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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오 5,1-12ㄴ
정체성이라니까, 이 멍청아!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이고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입니다.
우선 제목을 보고 성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는 빌 클린턴이 선거 때 사용한 "경제라니까, 이 멍청아!"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성인이 되거나 참 행복을 원하는 이에게 저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참 행복을 아는 존재가 바로 성인들입니다.
조던 피터슨은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행복은 짧은 쾌락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런 행복을 추구하면 참 행복에서는 멀어집니다.
그는 인생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것도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고생만 하며 살기를 바랍니까? 창조자는
자기 피조물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를 흘리며 창조합니다.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자에 대한 합당한 예의입니다.
자기를 망치는 사람은 부모에게도 하느님에게도 불효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덜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죽음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 하는데 어떤 이들은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요?
참 행복과 참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돗개 호순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돗개가 첫 주인을 찾아 먼 길을 달려온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진돗개는 더 편안할 수도 있는 곳을 마다하고 주인을 찾아오는 것일까요?
호순이는 용인시에 위치한 한 사설 유기견 보호소에서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기견 중 제일 착하고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보호소 소장이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나머지 유기견들은 봉사자들에게 맡겨졌고 호순이는 수원에 있는 소장의 여동생
집에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호순이가 사라졌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1년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아 길에서 죽었겠거니 생각하고 있을 무렵 호순이의 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소장은 밖으로 나가봤고 호순이가 맞았습니다. 호순이는 1년 넘게 수원에서 용인까지
자기 냄새를 추적하며 찾아온 것입니다.
호순이는 마지막 몇 년을 주인과 함께 살다 하늘로 갔습니다.
왜 진돗개들은 한 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주인의 여동생
집도 편하기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무엇이 가장 큰 고통이고 무엇이 가장 큰 행복인지 잘 압니다.
가장 큰 고통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호순이는 유기견이었습니다.
주인이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고통은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기견 보호소 소장이 주인이 되어주었고 호순이는 행복했습니다.
주인에게 충실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먹고 생존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첫 주인을 그렇게까지 찾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명한 진돗개 백구는 약 7개월 동안 대전에서 진도까지 300킬로미터를 주인 할머니를
찾아 여행하였습니다. 먹을 음식도 마땅치 않고 숨은 위협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유혹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의 행복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준 할머니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갓 태어난 존재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울음을 그치고 부모가 주는 젖을 먹으며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까요?
그들이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참 행복은 게임기도 아니고 자전거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아닙니다.
부모 자신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단순히 먹여주고 보호해주어서가 아닙니다.
보육원에서도 그것은 합니다.
부모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 외에 다른 모든 즐거움들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괴로움을 잊기 위한
방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자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느님을 만나 진정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성인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오 5,1-12ㄴ
우리 모두 성인이 됩시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과 내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 딱 붙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아는 바처럼,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목숨 역시 영원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각 개인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은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살아생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향방이 달라집니다.
평생토록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 가난한 이웃에 대한 나눔이나 배려라고는 단1도 없이
그저 흥청망청 떵떵거리며 살아온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을 끝도 없이 힘들게 만든
사람들의 미래는 암담할 것입니다.
물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자비의 하느님이시기에 그들에게도 당신의 크신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악이란 악만 골라 저지르는 사람들의 최후는 그 대가가
혹독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적 권고에 충실했던 사람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나 또 다른
세상에서나 행복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는 대축제의 날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했던 사람들,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어준 모든 사람들, 비록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시는 모든 익명의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저는 확신합니다.
성인이란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세계에서 살다간 유별난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보다 한 3분 정도 더 인내한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친절했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사랑했던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함을 지녔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인간미를 풍겼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영적 생활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성인들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머무는 빛인 사람들, 이제는 어둠의 세력과 결연히
단절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확실한 성인 후보자들입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길이 성화의 길이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도 어렵지 않은 길이 성화의
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함을 통해서, 좀 더 기쁘게 살아감을 통해서, 조금만 더
기도함을 통해서, 조금만 더 양보하고 물러섬을 통해서 우리 역시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 5,1-12ㄴ
성인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성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성인이라고 선포해야만 성인인 것은 아닙니다.하느님께
서 당신의 나라에 맞아들여 주신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내가 어찌 성인이 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1요한 3,2-3).”
여기서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라는 말은,
“누구든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기를 바란다면,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예수님을 본받아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라는 뜻인데,
희망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는 행복”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인입니다.
성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글자 그대로 모든 성인들을 공경하는 날인데, 전례력에 들어 있지
않은 성인들을 특별히 더 기억하고 공경하는 날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공경하는
날이고, 그들을 본받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즉 우리도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이 서양에서는 세속적인 축제로 변질되었는데,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흉내 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할로윈 축제는 ‘모든 성인 대축일’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좁은 문’은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 그러나 희망하기만 하고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신학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재산을 아주 많이 바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바칠 것이 동전 두 닢밖에
없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사실 재산을 많이 바치는 것과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뜻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지, 또는 못 들어가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묵시록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시는 목자이신 분이기 때문에, ‘심판’은 한 사람이라도
더 떨어뜨리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합격시켜 주려고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선행입니다.
우리는 그 한 번의 작은 선행 덕분에 지옥으로 가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요한 15,13)만 사랑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작은 사랑도 사랑입니다.
(‘물 한 잔’에 관한 예수님 말씀에는, “사랑 실천에 대한 심판은 사랑의 크기로 따지지
않고, ‘실천했느냐, 안 했느냐?’로만 따진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여러 가지 여건과 능력이 부족해서, 신앙생활이 아주 많이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사랑 실천도 제대로 못한 것만 같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묵주기도를 수십 단, 수백 단 바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짧은 화살기도 한 번 바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런데 둘 중에 누가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들어갈지는 모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고 엄격하고 거창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들
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작은 이들’, 즉 가난하고 못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멸시하고 천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