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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17
2월26일 [재의 수요일/연중 제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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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원천은 흙이요 먼지, 티끌이며 무(無)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사순시기가 다가오면 저희 모든 살레시오 공동체에서는 간단한 공동체 보속을 정하고, 보속을 통해 모은 금액은 소액이라 할지라도 보다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전통이 있습니다.
올해 저희 공동체 보속은 간단하게 정했습니다.
1. 매일 저녁 국 안 먹기.
2. 가급적 식재료를 새로 구입하지 않고 있는 걸로 해결하기.
건강도 챙기고 절약도 하고 보속도 이행하고,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국가 경제는 물론 국민 경제도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이번 사순절 동안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삶을 지향해보면 좋겠습니다.
평소보다 좀 덜 먹고, 덜 마시고, 덜 사입고, 덜 쓰고, 가급적 새로 구매하지 말고, 냉장·냉동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식재료들을 하나씩 비워가며, 그래서 모은 금액은 주변에 숨어있는 궁핍한 이웃들과 관대하게 나눌수 있는 의미있는 사순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적 보속도 보속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이번 사순 시기에 이행할 작은 실천 사항도 생각해 봤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범국가적 재난 상태입니다.
정부 및 교회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이번 사순시기 첫번째 실천 사항으로 정했습니다. 가급적 외출이나 모임을 지양하고, 이번 기회에 그간 높이 쌓아둔 영성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어볼까 합니다.
때로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 갇힌 느낌도 받습니다. 그 어떤 인간적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때, 결국 최종적으로 믿고 의지할 대상, 바로 우리 주님뿐이십니다. 결국 기도뿐입니다.
특별히 이번 사순절 동안 제가 매일 바치는 모든 기도(미사, 하루 5번의 성무일도, 묵주기도 4번, 성체조배, 삼종기도, 화살기도 등)의 지향을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조속한 종식으로 정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계시는 의료진들과 정부 관계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들에게 영육의 건강을 주시기를, 환자들에게는 빠른 치유의 은총을 주시기를...
오늘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기점으로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재를 얹는 예식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인간의 유한성과 나약함,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동시에 영원하시며 불멸하시는 유일한 대상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께로 돌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안타깝게도 각 교구의 지침에 따라 재의 수요일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시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때가 때인 만큼 지침에 기꺼이 따라야겠습니다. 성이 차지 않으시겠지만 미사 참여하는 마음으로 가톨릭평화방송 미사를 시청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것이 힘든 분들은 재를 머리에 얹는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시면 되겠습니다. 내 원천은 흙이요 먼지, 티끌이며 무(無)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은혜롭게도 먼지요 티끌같은 존재인 나를 주님께서 가엾이 보시어 생명의 숨결을 부어넣어주셨음을 상기해야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지속적인 자비와 은총으로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날, 아쉽고 또 아쉽지만 나는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원천인 무(無)로, 최종적으로 주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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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존감이 있어야 자기 비하를 즐길 수 있다>-
3명의 신자 할머니들이 자식 자랑으로 수다를 떨다가 아들 자랑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할머니는 “우리 아들은 주교라우. 남들은 울 아들더러 ‘오~고귀한 분!’이라고 하지.” 그런데 두 번째 할머니는,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들은 추기경이라오. 남들이 우리 아들 보고 ‘최고로 귀한 분’이라고 그러는구먼.” 이때 마지막 세 번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은 좀 이상하게 생기긴 했는데, 남들이 울 아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러는 기라. ‘OH! MY GOD!’”
위 세 명의 할머니들 중에 자존감이 가장 높은 할머니는 누구일까요? 자기 자녀들을 자랑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첫 두 할머니보다, 자녀를 조금 비하하여서라도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할머니일 것입니다. 이미 자존감이 있다면 조금 자신을 조금 비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자존감’이 강조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와 반대되는 ‘자기 비하’는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위리아드 가이린(Willard Gaylin)이 말하기를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은 진흙덩이를 갖고 노는 아이와 같다. 그것을 오래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 옷과 몸을 버려 놓는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비하는 자존감을 떨어뜨려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인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몽당연필, 모래알,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 등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어떤 성인은 자신을 구더기보다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이분들은 자존감이 낮으셨던 분들일까요? 이분들은 그렇게 자기 비하를 ‘기쁘게’ 할 줄 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실패와 좌절에 못 이겨 자기 비하를 하면 그것은 자존감이 낮은 것이지만 기쁘게 자신을 낮추면 그 사람은 자존감이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쁘게 자기를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에 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시작점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먼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본래 먼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먼지를 인간으로 만들고 또한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성전들은 다 처음엔 먼지였습니다. 내가 성전임을 아니까 먼지였을 때를 기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자신이 먼지였음을 기억하며 자신을 당신 성전으로 삼아주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시작하지 않았고 먼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재를 뿌리며 사제가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래 먼지에 불과했으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먼지로부터 만들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지은 고귀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누가 그렇게 대우해주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그렇게 대해달라고 기도와 선행을 많이 하고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오늘 복음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자신이 먼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이미 많은 은총을 받아 흥분에 넘친 상태로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인정받았음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올 사순은 우리가 먼지였음을 기억하면서 시작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자기 비하를 합시다. 사실은 우리는 먼지보다 못한 수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존감이 있어야 자기비하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을 기쁘게 낮추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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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2월26일 [재의 수요일]
복음: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의 죄, 그 죄에 대한 보속을 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그리고 이 재의 예절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듯한 삶에서 회개와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로 돌아서게 하는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리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그 자체가 나팔이다. 그러기에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즉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안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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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사순 시기는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위하여 해마다 재의 수요일에 전통적인 신앙 실천 행위인 기도, 자선,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며, 자선은 나와 이웃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단식은 나와 나 자신의 관계를 쇄신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이 세 가지를 통하여 나와 하느님, 나와 이웃, 나와 나 자신의 관계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재조정하려면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드러내려고 기도, 자선, 단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이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류시화 시인은 자신의 책 『지구별 여행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한 행위를 한 것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 한 번 말할 때마다 그 공덕이 절반씩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는 공덕이 전부 사라지고 만다. 그 대신 당신이 나쁘게 행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 그것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길이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릇 진정한 군자라면 다른 이에게는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외유내강의 길을 사순 시기 동안 닦읍시다. 다른 이에게 보여 주려고 애쓰는 사순 시기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40일을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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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재의 수요일’에 거행하는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참회’를 상징하는 예식이기도 하고, 사람이란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면 먼지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먼지로 돌아가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뜻으로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는 전혀 다른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1)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자기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길.
2)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인생을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어느 쪽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당연히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자유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자기 마음대로 막 살았으면서도 생을 마친 뒤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때서야 애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후회하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이 될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사는 동안에 자기가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고,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저승에 간 뒤에는 한 방울의 물이라도 달라고 애원합니다.(루카 16,19-24) (늦어도 너무 늦은 애원입니다.) 반대로, 사는 동안에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한 사람의 인생은 결코 허무하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깨닫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아닙니다. 올바른 길을 찾아서 걸어가는 것까지 실행해야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자기 잘못을 뉘우쳤지만, 그것으로 그쳤고, 자살해버렸습니다. 올바른 길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닙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후에 후회와 자책만 하면서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을 향해서 걸어갔습니다.(루카 15,18-20)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을 향해서 걸어간 것’, 그것이 그의 회개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고, 그리고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동생을 비난하기만 합니다.(루카 15,25-30) (회개할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강론을 듣는 것도 싫어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것도 싫어하면서,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을 고백하라는 것인가?”라고 짜증을 냅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큰아들’과 같은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긴 한데,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한눈을 팔다가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련과 고난을 만나면 믿음이 흔들려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더라도, 세속에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의 오염 물질이 몸과 마음과 영혼에 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적은 없는지 늘 살펴보아야 하고, 자기 영혼에 묻은 오염 물질들을 잘 씻어내야 합니다. 그런 노력들도 모두 회개입니다. (명백하게 죄가 있는 사람만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때가 없더라도 정기적으로 자주 목욕을 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회개도 그렇게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면 그 건강을 얻기 위해서, 또 영혼이 건강하다면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 말씀인 요엘 예언서의 말씀은,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라는 말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죄송스러워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회개의 기본정신은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라는 말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라는 말은, 회개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회개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인데, 마음으로부터 회개하면서 고해성사를 보는 ‘진정성’이 중요합니다. 고해성사 예식 순서대로 정확하게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복음 말씀도, 회개는, 또 신앙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겉으로만 회개하는 척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위선자들의 회개는, 또 그들의 신앙생활은, 연기(演技)일 뿐입니다. 회개와 신앙생활을 연기(演技)하는 신앙인은 가짜입니다. 가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요엘 예언서의 말씀에서,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라는 말은, 회개의 목적은 하느님에게 돌아가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벌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또 내가 기쁨을 얻기 위해서 회개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심판, 처벌, 멸망이 무서워서, 죄만 안 지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는 소극적인 회개와 신앙생활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억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것도 역시 가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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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살펴 털어내며 새롭게 부활한 모습을 갖추어 살아가는 참 특별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한 해에 하루를 비워 재의 수요일을 정하고 한 해에 사십일를 비워 사순시기를 가져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는 자신을 살피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삶은 늘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어떤지를 살펴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름다운 자선도 열렬한 기도도 자신을 희생하는 단식마저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면 '쇼’일 뿐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뽐내는 마음이라면 이웃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자선을 베푼다면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는 극기 행위마저도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즐기는 마음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시시한 ‘쇼’를 본 불쾌한 느낌만 드릴 뿐이라는 일깨움이라 싶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 된 삶이라면 이미 하느님을 잊어버린 까닭이 아닐까 짚어봅니다. 그 모습들이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로 옳고 매우 선하고 대단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계기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일 때에는 결코 하느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받겠습니다.
그런데요. 주님께서는 앞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6)고 이르셨다는 게 좀 찜찜합니다.
보여주라 하신 말을 싹 바꾸시다니 싶으니까요.
주님이야말로 ‘쇼’를 하시는가 싶네요. 때문에 다시 주님의 의중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분명한 주님의 뜻을 새깁니다.
왜 사람에게 보이느냐 어떻게 그들 눈에 비치느냐가 문제라는 지적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무엇이나 유효하지만 내 영광을 위해서라면 홀로 즐기는 ‘쇼’일 뿐이라는 뜻이지요.
언제나 무슨 일에든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을 기억하며 행하라는 당부라 새깁니다.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덧없음을 되새기는 오늘 부디 ‘쇼’를 연출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것을 잊고 눈에 보이고 기분이 좋은 느낌이 좋아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마음을 쏟지 않기 바랍니다.
헌금도 봉사도 기도마저도 사람들이 보고 알아주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라면 사람들 눈을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도라면 ‘쇼’일 뿐입니다.
속지 않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쇼’를 한들 헛되기에 홀로 스스로 속을 뿐입니다. 이 헛된 것에서 벗어나도록 날을 콕 짚어 주시며 우리가 그분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시는 주님께 찬미 올립니다. 그 복된 시기가 오늘, 시작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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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마태오6,17)
사순절이 되면 우리는 보통 고통과 죄라는 어두운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래서인지 열심한 이들은 침울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사순절의 참된 의미는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라는 엄청난 아픔을 선택하셔야만 했는가를 묵상하는 시간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알게 되는 그분의 진정한 사랑에 진한 감동과 감사를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중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때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르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전체적인 의미를 헤아립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셨고 사셨고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악과 타협하며 죄 속에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오늘, 가능하면 차분하게 자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에 대해 묵상해 보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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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최인비 유스티노 신부님]
불교에 보면 하안거와 동안거라는 것이 있습니다. 안거(安居)라는 것은 들어앉아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안거는 음력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이고, 동안거는 음력 시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입니다.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대림시기와 사순시기가 찾아옵니다. 마치 절기를 나누듯이 종교에 있어 어떤 시기라는 것이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계절을 지내듯이 사순을 보내곤 합니다. 마치도 계절을 맞이할 때 부산을 떨고는 그 계절이 다가오면 그 안에서 흘러가듯이 사순에도 그렇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사순절도 계절처럼 때가 되었으니 찾아온 것이고 또 시간이 지나면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님들이 하는 동안거와 하안거가 용맹 정진하는 시기이듯이 우리도 이 시기를 다르게 보내야 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동안거와 하안거가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련이나 신앙이나 모두 마음만으로 하는 것이 아닌 내 몸을 통해 내 마음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즉 실천이고 변화입니다.
동안거와 하안거는 직접 수련이라는 목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구체적이지 않을 수 있기에 힘이 든 것이고 변화하지 않고도 성당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만족시키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1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의 마음을 찢어라!” 또 “신랑은 신방에서 나오고 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여라.”
신방에 들어간 신혼부부조차도 나와서 함께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있어도 지금보다 중요한 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나왔고,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싸웠습니까? 왜 우리에게 화해하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할까요? 우리는 사순절에 주님의 수난을 기념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이 2000년 전에 일어난 과거에 지나지 않다면 우리가 여기 앉아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과거로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은 몸을 던져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나를 사랑할 줄 알았지 주님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은 목마르고 배고프고 추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네 관심이 필요하단다. 네 대답이 필요하단다. 네 희생이 필요하단다. 나를 위해…, 이렇게 보잘것없이 약한 모습으로 네게 도움을 청하는 나를 위해 무언가 해 주지 않겠니?
교회를 통해, 기도를 통해, 사제를 통해,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왼편에 세워진 사람들처럼 대답할 지 모릅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언제 그러셨습니까? 언제 제게 도움을 청하셨고, 언제 목마르고 배고프셨고, 언제 헐벗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박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분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분은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그 아픈 사랑을 느끼고 우리의 마음을 아파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을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를 뜻하고 겸손을 뜻합니다. 더불어 죽어서 재로 돌아갈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기에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신자 여러분, 주님의 사랑 안에 함께 하는 신자 여러분! 마음을 여십시오. 주님께서 당신께 모으시는 소리에 귀를 여십시오.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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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환승을 위해서 애틀란타 공항에 잠시 머물 때였습니다. 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카드를 주었더니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내가 술 마시면 안 될 나이로 보이나!’ 신분증을 보여주고, 맥주를 마셨습니다. 직원의 착각이 잠시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팁도 조금 더 주었습니다. 착각은 좋은 점도 있습니다. 묵주 주머니를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른 주머니에 잘 있는 걸 알았을 때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새벽 미사에 늦을 줄 알고 부랴부랴 제의실로 갔는데 너무 일찍 나온 걸 알았을 때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격을 잘못 보고 돈을 더 냈는데 직원이 원래의 가격으로 계산하고 돈을 되돌려 줄 때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기분 좋은 착각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요?
수녀님과 대화하면서 ‘오해’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알았습니다. 원주민 어르신이 땔감이 없다고 하셔서 한 트럭 신청하라고 했습니다. 한 트럭이면 한 달은 땔감으로 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뒤로 한 트럭을 더 신청하라고 했습니다. 기분 좋게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아침인데 어르신께서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두 트럭 땔감을 신청했다는 문자였습니다. 수녀님은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두 트럭이나 보냈는데 다시 두 트럭을 신청했다니 화가 나셨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선한 모습이 위선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문자를 보낼 줄 몰랐고, 손자가 고맙다고 보낸 문자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고 합니다. 오해가 풀리니 수녀님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오해는 우리의 선한 눈을 멀게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신앙인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사순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의미를 알면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을 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전례는 사순시기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의 재계를 충실히 지키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성자의 파스카 축제를 잘 준비하게 하소서. 사순 시기에 정성껏 재계를 지켜 죄를 용서받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시는 성자의 모습을 닮게 하소서.” 사순시기는 성자의 파스카 축제를 잘 준비하는 겁니다. 사순시기는 죄를 용서받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시는 성자의 모습을 닮는 겁니다. 오늘 전례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을 준비하는 때라고 합니다.
파스카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차원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세상의 것을 쫓아 다녔다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둘째는 ‘행동’입니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삶을 사는 겁니다. 자캐오의 삶을 사는 겁니다.
셋째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성령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회개하고,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며,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면 그날이 바로 구원의 때입니다. 그날이 바로 은혜로운 때입니다. 장미꽃을 담은 바구니에는 장미의 향이 나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기도, 자선, 단식이 늘 함께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기도, 자선, 단식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셨습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당신이 만드신 것을 하나도 미워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죄를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니, 주님, 당신은 저희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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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재의 수요일에 바치는 기도>
마태오 6,1-6.16-18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재의 수요일에 바치는 기도>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에서 온 사람으로서
흙으로 돌아갈 것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께서 보내신 사람으로서
당신께 돌아갈 날을
겸손하게 품게 하소서.
불현 듯 다가올 죽음을 향해
나날이 한걸음 내딛는 산 사람으로서
깨끗하게 마지막 날을 맞을 수 있게 하소서.
하늘에서 땅으로 보내진 사람으로서
땅에서 하늘로 올라야할 사람으로서
땅에 발 딛고 하늘을 향하게 하소서.
사람을 믿으시기에
사람에게 바라시기에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또 하나의 작은 당신 삼아
당신의 선한 일을 이루도록
이 땅에 당신의 자리 맡겨주신
당신을 믿고
당신께 바라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침묵하시듯 말씀하시는
당신께 귀 기울이고
가리시듯 드러내시는
당신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아닌 듯 모든 것이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게 하소서.
귀를 닫은 듯 듣고 계시는
당신께 말씀드리고
눈을 감은 듯 보고 계시는
당신께 보여드리며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모든 것이 되게 하신
당신께 나를 그대로 드러내게 하소서.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당신을 닮아 존엄하게 지으신
비천하지만 존귀한 나를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품은 사람으로서
당신을 닮아 더욱 거룩하게
당신을 닮아 더욱 정의롭게
당신을 닮아 더욱 착하게
당신을 닮아 더욱 온유하게
당신을 닮아 더욱 깨끗하게
사순 하루하루를 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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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년 재의 수요일에>
재의 축복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이 없는
재의 수요일
얼마나 많은 교우 분들이
마음 아파하실까요
교우 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없는 사제들은
또 얼마나 공허함을 느낄까요
허나 어쩌면
홀로 머무는 곳 어딘가에서
우리는
마음으로나마
스스로에게 재를 뿌리며
어느 해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재의 수요일을
보낼 수 있으리라 믿어요
온갖 욕설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떠나시는
우리의 벗이신 예수님을 따라
사순시기의 여정을 시작하는
첫날 재의 수요일
어쩌면
함께 모여 미사를 드릴 수 없고
재의 예식도 할 수 없기에
2020년 2월 26일
오늘 재의 수요일은
여느 해보다 더
재의 수요일다울 수 있지 않을까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올해 사순시기를
우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타깝고
슬프고
힘들고
절망하고
혐오하고
다투고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하고
위로하고
보듬고
돌보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닮은
우리의 십자가 길을 시작합니다
두려움 없이 한 걸음
주저함 없이 한 걸음
기꺼이 기꺼이 한 걸음
부활을 노래하기에는
너무 이른 사순 첫날
우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마음에 담고
작지만 커다란 한 걸음 내딛어요
우리의 한 걸음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누군가에게 격려가 되고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마침내
모두가 빛날 그날을 향해
지금 어둠을 가르는 한 걸음 내딛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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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무밭을 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목이 말라 안 되겠다. 무 한 개 뽑아 먹어야겠다. 너 여기서 누가 오는지 잘 보고 있거라.”
그리고 아버지는 무밭으로 들어가 커다란 무를 막 뽑으려고 하는데 아들이 소리칩니다.
“아버지, 누가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코, 큰일 났구나!” 하고 얼른 무밭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도 없잖아! 남자가 간이 커야지. 똑똑히 보고 있어라!” 하고, 무밭에 다시 들어가 무를 뽑으려고 하는데, 아들이 또 소리칩니다. “아버지 누가 봅니다.”
아버지는 무밭에서 급히 뛰쳐나왔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3번째로 무밭에도 들어가자, 아들이 또 다시 소리칩니다. “아버지, 정말입니다. 누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번에도 헐레벌떡 나와서 “아들아! 자꾸 누가 본다고 그러냐?”라고 말하자, 아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대답합니다.
“하느님이 다 내려다보고 계세요.”
아버지는 더는 무를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구나!”
“성령 충만”하면 이렇게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올해 사순시기를 맞이하는 재의 수요일은 코로나 19로 인해 여러 교구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뿐만 아니라 재의 축복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식년을 보내면서 “보라, 십자가의 이 사람을.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회개(회심)의 시기이자 성령 충만의 시간입니다. 즉, 회개(회심)와 성령 충만은 모든 일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또한, 사제는 사람의 머리 위에 재를 얹으면서 기도합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나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본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에 참례하여 재의 축복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고운님들 자신이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큰소리로 외쳐봅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사순시기는 성령 충만한 회심의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평생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살았던 한 남자가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가장 비싸고 화려한 수의를 입혀달라고요.”
마침내 그 남자가 죽자 생전에 고인을 잘 알고 지내던 친구가 고인을 보며 그랬답니다.
“친구야! 이토록 잘 차려입고도 갈 곳이 없구나!”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결국 가야 할 천상 본향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가야 함을 알려 줍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아멘.
이제 회심과 성령 충만의 시작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참,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오늘 집 밖으로 나가기가 두렵고 무섭지요.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것은 고운님들이 침묵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겠습니다. 집에 걸려있는 십자가 예수님 앞에 머물러 인사 좀 하시지요. “예수님, 오랜만입니다. 저희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지금 상황을 다 아시지요. 미리 감사합니다. 얼른 이 곤경을 끝내주십시오.”
아멘.
저는 침묵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도하고 미사 하면서, 코로나 19로 힘들게 일하는 의료진들과 봉사하시는 님들과 고생하시는 대통령님을 비롯한 공무원님들,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시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고 십자가 예수님 앞에서 회심하고 성령 충만한 시간으로 코로나 19로 곤경에 빠진 우리나라와 많은 나라, 그리고 몸과 마음이 아픈 많은 분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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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19)
♧♧ 시편 75편 2절…
"저희가 당신을 찬송합니다. 하느님 찬송합니다. 당신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당신의 기적들을 이야기합니다."
* 당신 이름을 부르는 이...
‘당신(주님) 이름...’은 본래 하느님의 본성이나 그분의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시편 52편 11절.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 또는 당신 백성에 대한 보호, 악인에 대한 심판 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이 시편 75편을 히즈키야 통치 당시 남 유다에 대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위협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열왕기 하권 18장 13-37절. 참조) 그래서 이 구절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아시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유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하심이 가까워졌음을 선포한 것으로 이해되어 집니다.
* 이들이 당신의 기적들을 이야기합니다.
‘기적’은 ‘놀라운 일’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말합니다. 시편 75편의 저자와 그 저작 연대를 히즈키야 시대의 아삽 후손의 레위인으로 본다면, 이는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군대를 물러나게 하신 초자연적인 기적(표징)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열왕기 하권 19장 1-37절. 참조) 그러나 이는 보다 포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하느님의 모든 놀라운 구원 역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시편 9편 2절. 참조) 아삽은 이 모든 놀라운 기적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마침내 온 민족들이 야훼 하느님의 크신 능력을 알게 되었노라고 하느님께 찬송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75편 3절…
"내가 정한 때가 오면 나는 올바르게 심판하리라."
* 정한 때...
이는 하느님께서 영원 전부터 작정해 두신 ‘최후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데, 구약 성경에는 ‘주님의 날’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요엘서 1장 15절. 오바디야서 15절. 참조) 이것은 그 때 곧 심판의 때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있으며, 인간은 이날을 맞을 준비를 하는 가운데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게 해줍니다.(시편 102편 14절. 다니엘서 8장 19절. 하바쿡서 2장 3절. 사도행전 1장 7절. 참조)
* 올바르게 심판하리라.
이 구절은... 하느님은 악을 그냥 넘기지 않는 정의로운 분이시므로 때가 되면, 만민을 심판하시어 정장한 보응을 하실 것임을 말하는 말씀입니다.(창세기 18장 25절. 베드로 1서 2장 23절. 참조) 이는 비록 악인 이 땅에서 일시적으로 평안하고, 의인이 저들로 인해 고난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같은 현상이 영구히 지속되지 아니하고, 정해 놓으신 하느님의 때가 오면 각자의 행위대로 올바른 심판으로 정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임을 나타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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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누군가 제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잠깐 생각한 뒤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무엇을 후회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후회할 일을 아예 생각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물론 반성하는 일은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때 집중해서 공부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더 옳게 살지 못했던 것을 반성합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를 통해 얻게 된 것도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m후회한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바뀔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 후회가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해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후회는 내게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회보다는 반성의 차원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즉,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보면서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사실 과거 죄에 대한 후회 때문에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후회는 먼 훗날 하느님 앞에서 더 큰 후회를 하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의 ‘재의 수요일’로 사순 시기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선택하셨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 시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해서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합니다.
이 사순 시기를 더욱더 거룩하게 보내도록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자선을 베풀 때도 칭찬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기도나 단식 역시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보이기 위한 것은 진정성이 없는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위선의 삶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서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진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후회를 남기는 삶이 아닌 진정으로 반성하는 삶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겸손한 모습으로 바꿔서 주님의 길을 힘차게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향한 금년 사순 시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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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아이를 보면 웃는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이 강론이 그렇게 어렵지가 않습니다. 약간의 웃음 코드만 맞추면 아이들은 쉽게 강론에 몰입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잘 웃을까요? 도대체 얼마나 웃을까가 궁금했는데, 어느 책에서 하루에 아이는 2~300번 웃는다는 연구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하루에 웃는 모습을 2~300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통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웃음을 통해 삶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떠올리며, 아이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서도 웃음을 통해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웃음을 잃는 우리라고 합니다. 웃음은 웃음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점을 떠올리며,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요즘 웃을 일이 없다고 하지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나라 전체가 난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기에 더욱더 어두운 분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을 위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웃음이라는 희망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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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수행자修行者의 삶>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
결코 우울함이나 심각함은 참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면담성사후 보속의 말씀 처방전에 가장 많이 찍어 드리는 스탬프의 글자는 ‘웃어요’입니다. 온갖 고통과 시련 중에도 ‘기쁨의 사도’ 바오로는 항상 기뻐하라 우리를 격려합니다. 유쾌한 덕담의 유머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는 예수성심자매회 모임날이었지만 사정상 취소되고 회장 자매님이 잠시 방문하여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 갔습니다. 감동스러운 것은 책임감이요, 얼마전 방문했던 화가 신부님 역시 책임감을 강조했습니다. 사람됨의 기본인 책임감이 인간 품위의 바탕임을 깨닫습니다. 비록 모임은 취소되었지만 자매님은 이런저런 책임과 더불어 집무실의 청소도 말끔히 마친후 떠났고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자매님, 집무실 청소-정리 너무 잘 해주셔서 ‘예수님-프란치스코 교황님-카랑코에 꽃님’이 웃으십니다.”
마침 집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활짝 웃는 얼굴의 ‘예수님, 프란치스코 교황님, 꽃님’을 담은 사진과 함께 보내니 마음도 환히 밝아지는 듯 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결코 잃지 말아야 할 미소요 웃음입니다. 아주 그 옛날 베네딕도 성인의 저술인 베네딕도 규칙서중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항목에서도 중용의 덕이 빛납니다. 특히 기쁨이란 말마디도 여기 제49장에만 단 2회 나옵니다.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지내는 사순시기이기에 결코 무겁고 어둡고 심각하게 지내선 안 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닌 하느님 중심의 자발적 기쁨의 사랑의 수행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수행의 중심에 분별의 잣대로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부터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우리 삶중에 평소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여 새롭게 정비하는, 또 절제節制, 자제自制, 극기克己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영적 훈련기간입니다. 참된 수행은 모두가 회개의 열매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는 수행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도 회개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 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 후회하는 이다.”
이런 회개에 응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는 사랑의 회개요, 이어지는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수행입니다. 모든 수행의 동기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사순시기 날마다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시기 매일의 지금이 바로 회개를 통해 선물처럼 주어지는 구원의 날이요 은혜로운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수행은 자발적 감사와 사랑의 수행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의 수행입니다. 바로 그 모범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수행인 자선, 기도, 단식을 통해 참된 수행의 영성을 보여 주십니다. 허영이나 위선, 교만이 전혀 없는 하느님 중심의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수행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참 아름다운 수행자의 모습이자 참된 영성의 표지입니다. 결코 자기 중심의 닫힌 수행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활짝 열린 수행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자발적 사랑의 수행이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참으로 자유롭게 하며 믿음을 두터이 합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참된 수행은 참된 회개의 열매로 저절로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참된 수행의 삶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수행자의 모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 아름다운 수행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분별의 사랑과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 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51,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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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을 준비하라>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기간을 정하여 기도와 희생으로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코로나바이러스 91 때문에 미사는 물론 재의 예식을 거행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조속히 함께 미사를 거행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 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단식을 통해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대주교)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을 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선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 해 집니다.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합동 판공성사에 다니다 보면 알게 모르게 살이 올라요. 가는 곳마다 오랜만에 오신 신부님 대접한다고 고기에, 회에 넘치도록 챙겨주시거든요. 마음을 먹고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유혹의 빌미는 항상 생기게 마련입니다. 핑계거리는 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세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외적인 기도와 단식, 자선에 앞서 마음의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속히 코로나91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 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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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이제 참회와 회개로 주님께 나아가는 사순 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를 정화의 시간으로 초대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우리가 이웃, 하느님, 자신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하는 방식들입니다. 이 실천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인간다움을 회복할 뿐 아니라, 타인의 눈에도 영예롭게 보여지지요. 좋은 행위는 널리 알려져야 귀감이 되고 동참하는 이들도 늘어날텐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두를 감추어 두라고 이르십니다.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4)
자선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 대한 계산 없는 사랑입니다. 그 이웃 안에 숨어 계신 주님을 존중하는 행위기도 하지요.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기도는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안에 숨어 계신 주님과 만나 서로에게 머무르고 일치하는 행위입니다.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8)
단식은 자신 안에 쌓인 것들을 덜어내어, 비워진 육신 안에 숨어 계신 주님이 숨 쉬시게 해드리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지향과 행위가 아버지와 우리 각자의 오롯하고 은밀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타인의 찬사와 우러름은 흥을 돋우다 스러지는 추임새 정도나 될까 결코 본질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5.16)
떠벌린 자선, 기도, 단식은 한시적이고 인간적인 영광이 될 수는 있으나 결국 더 큰 상급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버지께서 준비하셨던 상이란 사람이 주는 영광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마태 6,1) 하라고 권고합니다. 사람의 눈과 평판을 의식하는 행위는 제아무리 그럴듯한 결과를 가져와도 본인 자신을 더 빈한하게 만들 뿐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2)
하느님께서 이 은총의 시기에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하나, 우리의 마음입니다. 세상의 눈과 입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고, 오로지 숨어 계신 당신 눈에 들고자 하는 충실한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전례주년 안에서 죄인인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한없이 너른 당신 품으로 뛰어들어오라고 두 팔을 활짝 펼치고 기다리시니, 숨은 희생과 눈물과 보속으로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요엘 2,17) 주님의 백성과 세상을 위해 더 열렬히 기도하며 이 시기를 걸어나갑시다.
특별히 올해 사순절은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해 고통과 혼란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분간 미사를 중지할 수밖에 없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여러분이 느낄 상실감과 슬픔은 그동안 봉헌해온 어떠한 보속보다 더 무겁고 위중하리라 여겨집니다. 이 어려움이 하루빨리 해결되고, 다함께 기쁨에 넘쳐 미사를 봉헌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 힘차게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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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마태 6,2)
<자신의 선행을 떠들어 대다>
선행을 자랑하는 말이나 행동은 모두 나팔 소리와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복음의 기쁨, 교황 프란치스코
주님의 날을 고대하던 즈카르야는 백성에게,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고” 오시는 임금님을 환호하며 맞으라고 초대합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즈카 9,9). 그런데 가장 강렬한 초대는 스바니야 예언자의 초대일 것 같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잔치 한가운데에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으니 제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 3,17)(13) 하고 아무도 없을 때는 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나팔과 같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자기 자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청할 때는 선행을 하고 아무도 청하지 않을 때는 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나쁜 습관은 나팔입니다.
또 자신의 호의에 보답을 할 수 있는 상류층 사람에게 귀한 것을 주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고통에 묶여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남이 안 보는 데서 선행을 했더리도 칭찬받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려고(첫째는, 그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둘째는 몰래 그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다면, 그것도 나팔입니다. 이런 경우는 몰래 그 일을한 것 자체가 자신의 자선 행위를 나팔 부는 행동입니다. 자신을 눈에 띄게 하거나 눈에 띄려는 마음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나팔입니다. 실제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친절한 행동은 그 자체가 나팔을 붑니다. 그러므로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는 배플려는 뜻입니다 .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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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나는 초라한 삶을 살도록 스스로 방치하고 말았구나…!
서리 발렌타인이 자기가 제작한 영화에서 읊조리는 대사에서, 우리는 동일한 주제가 애절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그리스 해안가에 앉아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그것이 많은 면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헛되이 지나간’ 인생이었던가를 한탄한다.
♣나의 내면에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었는데, 나는 초라한 삶을 살도록 스스로 방치하고 말았구나…. 내 인생은 헛되이 지나가 버렸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우리가 결코 활용하지도 못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삶이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일까? 우리가 한 번도 활용하지 못할 것이라며 이 모든 감정과 꿈과 희망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꿈! 그것은 있으리라 기대하는 자리에 절대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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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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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히브리어(shub)는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저 한 번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는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듭 되돌아가는’ 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입니다.
수도승들은 이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생활방식으로 채택하고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요청되고, “용기를 요구”(14항)합니다.
결국, 회개란 다시 그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올바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혹 수도자라는 신분이나 수도복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수도복이 우리의 신원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반면 수도복으로 가려져 있는 우리의 속내는 또 얼마나 될까요?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수도자인 것이 아니라, 뼈속에서부터 수도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홍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그러니,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도 저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깨우쳐주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도 제가 당신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게 하소서!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않게 하소서!
오히려 자선은 숨기고 죄는 드러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기도할 때 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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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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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덮는 사랑>
"숨은 일도 보시는 분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사람아 ~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해야할 몫을 해라, 때가 반드시 온다.
늦기전에 지금 준비하라.
나팔을 불지 마라! 마가 끼일 수 있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매일 마음을 닦아라.
진실을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할 때
주님께서 그 마음 알아주신다.
"들추면 다치기에 덮는 사랑을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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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8)
놀랍고
혼돈스러운
시간 속에서
재의 수요일을
맞이합니다.
이 사순시기가
우리시대를
정화하는 회개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는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흙도 십자가도
사람도 사랑도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할 때
다시 찾게되는
생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생명의 의미는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 사순시기는
무엇보다도
우리 내면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내면도
길이 필요합니다.
그 길을 일깨워주는
예수님의 수난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이 시간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애타게 향하는
우리 시대의 아픈
재의 수요일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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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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