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大韓)’ 사람 ‘정동(貞洞)’을 걷다
이경래 박사(성공회 사제, 역사학)
학창시절 누구나 좋아하는 과목 한 두 개 쯤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리와 역사를 좋아했다. 지리를 공부할 때면, 그 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고, 역사를 공부할 때는 과거 사람들의 삶에 들어가서 함께 살아보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2018년 4월 서울시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정동지역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기관들이 ‘정동역사재생지역협의체’라는 이름으로 출범하면서 필자에겐 예전 학창시절 지리와 역사를 배웠을 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배재학당, 이화여고, 덕수초등학교, 구세군중앙회관, 중화한성교회, 중명전, 덕수궁, 정동극장 등 협의체 일로 회원기관들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그 장소를 찬찬히 보고,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과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상력이 점점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역사(歷史)를 영어로 ‘히스토리(history)’라고 한다. ‘그 사람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살았던 장소를 알 수 있고, 시대를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히스토리는 사람의 이야기인 동시에 장소의 이야기이고,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려면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정동역사재생지역협의체에 속한 정동의 다양한 기관들이 바로 그들이다. 예컨대, 정동의 교육이야기에 대해선 이화, 배재, 예원, 창덕, 덕수가 있다. 또 정동의 종교이야기를 하려면 구세군 제일교회, 성공회 주교좌성당, 감리교 정동제일교회, 장로교 평안교회, 천주교 프란치스코회, 거기에 중화기독교 한성교회도 있다. 그리고 외교 이야기를 하려면 영국, 미국, 러시아를 비롯하여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대사관이 있다. 언론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경향신문, 조선일보, 문화일보가 있고, 공익단체로는 대한황실문화원, 문화유산국민신탁,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가 있다. 또한 부채표 활명수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기업 동화약품 이야기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살고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오래된 정동아파트 주민들, 정동의 상인들도 그들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덕수궁, 환구단, 중명전은 곡절 많은 대한제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인이 덕수궁 둘레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과 연관된 서울시립미술관도 있다. 원래 이곳은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있던 대한민국 법조타운이었다. 아마도 이혼소송을 하러 온 부부들이 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 같다. 법조타운이 서초동으로 이전한 요즘에는 덕수궁과 관련된 속설도 점차 잊혀가고 있다.
은행나무에서 노란 잎이 떨어지고 첫눈이 오는 늦가을과 초겨울 정동 길을 걷다 보면,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노래말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이처럼 정동은 근현대사를 품고 있다. 아울러 왕궁을 비롯해 근대 교육, 종교, 언론, 외교공관, 문화예술 단체와 공연장, 기업 등이 들어서 있는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런 정동에서 귀담아들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동에는 고종과 왕실사람들부터 서양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 의사들의 이야기가 있고, 이들을 통해 근대문명을 배운 선조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더불어 그들로부터 공간과 시간을 물려받아 현재를 살고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있다.
세월의 흔적을 더듬으며 정동길을 걷다보면 이야기가 단절된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손탁호텔(Sontag Hotel)’이다. 현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앞에 표지석만 남아있는 손탁호텔은 구한말 우리외교사에 아주 귀중한 장소였다. 지난해 <미스터 션샤인>이 방영되면서 손탁호텔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손탁호텔은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설립자 손탁(1854-1925)은 독일인이면서 초대 조선 러시아공사의 처형이었다. 러시아 공사와 함께 조선에 온 손탁은 러시아공사의 소개로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였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요리솜씨가 좋은 손탁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호감을 사서 자연스럽게 조선왕실의 외교에 기여하게 되었다. 1895년 고종은 정동에 있는 왕실 주택과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이것은 왕실의 호의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과 친일파들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종에게 하사받은 한옥을 서양식으로 개조하여 서양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어서 배일운동의 근거지로 활용했다.
을미사변의 참극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아관파천을 감행하였고, 이 때 손탁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다. 고종은 감사의 뜻으로 1898년 3월 손탁호텔을 서양식 벽돌건물로 개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외국인들의 방문이 빈번해짐에 따라 손탁호텔은 1902년 2층으로 증축하였다. 증축과정에서도 고종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손탁호텔은 유·무형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909년 손탁은 호텔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경영난이 지속되자 손탁호텔은 1917년 이화학당에 매각된다. 이화학당 기숙사로 쓰이던 손탁호텔은 1922년 프라이 홀 신축을 위해 철거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손탁호텔을 둘러싼 이야기는 구한말 생존을 위해 몸부린쳤던 조선왕실과 서구열강들의 각축전,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일제의 야욕 등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정동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구한말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정동의 사람들은 조선시대에는 왕의 신민이었고, 대한제국시대에는 황제의 백성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사람들이었고, 해방 후에는 산업화와 민주주의 토대를 다진 시민들이다. 시대에 따라 명칭은 달랐지만 모두가 ‘대한(大韓)사람들’이었다. 오직 중원의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중화질서를 거부하고, 간악한 일제에 저항했으면, 한국전쟁의 아픔을 딛고 고도성장을 일궈낸 민족인 것이다.
정동은 대한민국 시민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자 근현대사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창고’다. 점심 때면 식당 앞에 줄 서 있는 직장인들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정동길은 언제나 살아 꿈틀거린다. 죽지않고 살아있는 길이다. 사람 냄새가 그득한 시민들의 길이다.
정동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이지도 모르겠다. 정동이야기는 필설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풍성하고 다채롭다. 정동의 역사와 문화는 얕지 않고 웅숭깊기 때문이다. 다만 글과 사진으로 정동의 어제를 더듬고, 오늘을 살펴보며, 내일을 조망해보려는 작은 노력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만들어냈다. 이 책이 정동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