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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128卷-列傳41-叛逆2-李義旼-000
이의민(李義旼)
#高麗史128卷-列傳41-叛逆2-李義旼-001
○李義旼慶州人父善以販塩鬻篩爲業母延日縣玉靈寺婢也.
이의민은 경주 사람인바 그의 부친 이선(善)은 소금과 채를 파는 것이 직업이었고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다.
義旼少時善夢見義旼衣靑衣登黃龍寺九層塔以爲此兒必大貴.
이의민이 어렸을 때 이선의 꿈에 이의민이 청의(靑衣)를 입고 황룡사(黃龍寺) 9층 탑(塔)에 올라갔으므로 그는 이 아이가 반드시 큰 귀인(貴人)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及壯身長八尺膂力絶人與兄二人橫於鄕曲爲人患按廉使金子陽收掠栲問二兄瘦死獄中獨義旼不死.
성인(成人)이 되어서는 신장이 8척이요, 힘이 절등하였으며 형 2명과 함께 그 시골 구석을 횡행하여 고을 사람들의 우환거리가 되었으므로 안찰사 김자양(金子陽)이 잡아다가 심한 고문을 해서 두 형은 옥중에서 죽었으나 이의민은 죽지 않았다.
子陽壯其爲人選補京軍乃携妻負戴至京會日暮城門已閉投宿城南延壽寺
김자양이 그의 위인을 장하게 여겨 경군(京軍)으로 뽑아 넣었다. 이의민이 처와 함께 짐을 지고 이고 서울에 당도하니 마침 해가 저물어서 성문이 벌써 닫혀 있었으므로 성 남녘에 있는 연수사(延壽寺)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夢有長梯自城門至闕歷梯而登覺而異之.
그날 밤 꿈에 긴 사닥다리가 성문으로부터 대궐까지 뻗쳐 있고 그는 그것을 타고 올라가다가 꿈을 깨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義旼善手搏毅宗愛之以隊正遷別將
이의민은 수박(手搏)을 잘 쳤으므로 의종이 그를 사랑했으며 대정(隊正)으로부터 별장(別將)으로 승진했다.
鄭仲夫之亂義旼所殺居多
정중부의 난 때는 이의민이 살해한 사람의 수가 제일 많았다.
拜中郞將俄遷將軍.
그리하여 이의민은 중랑장(中郞將)으로 되었다가 즉시 장군으로 승진되었다.
明宗三年金甫當起兵以張純錫柳寅俊爲南路兵馬使純錫寅俊等至巨濟奉毅宗出居雞林
명종 3년에 김보당이 기병(起兵)하면서 장순석(張純錫), 유인준(柳寅俊) 등을 남로 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았던바 장순석, 유인준 등이 거제에 이르러 의종을 데리고 나와서 계림에 있었다.
仲夫李義方聞之使義旼及散員朴存威領兵趣南路
정중부와 이의방이 이것을 듣고 이의민과 박존위(朴存威)를 시켜서 군사를 영솔하고 남녘으로 긴급 출동케 하였다.
義旼等至雞林有人遮說曰:
이의민 등이 계림에 당도하니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前王來此非州人意乃由純錫寅俊等
“전왕(前王)이 이곳으로 온 것은 고을사람들의 의사가 아니라 장순석, 유인준 등이 꾸민 일이다.
爾其徒不過數百皆烏合之衆去其魁則餘悉潰走請少留吾歸圖之第願勿*(??){加}罪州人." 義旼曰:
그 무리는 불과 수백 명이며 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괴수만 제거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다 흩어져 달아 날 것이니 잠깐만 기다려 주면 내가 돌아가서 처치하겠으니 본토 사람들에게는 죄를 가하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의민은 말하기를
"我在勿憂!" 其人遂入州謀諸衆曰:
“내가 있으니 염려 말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이 고을로 들어가서 여러 사람들과 모의하기를
"純錫輩非今王所遣殺之何害!"
“장순석의 무리는 지금의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 아니니 죽인들 어떠하랴!”라고 말하고
夜以兵圍而攻之斬數百人列其首於路之左右以待義旼幽毅宗于客舍使人守之
그 밤으로 병정을 모아서 포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그 머리들을 도로(道路) 좌우 편에 줄을 지어 놓고 이의민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의종은 객사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간수(看守)하였다.
의종(고려 제 18대 황제)
乃引義旼等入城出毅宗至坤元寺北淵上獻酒數盃義旼拉脊骨應手有聲
이어 이의민 등을 인도하여 입성한 후 의종을 곤원사(坤元寺) 북녘 못(淵)으로 데려다가 술을 몇 잔 올리고 이의민이 왕의 등마루 뼈를 꺾었는데 손을 대자 소리가 났다.
便大笑
이것을 보고 이의민은 껄껄대며 웃었다.
存威裹以褥合兩釜投之淵中忽旋風大起塵沙飛揚人皆呼噪而散
박존위는 그 시체를 이불에 말아서 가마(釜)두 개를 합친 틈에 끼워서 연못 속에 던졌더니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어나 모래가 날아서 사람들이 모두다 소리 지르며 달아났다.
寺僧有善泅者取釜棄屍屍出水涘有日魚鼈烏鳶不敢傷.
그 절의 혜엄 잘 하는 중이 물 속으로 들어가서 가마를 떼어 가고 시체를 버렸더니 시체가 물가로 나와서 여러 날 있었으나 물고기나 새들이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前副戶長弼仁等密具棺瘞水濱
전 부호장(前副戶長) 필인(弼仁) 등이 비밀히 관을 마련하여 물 언덕에 묻었다.
義旼自以爲功拜大將軍.
이의민은 이것을 공으로 자인했으며 대장군으로 되었다.
#高麗史128卷-列傳41-叛逆2-李義旼-002
明年趙位寵起兵義方以義旼爲征東大將軍知兵馬事
다음해에 조위총(趙位寵)이 기병(起兵) 하였으므로 이의방은 이의민을 정동대장군 지 병마사(征東大將軍知兵馬使)로 삼았다.
義旼將兵赴戰有流矢中目
그래서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는데 눈에 화살이 명중되었다.
進軍鐵嶺四面鼓噪急擊大破之
그래도 철령으로 진군하여 사면으로부터 북을 치며 소리를 지르고 급격히 돌격해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方攻漣州有興化道逆賊數千來屯北川救之義旼領兵出拒冒刃入其屯斬一騎將賊兵退是
연주(漣州)를 한창 공격하고 있을 때 흥화도(興化道)의 적 수천 명이 와서 북천(北川)에 둔(屯) 치고 구원하여 나섰으므로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막아 싸우면서 칼날을 헤치고 적진에 들어가서 말 탄 적장 한 명을 죽였더니 적병들이 물러갔다.
後賊聞義旼兵至輒奔遁不敢敵
그 후부터는 적병이 이의민의 군대가 온다는 말만 들으면 곧 도망치고 감히 대전하지 못하였다.
以功拜上將軍.
그 공으로 상장군이 되었다.
七年位寵餘兵復聚保香山義旼領八將軍往擊之斬三百餘人告捷.
명종 7년에 조위총의 패잔병이 다시 보향산(保香山)에 집합하였으므로 이의민이 8장군을 데리고 출정 공격하여 3백여 명을 죽이고 승전했다.
九年慶大升誅仲夫朝士詣闕賀大升曰:
명종 9년에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처단한 후 조정 관원들이 예궐(詣闕)하여 축하할 때 말하기를
"弑君者尙在焉用賀爲!"
“임금을 죽인 놈이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하였다.
경대승
義旼聞之大懼聚勇士于家以備之又聞大升都房人謀害所忌益懼乃於里巷樹大門以警夜
이의민이 이것을 듣고 크게 겁이 나서 자기 집에 용사(勇士)를 모아 두고 경비했으며 또 경대승과 도방(都房) 사람들이 제각기 꺼리는 자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욱 겁이 나서 자기 집 문전 골목 밖에 대문을 세우고 밤이면 경비했다.
號爲閭門京城坊里皆效而樹之.
이것을 여문(閭門)이라 했는데 서울 방리(坊里)마다 모두 이를 모방하여 문을 세웠다.
十一年拜刑部尙書上將軍.
명종 11년에 이의민이 형부상서 상장군으로 되었다.
初大升之誅許升也義旼以兵馬使出鎭北塞有人謬傳國家誅大升義旼聞之大喜曰:
지난 때에 경대승이 허승(許升)을 죽였을 때 이의민이 병마사로서 북방 국경 지대에 나가 진수하고 있었던바 어떤 사람이 나라에서 경대승을 죽였다고 잘못 전달하였더니 이의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吾欲殺大升未果是誰之謀歟? 先我着鞭矣." 大升聞而銜之.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다가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이 일은 누가 꾸몄을까? 나보다 손이 빠르구나!”라고 하였다. 경대승은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었다.
義旼還懼不自安稱疾歸其鄕
이의민이 돌아와서는 겁이 나서 불안을 느끼고 병이라는 핑계로 고향으로 떠나갔다.
王屢召不至及大升卒猶不至
이의민은 왕이 여러 번 소환해도 오지 않았으며 그 후 경대승이 죽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王懼爲亂授工部尙書遣中使敦諭乃至
왕이 그가 반란을 꾸밀까 두려워서 병부상서 벼슬을 주고 중사(中使)를 시켜서 간곡히 타일렀더니 그제야 돌아왔다.
引見便殿
왕은 그를 편전(便殿)으로 불러서 접견하였다.
王內實畏忌外加恩慰中外嘆
왕은 실상 내심으로는 무섭게 여기고 꺼리었으나 외면으로는 은총을 표시하니 온 나라가 임금의 유약함을 개탄했다.
명종(고려 제19대 황제)
王柔懦尋加守司空左僕射.
왕은 그 후 곧 이의민에게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 벼슬을 더 주었다.
#高麗史128卷-列傳41-叛逆2-李義旼-003
二十年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時宰相多武人
20년에 이의민은 동 중서문하 평장사 판병 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로 되었는데 당시 재상은 무관 출신이 많았다.
知樞密院事金永存副使孫碩同在院相詬罵如兩虎哮吼同列畏縮稍稍引去唯副使王度從容誘解.
지 추밀원사 김영존(金永存)과 부사 손석(孫碩)은 같이 추밀원에 있으면서 서로 욕지거리하는 양이 마치 두 범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 같아서 동렬(同列)들이 위축되어 슬금슬금 빠져 가고 오직 부사(副使) 왕도만이 조용히 달래 말리었다.
一日義旼與杜景升同坐中書誇曰:
두경승
하루는 이의민이 두경승(杜景升)과 중서성에 같이 앉아서 자랑하여 말하기를
"某人自矜勇力吾擊仆之如此." 遂用拳撞柱榱桷爲之動
“어떤 사람이 힘 자랑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다” 라고 하면서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기둥이 흔들렸다.
景升曰: "某時之事吾以空拳奮擊衆皆奔潰." 遂撞之拳陷於壁
그러자 두경승이 말하기를
“어느 때 일인데 내가 빈 주먹으로 후려쳤더니 뭇사람이 모두 도망쳤다”라고 하면서 벽을 쥐어지르니 주먹이 벽에 묻혔다.
後義旼與景升坐省議事相失奮拳擊柱曰:
그 후에도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성(省)에서 일을 토의 하다가 의견이 충돌되어 주먹을 들어 기둥을 치면서
"爾有何功位在吾上!" 時人語曰:
“네가 무슨 공이 있다고 지위가 나보다 높은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掖垣李杜密院孫金."
“중서성에는 이(李)가와 두(杜)가요, 추밀원에는 손(孫)가와 김(金)가라”라고 하였다.
或作詩嘲之曰:
또 어떤 문사는 시를 지어 조소하여 이르기를
"吾畏李與杜屹然眞宰輔黃閣三四年拳風一萬古."
吾畏李與杜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屹然眞宰輔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黃閣三四年 황각에 앉은지 3∼4년에
拳風一萬古 주먹 바람은 만 번은 더 불었네
라고 하였다.
#高麗史128卷-列傳41-叛逆2-李義旼-004
二十三年南賊蜂起其劇者金沙彌據雲門孝心據草田
명종 23년에 봉기한 남적(南賊)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자는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의 효심(孝心)이었다.
嘯聚亡命剽掠州縣王聞而患之遣大將軍全存傑率將軍李至純李公靖金陟侯金慶夫盧植等討
그들이 망명한 사람들을 규합해서 주, 현(州縣)을 습격 약탈하였으므로 왕은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을 파견하면서 장군 이지순(李至純), 이공정(李公靖), 김척후(金陟侯), 김경부(金慶夫), 노식(盧植)등을 통솔하고 토벌케 하였다.
남적 토벌군 출병식
이지순
之至純義旼子也.
그 중에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다.
義旼嘗夢紅霓起兩腋*閒頗負之又聞古讖有龍孫十二盡更有十八子之語十八子
이의민이 일찍이 자기 꿈에 5색 무지개(紅霓)가 양편 겨드랑이에서 일어났으므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옛도참(圖讖)에 “용손은 12에 다 된다(龍孫十二盡)”란 말이 있고 또 ‘십팔자(十八子)’란 말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乃李字因懷非望稍損貪鄙收用名士以釣虛譽自以籍出慶州潛有興復新羅之志與賊沙彌孝心等通
‘십팔자’란 이(李)자이므로 이런 데서 왕위를 바라보게 되어 약간의 탐욕을 참고 명사(名士)들을 등용해서 헛된 명망을 낚았(釣)으며 또 자기 출신이 경주라 하여 내심으로 신라(新羅)를 다시 일으킬 뜻을 가지고 김사미, 효심 등과 내통하였다.
賊亦贈遺鉅萬
그리고 적도 거만(鉅萬)의 재물을 보내 주었다.
至純亦貪婪無厭聞賊多財物欲鉤致之陰與交通資以衣糧鞋*말賊亦遺
이지순도 만족을 모르는 욕심쟁이여서 적에게 재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낚아 들이려고 비밀히 적과 연락을 가지고 의복, 식량, 신, 버선 등의 물자를 주었으며 적은 금은 보화를 보내 왔다.
以金寶由是軍中動靜輒泄以至屢敗.
이런 데로부터 군중(軍中)의 동정이 이내 누설되어 여러 번 패전을 초래하게 되었다.
存傑嘗以智勇名至是忿恚曰:
김존걸은 본래 지략과 용맹으로 이름난 장수였으나 사태가 이렇게 되니 울분해서 말하기를
"若以法治至純其父必害我否則賊益熾罪將誰歸?"
“만일 법으로 이지순을 처치하면 그의 부친이 틀림없이 나를 죽일 것이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세가 더욱 치열해 질 터이니 장차 그 죄를 누구가 질 것이냐?”라고 하더니
至基陽縣仰藥而死.
기양현(基陽縣)에 이르러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高麗史128卷-列傳41-叛逆2-李義旼-005
二十四年王冊義旼爲功臣兩府文武群臣皆就第賀
24년에 이의민을 공신으로 책봉했는데 양부(兩府)의 문무백관이 모두 다 그 집으로 와서 축하를 드렸다.
義旼擅銓注政以貨成支黨連結廷臣莫敢誰何多
이의민이 전주(銓注)를 독단으로 처결하면서부터 누구든 재물만 가지면 무슨 벼슬이나 다 할 수 있었으며 그 도당이 널리 뻗쳐 있었으므로 조정 신하 중 누구도 감히 개구치 못하였다.
占民居大起第宅奪人土田肆其貪虐中外震慴.
그리 하여 주민들의 집터를 강탈하여 자기 집을 대규모로 건축했고 타인의 토지를 강탈하며 마음대로 포학을 부리니 일국이 무서워서 떨고 있었다.
嘗自駱駝橋至猪橋築堤高數尺挾堤種柳人稱爲新道宰相.
일찌기 이의민은 낙타교(駱駝橋)에서 저교(猪橋)까지 뚝을 수척의 높이로 쌓고 뚝 좌우 편에 버들을 심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신도 재상(新道宰相)이라 하였다.
義旼妻崔氏兇悍因妬格殺家婢
이의민의 처 최씨(崔氏)는 성품이 흉악하여 질투한 까닭에 여종을 때려 죽인 일이 있다.
且與奴私義旼殺奴逐妻
또 남자 종과 간통해서 이의민이 종은 죽이고 처는 축출했다.
多引良家女子有姿色者爲婚旋復弃之
그 후 이의민은 양가 처녀들을 많이 끌어들여 얼굴이 고우면 결혼했다가는 곧 다시 버리곤 했다.
諸子倚父肆橫至榮至光尤甚世謂之雙刀子.
그의 자식들은 애비를 등대고 횡포했는바 그 중에서도 이지영(至榮), 이지광(至光)이 우심해서 세상에서 그들을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렀다.
이지영
이지광
至榮嘗爲朔州分道將軍舊例將軍必承兵馬指揮然後巡行道內至榮專擅出入略無畏忌
이지영이 삭주 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으로 있었는데 관례에 의하면 장군은 반드시 병마사의 지휘를 받은 연후에 도 내를 순행할 수 있었는데 이지영은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監倉使閤門祗候崔莘尹奉使到朔州至榮不迎命以褻服同食公舘忽手捽莘尹欲敺殺之力困少休莘尹得逃
감창사(監倉使) 합문지후 최신윤(崔莘尹)이 왕의 명령을 받들고 삭주에 왔는데 이지영은 영접도 하지 않고 보통 옷으로 공관에서 그와 같이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최신윤을 틀어잡고 때려 죽이려 하다가 힘들어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최신윤이 도망쳤다.
至榮取莘尹衣物火之殺麾下螺匠一人
그랬더니 이지영은 최신윤의 의복과 휴대품을 불사르고 그 부하 나전칠기쟁이(累匠) 1명을 죽였다.
凡忤意者輒殺之聞人有美室闞其夫出必脅亂之路遇美婦人輒使從者擁去汚而後已.
이지영은 이와 같이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는 걸핏하면 죽였으며 남에게 아름다운 처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그 남편이 외출한 틈을 엿보고 반드시 협박해서 정조를 유린하였으며 노상에서 아름다운 부인만 보면 꼭 수종자들을 시켜서 납치하여 더럽히고야 말았다.
嘗與牽龍朴公襲爭妓花園玉有憾拔劒逐公襲于宮門
일찍이 견룡(牽龍) 박공습(朴公襲)과 기녀 화원옥(花園玉)을 쟁탈하다가 감정을 품고 칼을 뽑아 들고 박공습을 죽이려 궁문까지 쫓아왔다.
義旼請罪至榮王不許請流花園玉王遣內侍李德宇囚妓至榮突入獄逐德宇出其妓
그래서 이의민이 이지영을 처벌할 것을 청원했으나 왕이 윤허치 않았고 화원옥을 귀양 보낼 것을 청원하였으므로 왕이 내시 이덕우(李德宇)를 파견하여 그 기녀를 가두었더니 이지영이 옥중으로 돌입해서 이덕우를 쫓고 그 기녀를 출옥시켰다.
又逼*滛{淫}王嬖姬王不得罪之朝野痛憤.
이지영이 왕의 총애하는 희첩을 협박하여 간음했는 데도 왕은 감히 처벌하지 못하였으므로 조정 내외가 모두 통분했다.
義旼女爲承宣李賢弼妻*滛{淫}縱與母同賢弼醜之不與同居
이의민의 딸이 승선 이현필(李賢弼)의 처가 되었는데 음탕한 품이 어미와 같았으므로 이현필이 더러워서 동거하지 않았다.
賢弼之子晉玉拜別將亦甚狂狡.
이현필의 아들 이진옥(晉玉)이 별장으로 있었는데 역시 대단히 광포하고 교활했다.
至純諫其父曰:
이지순이 그 부친에게 간하여 말하기를
"公以孤寒位將相宜有敎方以守富貴今子孫橫暴怨結於人禍必不旋踵矣."
“아버지께서는 한미(寒微)한 몸으로 장상이 되었으니 마땅히 자손들을 옳게 교양해서 부귀를 유지하여야 하겠는데 지금 자손들이 횡포해서 뭇사람들의 원한을 사고 있으니 화가 반드시 눈앞에 닥쳐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高麗史128卷-列傳41-叛逆2-李義旼-006
二十六年至榮爲將軍奪崔忠粹家鵓鴿忠粹怒遂告兄忠獻欲誅義旼父子忠獻然之
명종 26년에 이지영이 장군이 된 후 최충수(崔忠粹)의 집 비둘기를 강탈했으므로 최충수가 노해서 자기의 형 최충헌(崔忠獻)에게 고하고 이의민 부자(父子)를 죽이고자 했더니 최충헌이 동의했다.
義旼適在彌陀山別墅忠獻等往殺之梟首于市.
그때 이의민이 미타산(彌陀山) 별장에 가 있었으므로 최충헌 등은 그리로 가서 그를 죽이고 저자에서 효수했다.
時至純爲大將軍至光爲將軍聞變率家僮戰于路至純見忠獻等多助自揣不勝與至光遁走
당시 이지순은 대장군으로, 이지광은 장군으로 있었는데 이 사변을 듣고 가동을 인솔하고 노상에서 싸웠으나 이지순은 최충헌 등의 세가 강대해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이지광을 데리고 도주했다.
至榮以碧瀾江普達院爲願刹欲跨江作橋携妓往安西都護府令吏民助其費吏民畏禍抽斂白金七十斤與之民不堪其弊
이지영은 벽란강 보달원(普達院)을 원찰(願刹)로 삼고 강에다 다리를 가설하고자 기녀를 데리고 안서 도호부(安西都護府)로 가서 아전과 백성들에게 비용을 부담케 하였으므로 그들은 후환이 무서워서 은 70근을 추렴하여 주었는바 백성들이 그 폐단에 견디지 못했다.
忠獻遣將軍韓休往捕之休侵夜入府至榮方與太守許大元宴戴花把酒休斬之傳首于京
이런 때에 최충헌이 장군 한휴(韓休)를 보내 체포케 했는데 한휴가 밤에 도호부로 들어가니 이지영은 태수 허대원(許大元)과 연회를 베풀어 놓고 머리에는 꽃을 꽂고 손에는 술잔을 잡고 있었는데 한휴가 목을 베어 서울로 보냈다.
安西民喜曰: "至榮死吾屬無患矣."
그때 안서 백성들이 기뻐서 말하기를
“이지영이 죽으니 우리에게는 걱정이 없다”라고 하였다.
忠獻等又請遣祗候韓光衍于慶州夷義旼三族分遣使諸州誅其奴隷及黨附者流賢弼于原州
최충헌 등은 또 왕에게 청하여 지후 한광연(韓光衍)을 경주로 보내서 이의민의 3족(三族)을 멸하게 하고 각 주(州)로 사람을 파견하여 이의민의 노예와 도당들을 죽이고 이현필을 원주(原州)로 귀양 보냈다.
至純至光詣仁恩館乞罪忠獻曰:
이지순과 이지광이 인은관(仁恩館)으로 가서 사죄하니 최충헌이 말하기를
"此禍本也不可貸." 斬之.
“이놈들이 화근이니 용서하지 못한다!”라고 하고 그들을 죽였다.
義旼不會文字專信巫覡
이의민은 본래 글을 모르며 무당을 믿었다.
慶州有木魅土人呼爲豆豆乙
경주에 목우(木偶) 귀신이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義旼起堂於家邀置之日祀祈福忽一日堂中有哭聲義旼怪問之魅曰:
이의민은 제 집안에 당(堂)을 짓고 그 귀신을 맞아다가 날마다 제사하면서 복을 빌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그 사당에서 곡성이 들려 오므로 이의민이 괴상히 여기고 물으니 그 귀신이 말하기를
"吾守護汝家久矣今天將降禍吾無所依故哭." 未幾敗.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 주었는데 이제 하늘이 재화를 내리려 하니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서 울고 있다”라고 말했다.
有司奏請去壁上圖形詔墁之.
해당 관리가 이의민의 화상을 벽상에서 떼어 버릴 것을 건의하였으므로 왕이 그 화상을 그냥 둘 것을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