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최지안
눈과 눈 사이에 길이 있다. 정을 주고받기 전 눈을 먼저 맞춘다. 손을 잡기 전, 팔짱을 끼기 전 우리는 눈을 맞춤으로써 눈이 걸어갈 길을 낸다. 그 길에서 서로의 빛이 만난다. 눈빛과 눈빛이 만나면 전생이 기억날 것 같기도 하다. 아님 전생을 핑계로 인연을 만들지도 모르겠다. 각별한 사이는 그렇게 눈으로 시작한다. 눈동자 안에 오롯이 들어있는 상대에 대한 믿음. 눈을 맞춘 사이는 눈빛만 보고도 상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안다. 그래서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은 사이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어떤 눈빛은 사는 동안 잊히지 않는다. 실체는 없어도 눈빛만은 남아서 속을 휘젓는다.
내 눈빛을 아는 개가 있었다. 개가 그리워지는 시간이면 가로등이 일제히 켜진다. 불빛이 빈터를 비추면 거기 있던 개가 생각난다. 그곳에 개가 있었다. 누런 털을 가진, 얼굴이 큼직하게 잘생긴 진돗개. 눈도 까맣게 크던. 물을 싫어하던 개.
위탁해서 개를 키워준 일이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혼자 지내던 개였다. 서울에서 가끔 오가는 주인은 그 진돗개를 대박이라 부르며 며칠에 한 번씩 와서 개에게 먹이를 부어놓고 다시 서울로 가곤 했다. 개의 나이를 물으니, 주인도 잘 모른다고 했다. 한 여섯 살에서 여덟 살쯤 되었다고 했다.
처음엔 거절했다. 무언가에 매여 있는 삶은 내 행동반경을 줄여놓을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털이 있는 짐승. 목숨이 붙어있는 것들을 키우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권리도, 다른 종족의 운명에 간섭하는 것도 싫다. 지구라는 행성에 끼친 해악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기에 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하여 동참하지 않는 것도 내 나름의 거부 방식이다. 그러나 순한 그 눈빛에 그만 집 옆 빈터로 들여놓았다. 개가 며칠씩 굶는 것을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개가 있으면 야생 짐승들이 못 올 것이라는 주위의 권고는 결정하는 데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험한 인상과 달리 온순한 개였다.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꼬리를 치고 놀고 싶어 했다. 입에 있는 음식을 빼앗아도 으르렁거리거나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그만 떠돌이 개가 자신의 밥을 먹어도 가만히 두었다. 지나가다 작은 개가 짖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개의 본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산책시키다 자기만큼 큰 개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면 날 위한 보호본능인지 달려들어 싸우려고 했다. 자신보다 약한 것들에게는 부드럽고 강한 것들에게는 단호한 개가 마음에 들었다. 개에게도 사람처럼 타고난 성격이 있다면 그 개는 어진 품성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개는 힘이 좋았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나를 잡아끌고서라도 갔다. 고양이라도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쫓았다. 나는 개에게 끌려서 엎어지고 무릎이 까졌다.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 내겐 노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개는 자주 탈출을 했다. 내가 잡았던 줄을 놓쳐서 탈출할 때도 있었고 쇠로 된 고리를 풀어 탈출을 하기도 하였다. 고리 여는 법을 학습하는지 고리를 바꿔놓아도 번번이 열고 도망을 갔다. 한 번 나가면 저녁이나 되어서 오기도 했고 이삼일 있다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자 개 키우는 그것을 못마땅해하던 이웃에서 민원을 넣었다. 119가 와서 포획한다고 몇 번을 오고 경찰도 와서 개 간수를 못한다고 짜증을 냈다. 다른 민원도 들어왔다. 집 옆 공터에 철망을 치고 개를 거기에 두었는데 공유지에 철망을 쳤다고 불법 건축물이라며 철거명령이 떨어졌다. 개는 집 뒷마당으로 옮겨졌다. 그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주인은 군청으로부터 벌금까지 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어느 날 멀리 나갔다가 와보니 개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울 때였다. 숙박업이 여름 성수기로 들어서자 더는 개를 뒷마당에서 키울 여건도 되지 못했다. 개를 키우자고 숙박업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래도 차마 모질게 끊을 수 없어 그냥저냥 지내고 있었는데 주인이 이런 사정을 알고 내가 외출한 사이 사천 어느 농장으로 보냈다. 주인 나름의 배려였다. 그 덕에 이별을 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풀리면 그 개를 데리고 용인의 단독주택에서 살려고 했던 내 꿈은 그렇게 증발되었다.
주인 앞에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렇게 보내버린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보다 더 속이 아렸을 사람은 주인이기에 그 앞에서 뭐라 할 수도, 울 수도 없었다. 내가 그 개를 키우기로 했을 때 주인은 내심 개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시로 들어오는 민원과 개를 둘 만한 곳이 없어지자, 주인도 더는 신세를 질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민원만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개가 탈출만 하지 않았다면 민원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내가 사정이 어려워 사는 집까지 숙박업으로 내놓지만 않았어도 개를 뒷마당에 두었을 것이다. 아니, 개는 언제고 탈출을 할 것이고 민원은 언제고 들어왔을 것이고 숙박업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작년 여름과 가을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지난 사건을 재생하고 누군가를 원망했다. 원인과 결과와 이웃에 대한 원망과 내가 능력이 있었다면 개를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이 나를 찔렀다.
개의 눈빛을 기억한다. 내 눈빛을 받아먹던 개. 순한 눈빛으로 꼬리를 흔들던 개. 개에게서 받은 눈빛으로 잠시 누군가의 보호자로 지냈던 따스했던 시간. 울어도 다시 찾지 못할 개가 나를 흔든다. 내 개는 아니었지만 내 개나 다름없던 개. 그 개를 지켜줄 수 없었던 일. 사는 동안 지분지분 나를 물어뜯을 기억. 나는 개의 눈빛으로 저녁 어스름 붉게 번지는 하늘을 본다. 참으로 나는 내가 인간이어서 슬프다. 안 될 인연은 아무리 속을 태워도 이어 붙일 수 없는 것인지.
함부로 눈을 맞추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사람이든 미물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