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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묵상글(강론글) 하느님의 것 (마르12,13-17)
1차(23:00), 2차(06:45)), 3차 (08:05)
6월 2일 묵상글, 1일 23시 0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 오늘 2차 (주로 김찬선 신부님 강론글)공유가 늦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곳 댓글 란이나
공지로 그 사정과 대처 방법(방안)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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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2일 화요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것 (마르12,13-17)
제1독서<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3,12-15ㄱ.17-18)
사랑하는 여러분,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15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8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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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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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2,13–17
사람들은 예수님을 말로 옭아매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공손한 말로 시작합니다.
“스승님은 진실하시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배우려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산된 질문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하신 뒤 물으십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대 바실리오는
사람의 삶이 단지 세상의 질서 안에서만 규정되지 않고
보다 깊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음을 늘 강조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세금 문제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는 누구의 것이냐?”라는 질문입니다.
동전에 새겨진 형상은 황제의 것이지만
인간 안에 새겨진 형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정치적 교묘함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을 비추는 말씀입니다.
세상 안에서 우리는
여러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공동체의 질서, 사회적 책임,
제도와 법의 자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을 열어 보이십니다.
세상에 속한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삶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황제의 초상으로만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리오는 이 점에서
인간의 존엄과 삶의 방향은
권력이나 소유, 제도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가장 분명해진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질문자들은
예수님을 두 선택지 가운데 가두고 싶어 했습니다.
찬성하면 민심을 잃고
반대하면 정치적 문제를 일으키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의적인 질문의 틀 자체를 넘어
더 깊은 진리를 밝히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지혜입니다.
복음은 자주
우리의 이분법과 계산을 넘어서
근본을 묻습니다.
“네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네가 참으로 돌려드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네 마음은 누구를 닮고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대 바실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것은 단지 제물이나 기도 시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시간, 내 양심, 내 재능,
내 사랑, 내 몸과 영혼,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책임까지도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은
주일 미사 한 번, 기도 몇 마디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느님 앞에 다시 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존재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복음의 깊은 뜻입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은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바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내 시간을 어디에 가장 많이 쓰고 있는가?
내 에너지는 누구를 위해 소모되고 있는가?
내 마음의 중심은 하느님께 있는가,
아니면 체면과 두려움, 소유와 인정에 더 묶여 있는가?
성찰은 바로
삶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존재라면
내 삶도 하느님께로 다시 향해야 합니다.
오늘 화요일 성령의 날에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세상 안에서 책임을 다하면서도
정말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다른 많은 것들이
내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동전보다 더 깊은 우리 마음의 형상을 바라보십니다.
주님,
제가 세상의 책임을 피하지 않게 하시고
동시에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릴 줄 알게 하소서.
제 삶의 중심이 흐려지지 않게 하시고
당신 모상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시간과 사랑, 양심과 선택을
당신께 다시 돌려드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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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처음 간 것은 1996년입니다. 30년 전이었습니다. 보좌 신부님들도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교구의 방침이 있었습니다. 1995년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로 다녀왔고, 1996년에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로 다녀왔습니다. 아쉽게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있었고, 보좌 신부님을 위한 성지순례 프로그램은 없어졌습니다. 그 뒤로 ‘복음화 학교’ 담당 신부를 맡으면서 복음화 학교에서 주관하는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현지 가이드가 안내해 주었습니다. 큰 관심도 없었고, 미사 봉헌과 교우들과의 만남 때문에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 4월에 본당 교우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다른 곳에는 현지에 있는 가이드가 안내해 주었는데, 파티마에서는 수녀님이 안내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의 안내와 현지 가이드의 안내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는 직업적인 면이 있었지만, 수녀님의 안내는 소명과 사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수녀님은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였고, 파티마의 성모님이 바라는 것을 영성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파티마 성지의 광장에는 마주 보면서 두 곳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한 곳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이고 매일 그곳에서 묵주기도와 미사가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맞은 편에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조형물이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그 조형물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둥근 원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의미하고, 구름은 성령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래에 나귀와 소가 있었습니다. 나귀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소는 다른 나라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래에 여성과 남성이 있는데 여성은 성모님, 남성은 요셉 성인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강보에 싸여 있었고, 강보는 끈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묶여 있는 끈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조형물의 보습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수녀님의 설명이 있어서 더욱 뜻깊은 순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의 절망 속에서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고통과 눈물이 기억되지 않는 전적인 새로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 속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 “우리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로움’은 시간이 흐른 뒤의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완성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는 그 약속이 절정에 이릅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 하느님께서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죽음과 고통이 더 이상 없는 세계,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새로움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이루시는 완성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저마다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꿉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아메리카로 이민을 오는 사람, 군 복무를 마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젊은이, 감옥에서 나와 다시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 모두가 ‘새로운 시작’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들의 새로움은 여전히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조건이 달라질 뿐, 인간의 한계와 상처는 그대로 따라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다릅니다. 그것은 외적인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 죄와 죽음의 질서가 완전히 사라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랑을 선택하고, 용서를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 순간마다 우리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더 깊게 다가옵니다.
커다란 황소도 고삐만 잡으면 어린애라도 쉽게 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 재물은 황소보다 훨씬 힘이 셉니다. 재물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황제의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식의 전환으로 이 땅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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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이는 말 그대로 하면, ‘은화’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황제의 것이니 황제에게 돌려주고,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가 자신의 초상을 요구하니,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초상을 요구하시니,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사실, 동전에는 흐리멍텅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인간에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압니다. 곧 하느님의 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은화’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세상의 황제에게 팔아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팔려 넘겨지지도 않는 일인 것입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소유,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우리 안에 진리가 다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자라나야 할 일입니다. ‘진리가 자라게 하는 일’, 그것은 곧 ‘진리를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진리에 속한 이들’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진리’에 속해 있기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진리에 속하도록’ 빛을 밝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새겨진 그분의 것입니다. ‘돈’에는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지만, ‘우리’에게는 그분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에 그분께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분의 생명이 흐르며, 그분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 아닌지’를 묻기에 앞서,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자신을 누구에게 돌려드려야 할지’를 먼저 물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참으로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릅니다.
그러기에, 진정 당신의 것입니다.
하오니, 언제나 당신께 돌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진리의 말씀 따라 살게 하소서.
그 어떤 힘에도 휘둘림 당하지 않는
당신 생명이 차오르게 하소서.
당신 빛으로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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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논쟁에서 밀린 채 포도밭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마르 12,13 참조)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끌어들입니다.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 제국에 기대어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어서 황제 쪽으로 기울기 쉬웠지만, 이와 달리 바리사이들은 황제에게 납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서로 섞이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이, 한 사람을 넘어뜨리고자 잠시 손을 맞잡습니다.
목표는 분명합니다. “말로 올무를 씌우려”(마르 12,13)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칭찬으로 덫을 윤나게 합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대답해 보십시오.’
질문은 하나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허락됩니까?’
‘그렇다.’라고 하면 이스라엘 민중을 잃고, ‘아니다.’라고 하면 황제의 반역자로 몰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이 쓴 가면, 곧 ‘위선’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십니다. 은화에는 아마 티베리우스 황제의 얼굴과, 신성을 암시하는 칭호가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12,17). 제국의 화폐를 쓰려면, 그 체계가 요구하는 의무도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더 깊은 차원을 여십니다. 동전에는 황제가 새겨졌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삶 전체, 몸과 마음과 정신 모두입니다(신명 6,4 이하 참조).
신앙은 이해관계에 따라 요령을 부리는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전인적 응답’입니다.
신앙은 삶 자체의 근원을 묻는 마지막 물음이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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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의 틀을 넘어 사랑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어 놓은 모든 경계를 넘어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는 길
우리의 틀을 넘어 사랑하기
2026년 6월 1일 월요일
리처드 신부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이웃의 모든 모습을 알아들이고 받아들이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성을 편안히 받아들이시며, 하느님의 궁극적 목적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하느님과 온 우주는 두 가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곧 "차이의 드러남"(각 사람과 만물이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것)과 "일치의 실현"(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리학자와 생물학자들이 때로는 신학자나 성직자들보다 이 진리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성경이나 자신들의 경전을 이용해 다른 이들을 단죄하거나 배제하려는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듯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대개 매우 세속적인 관심사—권력과 통제, 타자와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살지 않으셨고 이상화하지도 않으신 가족 형태의 절대화—에 기반합니다. 믿기 어렵다면 복음서를 직접 살펴보십시오.
제도화된 종교는 흔히 인간을 매우 단순한 존재로 여기기에, 모든 상황에서 사람을 보호하려면 법이 복잡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매우 복합적인 존재—신앙, 삶의 방식, 덕성, 기질, 성공 여부가 서로 다른 존재—로 대하시며, 그들을 하느님께 이끌기 위해 오히려 법을 아주 단순하게 두십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고, 각자의 마음과 영혼과 몸과 정신의 모습대로 하느님을 사랑할 자유를 누리도록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십니다. 종교는 종종 사회적 통제를 위해 발전해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통제의 논리에 힘을 실어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시며, 우리의 숨은 의도들을 벗겨 내고 우리가 아직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 지점을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께는 모든 것이 ‘일치’—하느님과의 일치, 이웃과의 일치,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의 일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표나 분류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체면이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 앞에 놓인 진실과 씨름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자아는 얼마나 영리하게 자기를 보호하며 연민과 이해로부터 멀어지려 하는지요. [1]
저자 젠 오스틴(Jen Austin)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깔끔한 범주와 구분을 넘어 나아오도록 어떻게 초대하시는지를 성찰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깔끔한 범주 안에 넣어 정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특성을 지닌 사람들을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흑인 혹은 백인, 동성애자 혹은 이성애자—우리 문화는 수많은 이름표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인간 존엄과 상식이 희생되곤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작은 상자들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 땅에 그어 놓은 모든 선을 넘어섭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40년 동안 법조인으로 일하는 동안, 아주 보수적인 종교적 환경에서 배워 온 ‘확실성’이 삶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법학 교육과 소송 업무는 제가 익숙해져 있던 이분법적 사고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인간 경험의 무한한 변수를 흑백의 논리로 판단하려는 시도는 결국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회색의 스펙트럼에 마음을 열었을 때,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오라는 초대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데 이 다양한 회색의 결(shades of gray)이 관점을 열어 준다는 사실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Larry B.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Where the Gospel Leads Us,” in Homosexuality and Christian Faith: Questions of Conscience for the Churches, ed. Walter Wink (Fortress Press, 1999), 86, 87, 88.
[2] Jen Austin, Coming Out Christian: Finding Wholeness in Faith and Sexuality (Sources of Hope Publications, 2006), 22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eth Macdonald,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의 하구(河口)는 땅도 물도 아닌,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세계를 드러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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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0957
2026.06.01 09:12
베드로 사도가 알려주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길
베드로 사도가 알려주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길 (2베드 1,4-7)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8단계 영적 성장, 베드로 2서 1장 4-7절은 신앙인의 성장이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완성되는 여정임을 보여 줍니다.
믿음 —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맡기는 출발점
덕 —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선한 행동
지식 —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분별하는 지혜
절제 — 욕망을 다스리는 영적 자유
인내 — 희망 안에서 끝까지 견디고 기다림
경건 — 모든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함
형제애 — 이웃을 품고 함께 살아가는 형제성
사랑 — 모든 덕의 완성이며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삶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믿음에서 사랑으로 오르는 영적 계단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당신을 믿는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이가 되게 하셨다"(2베드 1,4)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는 사랑의 방식에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한 사랑의 순환 안에 계십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성자께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남김없이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의 기쁨과 충만함으로 두 분을 하나로 묶으십니다. 그 안에는 소유도 없고 경쟁도 없으며, 지배와 통제도 없습니다. 오직 내어줌과 받아들임, 그리고 다시 흘려보냄만이 있습니다.
마치 멈추지 않는 사랑의 물레방아처럼, 성부는 성자에게 흐르고 성자는 성부에게 흐르며 성령은 그 사랑의 흐름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께서 사랑을 하신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그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계단을 보여 줍니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여덟 개의 계단입니다. 그것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성공의 사다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영혼의 여정입니다.
첫 번째 계단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교리를 머리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붙들고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스스로를 정죄하고 자신을 방어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모든 두려움보다 더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너는 사랑받고 있다." "너는 이미 받아들여졌다."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 믿음은 이 복된 소식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믿음 위에는 덕이 세워집니다. 덕은 믿음이 삶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믿는 사람은 사랑하며 살기 시작합니다. 용서받았음을 믿는 사람은 용서하며 살기 시작합니다. 정직과 친절, 배려와 나눔은 모두 믿음이 몸을 입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형제를 외면한다면 그 믿음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한 씨앗과 같습니다.
덕 위에는 지식이 세워집니다. 여기서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지혜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사랑인지를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려 하고, 정죄하기 전에 품으려 하며,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지식 위에는 절제가 세워집니다. 절제는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자유롭게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 준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자유였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충분함을 아는 삶이었습니다. 절제는 비움을 통해 더 큰 풍요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절제 위에는 견딤(인내)이 세워집니다. 인내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능력입니다. 씨앗이 땅속에서 긴 시간을 견디며 싹을 틔우듯이 사람의 성장도, 공동체의 변화도, 사랑의 성숙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인내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을 존중하는 믿음입니다.
인내 위에는 경건이 세워집니다. 경건은 기도실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삶입니다. 식탁에서, 노동 가운데서, 형제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숲길에서, 새소리와 햇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피노물을 형제라 부르고 누이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의 숨결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경건 위에는 형제애가 세워집니다.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갑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성부에서 성자로, 성자에서 성령으로 끊임없이 흐르듯이, 우리 안에 머무는 사랑도 반드시 형제에게 흘러갑니다. 형제애는 단순한 친목이 아닙니다.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삶입니다. 기다려 주고, 품어 주고, 용서해 주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삶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인 형제성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라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입니다. 서로를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형제자매입니다.
마침내 형제애 위에 사랑이 세워집니다. 사랑은 모든 덕의 완성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꽃피고, 덕은 사랑으로 열매 맺으며, 지식은 사랑으로 빛나고, 절제와 인내도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이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존재 방식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듯이, 성자께서 성부께 자신을 돌려드리시듯이, 성령께서 그 사랑의 기쁨으로 두 분을 하나 되게 하시듯이, 우리도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삶입니다. 프란치스칸이 말하는 가난도, 겸손도, 작음도 결국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가난은 자신을 비워 사랑이 흐를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작음은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생명이 자라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매일의 삶 속에서 믿음을 선택하고, 욕망을 절제하며, 기다리고, 기도하고, 형제를 품고, 사랑하는 삶임을. 그 순간 우리의 평범한 하루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습니다. 밥을 나누는 식탁이 성사가 되고, 형제의 손을 잡아 주는 순간이 기도가 되며, 용서하는 마음이 복음이 되고, 함께 걸어가는 길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먼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처럼 살아가는 것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살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믿음은 덕으로 드러나고, 덕은 지혜를 낳으며, 지혜는 절제와 인내를 통해 성숙하고, 경건과 형제애를 거쳐 마침내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프란치스칸적으로 요약하면 내려놓고(가난), 허용하고(겸손), 함께 살아가며(형제성),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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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0973
2026.06.01 20:12
멈추지 않는 사랑의 물레방아
태초부터 하느님은 홀로 계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분이셨고,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셨으며, 그 사랑 자체로 살아 움직이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성자께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남김없이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의 기쁨과 충만함으로 두 분을 하나로 묶으십니다. 그 안에는 소유도 없고 경쟁도 없으며, 우월함도 열등함도 없습니다. 오직 내어줌과 받아들임, 그리고 다시 흘려보냄만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멈추지 않는 사랑의 물레방아입니다. 사랑은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건네지고, 받아들여지고, 다시 선물이 되어 흘러갑니다. 성부는 성자를 향해 흐르고, 성자는 성부를 향해 흐르며, 성령은 그 흐름 자체가 되어 영원한 생명의 강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을 하신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놀랍게도 이 신비는 하늘 높은 곳에만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사랑받고 있음을 믿지 못합니다. 받아들여졌으면서도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가치 없는 존재다. 나는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다."라는 목소리가 영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합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며,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비난과 자기 방어는 영혼을 좁은 감옥에 가두어 놓습니다. 우리는 풍요의 자녀임에도 결핍의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이미 샘물 곁에 앉아 있으면서도 목마르다고 울부짖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영적 여정이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믿게 되는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열매를 맺어 마침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고, 그 결실로 다른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거의 한 평생이 걸립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사랑을 얻어내야 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무엇인가를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 모든 생각을 뒤집어 놓습니다. 복음은 인간이 하느님께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신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을 얻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행하고 기도하고 애쓴다 하여도 인간 스스로는 그 거리를 메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 거리를 없애셨습니다. 육화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인간의 모든 상처와 죽음을 품으셨으며,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심으로써 당신의 생명을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심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과의 합일은 미래의 보상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주어질 상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씨앗이며, 이미 시작된 은총의 현실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속삭이고 계십니다. 너는 버려진 적이 없다. 너는 사랑받지 못한 적이 없다.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 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딸이다. 그 목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자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사실은 떠난 적도 없었음을 깨닫습니다. 길을 잃은 줄 알았지만 처음부터 하느님의 품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찾고 있던 보물이 바로 자기 안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타인을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습니다.
가득 찬 샘물이 흘러넘치듯이 사랑이 저절로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용서받았기에 용서하고, 환대받았기에 환대하며, 받아들여졌기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듯이, 성자께서 성부께 자신을 돌려드리시듯이, 성령께서 그 사랑의 기쁨으로 두 분을 하나 되게 하시듯이, 우리도 자신을 내어주기 시작합니다. 형제를 품고, 이웃을 품고, 세상을 품고, 해 형제와 달 누이와 바람 형제와 물 누이를 품으며 살아갑니다. 누구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구도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를 하느님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의 작음입니다. 이것이 가난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자유입니다. 내려가기에 높아지고, 비우기에 충만해지며, 놓아주기에 더 깊이 연결되는 삶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됩니다. 구원이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일이 아니라 이미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일임을. 영원한 생명이란 죽은 뒤에 얻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에 참여하는 삶임을. 신앙이란 하느님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이미 붙들려 있음을 믿는 일임을. 그리고 어느 날 조용히 눈을 감으면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끝없이 돌아가는 사랑의 물레방아 소리가 들려옵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사랑하시며, 성령께서 그 사랑의 기쁨으로 온 우주를 품으시는 소리. 그 사랑의 흐름 속에서 우리도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받아들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하느님 안에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내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샘물처럼 흘러넘쳐 세상 끝까지 사랑이 되어 흘러갑니다. 마치 영원히 멈추지 않는 삼위일체의 사랑의 물레방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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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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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2 05:45
- 지분이 내게 있는 걸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황제의 것은 없습니다.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황제가 있을 뿐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황제에게 자기 것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겐 선이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물질적인 선도 하느님의 것이고
영적인 선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고 죄와 죄악만이 하느님의 것이 아닌데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죄와 죄악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죄스럽게 무엇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빠득빠득 우기며 싸워야 할까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가르침이고
프란치스코도 권고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황제와 같은 사람에게
그것이 네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고 하느님이 잠시 맡긴 것이라고
가르쳐는 주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들과 싸울 것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우리야말로
황제들처럼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또 내 것이라고는 죄와 악습밖에 없다고 인정하며
물질적 선이든 성덕과 같은 영적 선이든 하느님께 다 돌려드리면 됩니다.
이것이 가난 정신입니다.
이런 가난을 사는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 소유권과 상속권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이것을 최고의 가난이라고 하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상속자요
왕이 되게 하고,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하면서도
덕행에 뛰어나게 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극치입니다.”
그런 것이고 그래야 하는데도 저를 엄밀하게 반성하면
마치 지분이 조금은 제게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제게 지분이 조금은 있는 걸까요?
여러분에게도 지분이 조금은 있을까요?
조금의 지분도 없지만 앞서 봤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죄가 있을 뿐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죄인이 있을 뿐임을 뉘우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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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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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혜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대응!
예수님 시대 식민지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어깨 힘주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었습니다.
최근 그들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마치 혜성처럼 떠올라 군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예수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유다 본산을 강력하게 성토하고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합칩니다.
머리 좋고 언변이 탁월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보낸 이유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잘 어울리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공의 적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먼저 감언이설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마르 12,14)
웬일로 이렇게 호의적인 모습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즉시 난감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세금은 인두세를 가리킵니다.
이 세금은 로마의 은화로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불과 이틀 전에 메시아로 불리셨고, 또 메시아로서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시면 백성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인두세는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가장 증오를 받던 표지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신다면, 제국에 대한 반역이며 혁명가로 오해받게 됩니다.
적대자들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로마의 적, 폭동의 선동자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지혜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대응이 놀랍습니다.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십니다.
데나리온은 세금 바칠 때 통용되던 은화였습니다.
당시 데나리온 동전에는 황제의 초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절묘한 마무리 말씀으로 위기를 넘기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유다인들이 식민지 안에서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더럽히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국가 권위와 종교 권위가 저마다 적정한 범위 안에 머문다면 양쪽 다 정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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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3-17)>
1) 로마제국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경제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실생활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로 고민하는 척 하는 것, 그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위선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드린 데나리온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라는 말씀은, 세금을 내라는 말씀도 아니고, 내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세금을 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내고,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각자 양심대로 판단해서 행동하여라.”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로마제국의 종교박해가 없었고,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로 생각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셨을까?
정확한 일은 알 수 없지만, 내셨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조사령 때문에 본적지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한 것을 생각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또 당연하게 로마법을 따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 라는 질문에서, 예수님의 재판 때 있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그러자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수석 사제들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9,14ㄴ-15).”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라는 말은, 흥분 상태에서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니라, 평소의 생각대로 한 말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2)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라는 말씀에는, “온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황제의 것은 전부 다, 황제의 목숨까지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황제 자신도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황제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면?
그러면 신앙인들은 그런 황제에게 복종하면 안 되고, 세금 내는 것도 거부해야 합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 13,1ㄴ.4ㄱ.7).”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유인으로서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 공동체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임금을 존경하십시오(1베드 2,13ㄱ.15-17).”
바오로 사도의 말과 베드로 사도의 말은 같은 가르침입니다.
인간 세상의 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따르는 일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하느님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법과 제도라면 복종하면 안 된다.”입니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를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종교인들은 정치에 간섭하지 마라.”로 해석하는 것은 독재 정권이 흔히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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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에는 늘 이런 저런 소요가 잦았기 때문에, 로마 식민 통치자들은 그곳을 통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인두세를 부과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에게 깊은 분노와 원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를 들어 갈릴래아 사람 유다는 세금을 내는 것은 곧 종살이라고 주장하며 폭력적 저항을 선동했습니다. 그의 선동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세금 문제는 당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 던져진 질문도 겉으로는 공손한 말투였지만, 사실은 함정을 파놓은 질문이었습니다. 한 고대 작가는 이를 두고 "그들은 입에는 꿀을 머금었으나 꼬리에는 독침을 지닌 벌들처럼 그분을 둘러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하시면 민중의 분노를 살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시면 로마 식민 통치자들에게 반역자로 고발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계략은 양쪽이 모두 낭떠러지와 같았기에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 딜레마 같은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화폐는 그 위에 새겨진 통치자의 초상 때문에 그의 소유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질문을 던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에게 동전을 보여 달라고 하셨는데, 이는 아주 지혜로운 대응이었습니다. 로마 화폐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들이 로마의 지배 체제에 협력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리사이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상 "이 하찮은 동전은 어차피 황제의 것이니 그에게 돌려주어라." 하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고 덧붙이십니다. 이는 곧 "너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다. 이 동전에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듯, 너희 영혼에는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다. 너희 영혼은 황제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우리 존재를 돌려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물리적인 세상에서의 관점을 훌쩍 뛰어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께 우리 존재를 돌려드린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하느님께 드려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 존재가 하느님 안에 머물며 그분의 생명을 더 풍요롭게 받기에 우리 존재가 더더욱 충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토머스 머튼의 글을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예전에도 한 번 나누어 드렸던 글일 겁니다.
– 모든 존재를 소유하시는 하느님 –
주 하느님께서는 새날의 햇살이 어린 잔디 위에 깔려 있는 이슬방울들을 비추는 곳에 현존하신다. 주 하느님께서는 홀로 당신만이 알고 계신 작은 들꽃들이 있는 곳에 계신다. 주 하느님께서는 밤이 땅 속으로 쇠하여 사라지는 순간에 홀연히 바람에 실려 지나가신다.
무한히 위대하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 자신의 순수함을 나누어주셨다. 홀로 당신만이 사랑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사랑이시다: 그분의 순수한 불꽃은 모든 것들을 존중해 주시기에 어느 것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들을 소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들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맡겨주신다. 그분은 절대로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의 소유로 취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이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취하여 파괴하지만 말이다.
그분은 모든 존재에게 그들인 바를 끊임 없이 주고 계시면서도 그들에게 감사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분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그들이 그분이 주시는 바를 받고, 사랑받으며, 그분에 의해 양육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들이 커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모든 존재, 특히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이렇게 할 때 그분은 우리를 통해 찬미 받으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바라보셨을 뿐, 그것들을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셨을 뿐, 그것들을 원치 않으셨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는 다르다. 그분의 사랑은 비-소유적이다. 그분의 사랑은 순수하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는 굶주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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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0:30 추가.
마르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던 유다인들에게 세금 납부의 문제는 그들의 신앙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세금을 낸다는 건 그가 자신들을 통치할 권한을 가졌음을 인정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건 단순히 납세라는 ‘의무’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을 심지어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이방인’을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두고 섬기는 ‘배신’이었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가는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민족주의자인 바리사이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낸다는 건 스스로 그의 노예가 되는 굴욕스러운 짓이며, 이스라엘의 유일한 주님이신 하느님께 불충을 저지르는 큰 죄라고 여겼지만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이 두려워 마지못해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반면 권력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리던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의 지배 덕분에 이스라엘이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으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처럼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입장을 지닌 두 세력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라는 자를 제거하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입니다. 군중들 앞에서 온갖 아첨을 떨어가며 예수님의 지위를 한껏 높여드린 후에, 그분께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하느님 뜻에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라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진 겁니다. 그 질문에 ‘합당하다’고 답한다면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 말고 다른 우상을 섬겨도 된다고 종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합당하지 않다’고 답한다면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역자가 되고 말지요. 어느 쪽을 택해도 입장이 난처해지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시험하려는 사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랬기에 바로 답을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달라’고 하시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이 그것을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어디 먼 곳에 가서 그 동전을 구해온 게 아니라, 자기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것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다닌다는 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들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이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미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질서 속에 녹아들어 살고 있으면서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고 ‘어불성설’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창조하시고 당신 뜻에 따라 섭리하시는 이 세상에 그분 것이 아닌 게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기에 기본적으로 세속적인 질서와 규칙들을 잘 지켜야 하지만,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나는 ‘선택의 순간’을 어떤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맞는지 틀린지, 옳은지 그른지라는 ‘문제제기’만 하느라, 정작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따르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은 게을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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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김찬선 신부님이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강론글을 늦게(?, 제 기준으로) 05:45에 올리셨습니다.
저는 5시부터 게재되기를 기다렸고 5시 35분에는 새볔미사를 참례하기 위해서 성당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성당에서 5시 55분에 핸폰으로 게재된 것을 확인하였으나, 핸폰으로 이 곳 카페에 공유하는 것도 사실 잘 모르고 또 미사준비로 그러하지 못하였습니다.(앞으로도 계속)
오늘 미사를 마치고 귀가하여 집에서 노트북으로 최대한 빨리 올린 시간이 6시45분입니다.
신부님께서 사정이 계셔서 5시 늦어도 5시반까지 올리시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기에 저는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 곳 묵상글 뜨락은 정회원이상 이시면 쓰기를 할 수 있도록, 준회원 이상이먄 댓글을 쓰실 수 있도록 자격을 하향하겠습니다.
그러하오니 이 곳에 김찬선 신부님이 공유되지 아니하였을 경우 작은형제회 홈페에지에 들어가셔서 강론글을 공유하셔서 본문에 올리셔도 좋고, 댓글 란을 이용(댓글란이 600자로 한정되기에 2-3곳을 계속이용)하여 다른 분들이 쉽게 빨리 강론글을 읽으실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김찬선 신부님이 공유되였을 경우 저는 그 외 묵상글 등을 3차 공유로 등록하겠습니다. 평화와 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