은 땅(음)을 상징하는 네모난 재목을 쓴 것이랍니다.
안채는 안주인의 방인 안방과 큰 마루, 며느리 방인 건넌방, 부엌간, 찬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경당 안채에서는 부엌이 따로 없고 반빗간으로 별채에 따로 지었다고 합니다. 부엌간 자리에는 안방에 불을 때는 함실아궁이와 여름을 보내는 누다락을 두었습니다.
서쪽마당에서 본 안채의 모습입니다.
서쪽에서 안채를 들여다보면 작은 방들이 사랑채까지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앞마당과 뒷마당에 담장을 치고 담장 중간에 문을 두어 통로를 두었지만 내부로는 그냥 통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지요.
안채의 앞마당로 들어섭니다. 사랑채나 안채나 모두 정면 대청마루를 넓게 잡고 앞에 좁은 퇴를 둔 형식으로 지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안채 마당에는 앙부일구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마당 가운데에는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른쪽 담장 중간에 사랑채 마당으로 통하는 일각문이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연경당 구경은 모두 끝났습니다. 안채 마당에 있는 평대문, 수인문으로 나옵니다. 연경당 앞으로 나오니 남동쪽에 작은 연못이 나타나고 그 아래로 애련지가 보입니다.
여기서 연경당의 아름다움에 대해 미술사학자인자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이 쓴 《연경당에서》란 글을 참고로 소개합니다. ]
○ 연경당에서-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 ~1984)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분이다.
연경당(演慶堂)에서
아마도 왕자의 금원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니 어디인가 거추장스러운 위엄이나 호사가 물 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궁원다운 요염이 깃들일 성도 싶지만 연경당에는 도무지 그러한 티가 없다. 다만 그다지 넓지도 크지도 않은 조촐한 서재차림의 큰 사랑채 하나가 조용하고 밝은 뜰에 감싸여 이미 태고적부터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놓여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수다스러운 공포도 단청도 그리고 주책없는 니스칠도 일체 속악한 것이 발을 붙일 수는 없는 곳이다.
다만 미끈한 굴도리 팔작 입에 알맞은 방주 간결한 격자 덧문과 용자 미닫이 그리고 순후하게 다듬어진 화강석 댓돌들의 부드러운 감각이 조화되어서 이 건물 전체의 통일된 간결한 아름다움을 가누어 주고 있는 듯싶다.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 반의 큼직한 이 남향 판 대청마루에 앉아서 보면 동에는 석주를 세운 높직한 마루방 서에는 주실인 널찍한 장판방 서재가 있어서 복도를 거치면 안채로 통하게 된다.
지금은 모두 빈 방이 되었지만 보료와 의자 등속 그리고 문갑·연상·사방탁자·책탁자·수로 같은 세련된 문방 가구들이 알맞게 이 장판방에 곁들여졌을 것을 생각하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지금 아마 그만치 반실이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 연경당이 세워진 것은 순조 28년(1826)이다. 이 무렵은 추사 선생이 40대에 갓들어선 창창한 시절이었고 바야흐로 지식인 사회는 주택의 세련과 문방정취에 신경을 쓰던 시대였으니 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이만 저만한 만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으레 지내보면 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5월보다 11월이 더 좋다. 어쩌다가 가을소리 빗소리에 낙엽이 촉촉이 젖는 하오, 인적도 새 소리도 끊긴 비원을 찾으면 빈 숲을 등진 연경당은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 담담하고 외롭다.
알맞게 무겁고 미끄러운 기와지붕의 곡선 사뿐히 고개를 든 두 처마끝이 자연에서 번져와서 자연 속으로 이어진 것 같은 이 연경당의 고요 속엔 아마도 가을의 정기가 주름을 잡는 것일까.
낙엽을 밟고 뜰 앞에 서면 누구의 슬픔인지도 모를 적요가 나를 엄습해 온다. 춘녀사(春女思) 추사비(秋士悲)라 했는데 나의 이 슬픔은 아마도 뜻을 못 이룬 한 범부의 쓸쓸한 눈물일 수만 있을 것인가.
나는 가끔 이 연경당이 내 것이었으면 하는 공상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곧잘 나의 평생 소원은 연경당 같은 집을 짓고 그 속에 담겨 보는 것이라는 농담을 해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 숨김없는 나의 현실적인 소망이면서도 또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허전한 꿈이기도 하다.
세상에 진정 잊을 수 없는 연인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마 세상에는 정말 못 잊을 집도 다시 있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 육간 대청에 스란치마를 끌고 싶었던 심정과 그 밝고 조용한 서재의 창가에서 책장을 부스럭이고 싶은 심정이 이제 모두 다 지나간 꿈이라면 나는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여인과 연경당의 영상을 안고 먼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된다는 말이 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연경당은 충분히 아름답고 또 한국 문화의 결정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과 한국 사람이 낳은 조형문화 중에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온 이 주택문화처럼 실감나게 한국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또 없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예의 하나가 바로 이 연경당인 것이다.
화집은 비싸서 못 사고, 파일과 수첩을 기념품으로 구매했습니다.
우리끼리 자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해설이 필요할 때 설명을 듣고 싶어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역사∙민속전시실에서
다른 조선 시대 생활용구의 문양과 상징에 대해서도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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