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안도현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 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헤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신시키는
그 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 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시집 『모닥불』, 1989)
[작품해설]
이 시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따스한 마음과 뜨거운의지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적(私的)인 차원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지난(至難)한 민족 현실을 뚫고 가려는 맑은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모닥불은 희망의 불이요 미래의 불이다. 지금은 비록 암울하고 고달픈 현실이지만, 모닥불이 있기에 아직은 견딜만한 것이 된다. 희망의 모닥불이 피오오르는 곳은 어느 특정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가난하고 못난 모든 민중들의 삶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미래의 모닥불은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나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주거나, ‘쓰레기장’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쓰레기들처럼 남루하게 살아온 온갖 ‘잡것들’의 고통을 위무해 준다. 또한 생존권을 위해 고용주와 맞서 ‘철야농상한 여공들 가슴속’이나 이른 아침 일터로 나가기 위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첫차를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 그리고 가난으로 인해 상처받은 어린아이의 가슴에도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그뿐만이 아니라,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역사 주체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특히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은 시인의 시선이 소외되고 가난한 자에 가 있음을 알게 하는 한편, ‘쓸제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은 지식인의 허위 의식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배어 있음을 알게 한다.
화자가 처한 현실은 ‘얼음장이 강물 위로 눕는 섣달’이요, 더욱이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현실 상황이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려 주는 동시에 기나긴 고난의 시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동트기 직전이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이긴 하지만, ‘십 분’후면 아침해가 떠올라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훅훅’ 뜨거운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어 줌으로써 ‘죽음도 스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은, 삶이란 피어오르는 모닥불처럼 뜨거운 것이며, 신선한 충격을 주는 소중한 것이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에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꿈꾸며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이 작품에서 모닥불은 암울한 역사의 현장을 말없이 지켜보며 은은한 향기를 피워 올리는 한 그루 향나무처럼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민중의 가슴에 불꽃으로 타오르는 삶의 희망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백석의 「모닥불」이 패러디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패러디(parody)는 원전(原典)과의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지향하는 것이며, 이 차이의 깊이와 공교로움에 의해 작가의 개성과 예술혼의 위대성을 입증해야 하는 까다로운 형상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안도현은 자신의 「모닥불」을 백석의 「모닥불」처럼 3단 구성을 취하되, 연 구분은하지 않았으며, 이를 내적 구성상의 차이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형식적 차이 속에서 그는 모닥불의 의미의 차이까지도 시도한다. 즉 백석의 ‘모닥불’이 슬픔을 빛으로 전화(轉化)시키는 민족적 생명력에 천착(穿鑿)한 것이라면, 그는 보다 민중 지향적이고 보다 저항적인 힘의 형상화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그는 백석의 ‘모닥불’이 지니는 원환적(圓環的) 생명력을 현대적으로 재생시키면서도 더 새로운 의미를 보태고자 한다. 그 결과 그의 ‘모닥불’은, 구체적 물상들과 그것들의 연관 속에 생명력이 곧바로 숨쉬고 있는 백석의 ‘모닥불’에 비해 훨씬 더 설명적이고 교술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또한 그의 ‘모닥불’은 구체적인 것들과 추상적인 것들 사이의 부조화, 또는 구체적인 것들에서 추상적인 것들로의 비약을 보여 준다.
이 때 그 구체적인 것들이란 곧 체험적인 삶이며, 추상적인 것들이란 민중주의적 역사 인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소개]
안도현(安度眩)
1962년 경상북도 예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
1996년 제1회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0년 원광문학상 수상
시집 :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모닥불』(1989),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그리운 여우』(1997),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1999), 『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아침엽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