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9](월) [허균 얼 톺아보기] 성소부부고 살피기 012#
https://youtu.be/Da4xqZb2iOA
지난번에 처음으로 시부를 건너뛰어 제4권인 문부(文部)1의 서(序)로 들어가 첫번째 글인 ‘기달산으로 돌아가는 이나옹을 전송한 서’를 읽었읍니다. 예상했던 대로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매달리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마음을 썼읍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산문이라 풀이, 해석의 뒤틀림이 거의 없다고 여겨 신호열 선생님이 풀이해 놓은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와 저의 생각을 살짝 보탠 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그 다음을 이어 갑니다.
✦문부1 서(序)
기달산으로 돌아가는 이나옹(李懶翁)을 전송한 서(序)
가령 명주(明珠)를 들어 말한다면 똑같이 소라가 난 것이나, 유(儒)는 구슬이 태(胎)로 말미암아 나온다 하고 ,불(佛)은 구슬이 태에 들어가 기탁한다 하니, 대개 유는 하늘을 근본으로 삼고 불은 자기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칠정(七情)이 중심(中心)으로부터 발한다 하는 것은 우리 유의 설인데, 저들은 곧 육입(六入)이니 오음(五陰)이니 하니, 이로써도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다. 그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라든가 그 ’한 법도 놓지 않는다‘라든가 하는 등의 말은 도에 조금 가까우나 다만 그 뜻(意)이 있을 뿐, 마침내 그 이(理)가 없다면 비록 말은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실효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니 과연 도를 안다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처음에 있는 ’명주(明珠)‘는 맑은 구슬을 가리키는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똑같이 소라가 난 것‘이 무슨 뜻으로 연결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읍니다. 그래서 ’소리‘를 ’소라‘로 잘못 적은 것이 아닌가 하여 대신 넣어 새겨 보아도 통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인가 이어진 허균의 말도 제대로 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칠정(七情)은 유학에서 말하는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칠정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대로 유학에서 나와 너로 이루어진 우리들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는 기본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사단(四端)은 바로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知)를 뜻합니다. 바로 어짐과 옳음과 착함과 슬기로움이지요. 이처럼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해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품성은 다음 네 가지로 드러난다고 보고 있읍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요. 그러니까 너의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며, 옳고 그름을 따질 때면 분명하게 따지는 마음이며, 나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요, 이익은 나보다 너에게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칠정은 사람이 지닌 감정으로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이라는 일곱 가지로 나누어 놓은 마음의 드러남입니다. 그러니까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두렵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을 내는 감정 곧 마음의 드러남으로 보면 될 테지요.
문제는 이 사단과 칠정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해서 나온 것으로 바로 이기론(理氣論)이 있읍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이(理)요, 칠정은 기(氣)로 보고 그 드러남을 살핀 것이지요. 이 논쟁에 이황과 기대승, 이이가 등장합니다. 이(理)를 으뜸으로 보고 기(氣)를 그것에 따르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반대로 기(氣)를 으뜸으로 보는 것으로 발전하며 나중에는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로까지 나아 갑니다. 이것은 파격이요, 역설인데 여기까지 보면 유학은 불학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으로까지 보입니다.
다음으로 불학에 대한 생각을 털어 놓습니다. 육입(六入)과 오음(五陰)을 이야기합니다. 이 또한 잘 알려진 대로 육입은 인식의 시작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로 감각기관인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을 뜻하고 오음(五陰)은 오온(五蘊)으로 그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것들이 빚어내는 작용을 구분해 놓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다섯 가지의 현상 곧 대상으로 물질을 뜻하는 색(色)과 그것을 받아드려 반응하여 느껴지는 과정인 수(受)와 느낌이 주는 인식 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想)과 그것에서 일으키게 되는 의지로 드러나는 행(行)과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담아내는 근본을 마음으로 보는 식(識)입니다. 바로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이지요.
다음으로 이어 가 보겠읍니다.
훌륭하다. 자양(주희=朱熹를 가리킴)의 말에 “이 이(理)가 빈틈없이 꽉 차서 자기로 하여금 이(理) 없는 단 한 자리나마 얻어 스스로 안주하게 하지 못함을 미워하고, 이 이(理)의 쉬지 않고 주류(周流) 운행하여 자기로 하여금 한 순간이라도 이(理) 없는 때를 얻어 스스로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함을 싫어하여 이른바 공무(空無) 적멸(寂滅)의 땅을 찾아 도피하는 것이다”하였으니 이 말이 한번 나오면 황면 노자(黃面 老子, 부처를 가르킴)도 응당 남모르는 가운데서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퇴지(당나라 한유의 자)와 영숙(송나라 구양수의 자)의 불(佛)을 물리침은 모두 거죽만의 물리침이었기에 중들이 꺾이지 않았으니 대개 그들의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골고(骨軱, 거대한 뼈=일의 원리)를 꿰뚫어 보고 칼을 썼다면 그것들이 어찌 감히 오낸 세월을 멋대로 행세하여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교(敎)와 더불어 서로 맞서 각축할 생각을 하였겠는가? 나의 견해는 여기에서 그치는 바이다.
이 대목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주자가 훌륭하다고 말을 시작한 것인데 이것은 부처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며 칭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까닭은 사람에게 있어 으뜸가는 근본 도리인 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어서 불학을 멀리하고 배척한 성리학자 퇴지와 구양수를 등장시켜 유학을 드높이기 위하여 배척한 사실을 깊이 들여다 보면서 이것은 어느 면에서 불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불학의 무지에서 온 못난 짓으로 오히려 공자를 욕먹인 것으로 나무라는 듯이 보입니다.
이어서 이나옹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다음에는 이 ‘기달산으로 돌아가는 이나옹‘에 대한 글을 끝까지 마무리지을 수 있을 듯싶네요. 오늘은 여기서 이만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읍니다.
이런 오늘도 고마움으로 힘겹게 톺아보기로 새벽을 건넙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은 좀 깁니다.
설명하기도 많이 까다로웠어요.
허균의 생각을 읽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