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내게 용서하기 힘든 죄를 지었을때 용서할 수 있어야 용서받기 힘든 나의 죄가 용서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해할만한 상처를 주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용서하기 힘든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용서하는 것이 힘들지만 나의 말도 안되는 죄들이 용서받는 길입니다.
세상에는 양과 염소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양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염소를 불신앙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양과 염소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다고 나선 사람들이며, 이들은 마치 이집트에서 모세를 따라나온 사람들과 같습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은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상식이라는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가 아닌 세상의 사자나 호랑이들은 애매한 상대에게는 정면승부를 걸지 않습니다. 왜냐면 섣부른 승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의와 매너를 지키며, 힘들어도 상식에 어긋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다는 사람들이 상식을 세상의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세상의 상식보다 못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중에 말씀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은 양이고, 말씀의 기준으로 산다고 하면서 세상의 상식 이하로 사는 사람들이 염소라고 느껴집니다.
염소는 보살펴 주는 주인도 들이받습니다.
O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오고, 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때에 그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그 앞에 모든 민족들을 모아 놓고 마치 목자가 양들을 염소들에서 갈라 놓듯이 그들을 따라 갈라놓으리라.
그리하여 양들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들은 그의 왼편에 세워 두고
왕이 그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그의 왕국을 이어받으라.
이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대접하였고,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혀 주었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문안해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음이라.' 하리라.
그때에 의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언제 우리가 주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실 때에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언제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대접해 드렸으며, 헐벗으셨을 때 입을 것을 드렸나이까?
언제 우리가 주께서 병드신 것을 보았으며, 또 감옥에 갇히셨을 때 찾아뵈었나이까?' 라고 하리라.
그러나 왕이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내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리라.
그때에 왕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대접하지 아니하였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문안 오지도 아니하였느니라.' 하리라.
그때에 그들도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여, 언제 우리가 주께서 굶주리신 것과, 목마르신 것과, 병드신 것과,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돌보아 드리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리니,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들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리라.
그러므로 이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이라. 그러나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리라."고 하시더라.
마태복음 25장 31절 ~ 46절
위 말씀에 나오는 가장 작은 자는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적용이 됩니다. 경우에 따라 리더가 가장 작은 자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면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한국교회의 직분자들의 처지가 과거의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공동체안에서 큰 목소리를 내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책임이 없는 성도일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작은 자이고 누가 큰 자입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하지 않지만 성공은 못합니다. 이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선택한 방법으로 그는 흑암에서 슬피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방법은 세상사람들과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이 복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고, 지옥에 가는 더 확실한 방법은 세상사람들의 상식에도 못미치고 받은 한 달란트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도 사람들이 양과 염소로 사람들이 구별되어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정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판단이 되지만 그들의 정체성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한시적인 열매로 구별함은 판단함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현재 염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늦지않게 양의 정체성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천주교안에 있으면 죽고, 염소의 정체성을 끝내 벗지 않으면 죽습니다. 영의 죽음을 벗어나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죽어가는 쪽에 있다면 멈추길 바랍니다. 무엇을 위하여 염소의 정체성을 가지고 삽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으로 당신이 양이 되지 못합니다. 당신의 비판은 맞지만 당신은 틀렸습니다.
이글은 바로 당신에게 쓴 글이며. 아니기를 바라고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억울하게 느껴져도 받아들여진다면 당신은 양이고, 계산해보니 자신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염소입니다.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는 그때가 오기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염소의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아프게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