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미지의 걸작』
사라오름
어느 해 10월 중순 한라산 성판악 등산로에 있는 사라오름을 올랐다. 청명한 하늘에 차갑지만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호수로 잔물결이 쓸려왔다. 쏴~와~하는 저 소리, 믈결로만 아는 저 바람을 화가는 화폭에 담을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한라산 능선에 머무는 저 막연하게 깊고 넓은 창공은 담을 수 있어도. 바람과 소리는 화폭에 담겨진 순간 그 아무리 아름다운 기교 넘친 그림이라도 정지되고 말 테니.
미지의 걸작
1612년 겨울 파리의 어느 한 아틀리에. 당대 최고의 화가 포르뷔스가 그린 ‘이집트 여인 마리아’을 광기 어린 시선으로 노년의 화가가 바라보고 있다. 그는 실물을 잘 재현해낸 그림이지만 ‘이 아름다운 육체가 따뜻한 생명의 숨결을 받아 생기를 띠고 있지’않다고 말한다. 그는 ‘데생과 색채 사이에서, 엄밀한 냉정함과 눈부신 격정’을 그림에 녹아낼 자신이 없으면 하나라도 집중해서 완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며, 사물과 존재들의 정신과 영혼, 인상을 포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필생의 역작으로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포르뷔스와 그 자리에 우연히 같이 한 무명의 젊은 화가는 그의 그림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노인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노년의 화가는 지상 최고의 역작으로 아름다운 여인인 ‘카트린 레스코’를 그리지만 매번 그렇게 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자책한다. 자신이 그리려 하는 여인보다 더 아름다운 모델이 없으니 참고해서 그릴 수도 없다고 한탄한다. 이를 안 포르뷔스는 젊은 화가의 애인을 소개한다. 이 여인을 본 노년의 화가는 뭔가의 영감을 얻고 생기를 갖는다. 이 여인을 모델로 열렬하게 그림 작업을 하고 드디어 필생의 역작을 완성하는데.
노년의 화가는 두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준다. 자신이 화폭에 담은 여인은 그 누구와도 비교해도 아름답다고 말하며. 노인은 그 여인은 생기를 얻고 살아 움직일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그림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발의 끝부분이 한 구석에 그려져 있고, 나머지는 ‘그저 수 많은 이상한 선들에 짓눌리고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로 칠해져 있었다. 포르뷔스는 “지상에서의 우리 예술이 끝나는군”이라 하고, 젊은 화가는 “그는 화가라기보다는 시인이네요”라고 감상평을 내 놓는다. 두 화가가 이 그림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노인 화가는 ‘난 그녀를 보고 있어! 그 녀는 완벽하게 아름다워’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난 결국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라고 좌절한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모든 그림을 불태우고 죽는다.
절대회화
이 소설을 번역한 김호영은 해설에서 발자크가 당시 회화계의 논쟁의 주제였던 ‘재현과 표현’의 문제를 다뤘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인상주의와 비구상과 추상으로 나아가는 회화의 미래를 예측했다고도 한다. 또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가라면 인생 최대의 걸작을 남기려는 욕망으로 광기에 휩싸일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해석도 단다.
노년의 화가는 화폭에 담겨있는 여인이 살아나 자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상상을 한다. 이는 황당한 망상이라기 보다는 당시 유행한 물활론(모든 물질이 그 자체로 생명이나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적 사유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죽음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좌절해서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으나, 실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자신이 그린 그림의 여인보다 낫다는 좌절감에 죽음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
살아있는 그림
그렇다면 절대회화는 불가능한 것인가? 1991년 자크 리베트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한 <누드모델>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롱테이크로 표현했고, 모델이 자신이 직접 포즈를 취하겠다고 화가에게 반기를 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과정과 스토리가 합쳐 탄생된 그림이라면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라오름의 그 풍경을 캔버스에 담는 화가가 있고, 그 풍경을 가슴에 담고픈 사람이 그 그림을 접하게 된다면 그 그림은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나름의 상상력과 인생 경험이 녹아드는 스토리가 있으면 더욱 더 그럴 것이고. 각 자 미지의 걸작 하나 건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책 익는 마을 원 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