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18
3월4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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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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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2g9RvxOkz0
[서울대교구 박성준 가브리엘(잠실7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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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발 자녀에게 올인하지 마십시오!>
제발 그러지 말라 해도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부모님들을 만납니다. 자식들이 부모들의 탄탄한 미래를 위한 보험이 절대 아니다, 수십 년간 출산하고,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성장시킨 것만 해도 충분하니, 이제 각자 길을 가야 한다고 외쳐보지만, 납득을 못합니다.
사실 이 세상 어떤 동물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강아지들이 태어나고 나서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어미 개의 모성이 지극하더군요. 새끼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한 애정이 대단합니다. 먹이고, 재우고, 일일이 핥아서 씻겨주고, 다른 큰 친구들로부터 철저히 지켜주고...
그런데 한달 정도 지나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집니다. 어미의 태도가 냉정하게 돌변합니다. 더 이상 꼬마들에게 젖을 물리지 않습니다. 어미 밥그릇에 머리를 들이미는 녀석들은 가차없이 응징합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어미는 새끼들을 독립시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자신과 떼어놓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끌어안는 것도 사랑이지만 멀리 떼어놓는 것도 사랑입니다. 품에 안아 얼르고 달래며 애지중지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독립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냉철해지는 것도 사랑입니다.
다른 하등 동물들은 그것을 잘 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이 그 작업에 서툰 것 같습니다.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제 스무 살입니다. 그 정도 세월 자녀를 위해 헌신했다면 사실 충분한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인생이 있고, 부모는 부모의 인생이 따로 있습니다. 이제 자녀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가급적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안쓰럽고 안타깝더라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가 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핵심 제자들로 손꼽히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역시 자녀들을 위한 과도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전형적인 헬리곱터 형 어머니였습니다. 자녀들이 이제 나이가 충분히 들만큼 들었지만, 어머니는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후에도 말입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이천년 세월을 건너 내려와 오늘 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어머니와 두 제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너무나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 부끄러운 것은 다른 열 사도가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중에 공개적으로 노골적인 인사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인내의 소유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노발대발하면서 그 자리에서 당장 두 제자를 사도단 명단에서 제외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엉뚱한 말 하지 말고 빨리 꺼지라고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 23)
너무나 황당한 상황 앞에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크게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똘똘 뭉쳐 두 제자들 코너로 몰아넣고, 집중 공격을 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의 극치를 보여주는 제자단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시고 차근차근 당신의 노선과 신념을 다시 한번 가르쳐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의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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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k50wPEb2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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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있는 사람과 어디까지 갈지 알고 싶다면>
교우 여러분, 사순 제2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마태 20,18) 그런데 이 비장한 분위기 속에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주님께 절하며 아주 세속적인 청탁을 하죠. "제 두 아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 20,21)
오늘 저는 이 질문을 '관계의 수준'이라는 관점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원할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어느 정도 깊이인지, 즉 내가 그 사람과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은 "너는 나와 어디까지 갈 준비가 되었느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저도 사제로 살아가면서 본당에서 교우분들을 만날 때, 저도 모르게 가장 많이 던지게 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무실이나 고해소에서 누군가 저를 찾아오면 저는 먼저 묻습니다. "자매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혹은 "형제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면 그 대답 속에서 그분들이 저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저와 어디까지 동행할 준비가 되었는지가 명확히 보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물질적 이익'을 원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대방은 나에게 그저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수단일 뿐입니다. 신앙으로 치면 하느님을 내 욕망을 채워주는 자판기로 여기는 수준이죠. 이런 관계는 이익이 끝나면 관계도 끝납니다.
이런 왜곡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류학적 사례가 '카고 컬트'(Cargo Cult), 즉 '화물 숭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멜라네시아 제도의 원주민들은 하늘에서 비행기가 내려와 통조림과 옷 같은 신기한 화물(Cargo)을 내려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행기가 오지 않자, 원주민들은 나무로 비행기 모양을 만들고 활주로를 닦으며 존 프룸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원한 건 비행기를 만든 사람도, 그 문명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박스에 든 '화물'뿐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 화물 숭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이라는 존재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분의 손에 들린 '건강, 합격, 돈'이라는 화물만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물건'을 답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딱 거기까지만 가는 사이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위로와 에너지'를 얻기 위한 대상, 즉 '상담사'로 대하는 단계입니다. 아마 저를 찾아오시는 많은 신자분이 이 단계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혹은 저와의 면담을 통해 내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다시 살아갈 깨달음이나 에너지를 얻으려 하십니다.
물론 좋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상담가이시고, 사제인 저 또한 여러분의 목자이니까요. 하지만 이 관계 역시 여전히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상담사가 어떤 아픔을 겪는지, 상담사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주길 바라고, 방전된 내 영혼을 충전해주는 배터리가 되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한 상담가가 일부러 자기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내담자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상담을 받은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선생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상담가의 얼굴에 난 상처보다 자기 마음의 생채기를 쏟아내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들에게 상담가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인격적인 '사람'이 아니라, 내 감정의 쓰레기를 받아주는 '처리장'이자 방전된 기분을 채워주는 '무선 충전기'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원하는 '부부 관계'의 단계입니다. "주님, 저는 화물도 필요 없고, 제 기분 좋아지는 에너지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당신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수준이죠.
하지만 이런 사랑이 가진 치명적인 한계를 유럽의 지성들은 "Égoïsme à deux"(에고이즘 아 되),
즉 '둘만의 이기주의'라고 경고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사랑이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만 바라보며 외부 세계와 담을 쌓는다면, 그 사랑은 곧 고립되고 맙니다.
하지만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결혼의 목적이 단둘이 행복하게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녀를 낳아 관계를 확장하는 데 있듯이, 신앙의 정점은 주님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주님을 전해주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듣고 싶으셨던 대답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을 모르는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에게 당신을 전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구원의 값을 치르는 존재, 즉 '몸값'(Lutron)이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까지, 즉 죽음 너머 생명을 낳는 자리까지 가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교우 여러분,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주님의 교정을 받고 나서야 '잔'을 마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잔’은 ‘사명’입니다. 나의 ‘사명’에 함께하려는 사람이 끝까지 갑니다. 만약 나의 사명이 영원한 그리스도의 사명이라면 말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성당 안의 그리스도만을 공경하고 성당 밖에서 헐벗은 그리스도를 외면한다면, 그대는 성체를 모신 것이 아니라 성체를 감옥에 가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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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길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고속도로도 막힐 수 있으니, 돈을 더 내면 더 빨리 갈 수 있는 고속도로도 있습니다. 둘이나 셋이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는 도로도 있습니다.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일반도로를 이용해도 됩니다. 돈을 모으는 방법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은행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일반 예금이 있습니다. 입출금이 자유로운 예금입니다. 이자는 거의 없습니다. 정기 예금이 있습니다. 정해진 기간을 묶어 놓는 예금입니다. 출금이 자유롭지 않지만, 이자가 있습니다. 보험이 있습니다. 보험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연금 보험, 생명 보험, 화재 보험이 있습니다. 이런 보험은 대게 10년 이상 장기로 기간을 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금, 적금, 보험은 일반적으로 예금자의 돈을 보호해 줍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잘 아는 편입니다. 저도 이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돈을 모으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입니다. 우연히 강의를 듣다가 ‘ETF(Exchange Traded Fund, 상장지수펀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강의의 핵심은 이랬습니다. 부대찌개를 만들려면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맞게 요리해야 합니다. 시간이 많고,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없고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은 부대찌개를 끓일 수 있도록 만든 즉석 부대찌개를 사는 겁니다. 약간 비싸지만 편하기도 하고, 적어도 내가 끊이는 것보다는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을 수 있습니다. ETF는 바로 그런 원리라고 합니다. 주식을 하기에는 시간이 별로 없고, 주식을 잘 모르는 사람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약간의 비용은 들지만 그것이 편하고, 내가 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강의를 듣고 나서 ‘ETF’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4개월이 지났는데 한국의 주식시장이 6,000을 넘었습니다.
한국의 주식시장이 300% 이상 오른 적이 2번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86년에서 88년이라고 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도 있었지만, 한국의 정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도 있었고, 6월 민주화 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정부의 정책과 의지가 시장에 반영되면 주식시장도 반응한다고 합니다. 다른 한 번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 때라고 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도 있었고, 남과 북의 화해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도 정부의 정책과 의지가 시장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5년입니다.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 플랫폼 기업이 ‘AI’ 시대에 적응하며 성장하고 있고, 정부의 정책과 의지가 주식시장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거든 내 아들들에게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를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그런 자리를 원하느냐?’ 제자들은 ‘예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열 제자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영광의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잿밥에 먼저 마음을 두는 것은,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태도는 제게도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명단을 보면서 부임지의 성당을 살펴보게 됩니다. 주로 외적인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본당의 크기를 보았습니다. 신자의 숫자를 보았습니다. 본당의 재정 상태를 보았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있는지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역에 어려운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봉성체를 원하는 분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쉬는 교우들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지난 5년간의 사목 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와 청년들의 현황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뜻과 세상의 기준으로 가려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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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안동교구 김재형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구원받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물론 이 ‘구원받기 위하여’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사순 시기는 십자가의 죽음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는 때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에서 사제는 노래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원이 되는 이유는, 죄를 제외하고 인간과 완전히 같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이 모든 여정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의 죽음도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죽임까지 당하신 그분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높이 달린 십자가는, 우리가 더 낮은 곳으로 향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이정표일 것입니다. 십자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구원자 예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합시다. ‘더 낮은 곳으로! 더 겸손한 사랑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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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7-28: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다시금 예고하시는 장면을 본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인간적인 권력과 영광의 자리를 꿈꾸고 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나라에서 좌우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청하는 것은, 제자들의 내적 갈망이 여전히 세속적 기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라고 물으신다. 여기서 “잔”은 수난을, “세례”는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셨던 바로 그 고통의 잔을 말한다. 제자들은 그 깊이를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있습니다.”(22절)라고 대답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미성숙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될 것을 예언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영광의 자리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 길은 먼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이는 반드시 그분의 수난을 나누어야 한다.”(Enarrationes in Psalmos 75,11)
사실 제자들 모두는 인간적 욕망을 따라 영광을 원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라고 하시며 제자직을 가르치신다. 권위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는 으뜸이 되려는 자가 아니라, 종이 되려는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땅의 왕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땅의 왕국은 지배와 권력을 의미하지만, 하늘 나라의 왕국은 사랑과 봉사를 뜻한다.”(Homiliae in Matthaeum 65,2) 교회도 이 가르침을 이어받아, 교황을 비롯한 모든 교회 지도자의 본질적 직무를 “섬김의 직무”로 이해한다. 교회 헌장도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의 스승께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음을 기억하면서, 형제들을 위하여 서로 봉사해야 한다.”(37항)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속적 안락이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따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진정한 부활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사순 시기, 우리는 섬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참된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오며, 참된 제자직은 주님의 잔을 함께 마시는 데서 드러난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대로 크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낮아져 형제들을 섬길 때, 우리는 참된 제자가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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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침내 되살아 그처럼 되게 하리니>
마태오 20,17-28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출세와 섬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포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침내 되살아 그처럼 되게 하리니>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포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8-19)
어둠이 기어이
빛을 죽이더라도
어둠으로 살지 않고
빛으로 죽으렵니다
빛은 마침내 되살아나
어둠마저 빛나게 하리니
악이 기어이
선을 죽이더라도
악으로 살지 않고
선으로 죽으렵니다
선은 마침내 되살아나
악마저 선하게 하리니
불신이 기어이
믿음을 죽이더라도
불신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죽으렵니다
믿음은 마침내 되살아나
불신마저 믿게 하리니
절망이 기어이
희망을 죽이더라도
절망으로 살지 않고
희망으로 죽으렵니다
희망은 마침내 되살아나
절망마저 희망하게 하리니
미움이 기어이
사랑을 죽이더라도
미움으로 살지 않고
사랑으로 죽으렵니다
사랑은 마침내 되살아나
미움마저 사랑하게 하리니
거짓이 기어이
진실을 죽이더라도
거짓으로 살지 않고
진실로 죽으렵니다
진실은 마침내 되살아나
거짓마저 진실케 하리니
폭력이 기어이
평화를 죽이더라도
폭력으로 살지 않고
평화로 죽으렵니다
평화는 마침내 되살아나
폭력마저 평화케 하리니
억압이 기어이
섬김을 죽이더라도
억압으로 살지 않고
섬김으로 죽으렵니다
섬김은 마침내 되살아나
억압마저 섬기게 하리니
죽임이 기어이
살림을 죽이더라도
죽임으로 살지 않고
살림으로 죽으렵니다
살림은 마침내 되살아나
죽임마저 살리게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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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2-28)
1)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그런데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래서 ‘열두 옥좌’를 주겠다는 약속은, 사도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각자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에게만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끝까지 충실하게 따르지 않고 스스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그 ‘옥좌’를 얻지 못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즉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열두 옥좌’를 주겠다는 말씀을 듣자,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마태 20,21) <아마도 자신들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두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2)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그 옥좌’에 앉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말씀은, “내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너희도 따라 걸을 수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는 두 사도의 대답은, 표현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긴 한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저 막연하게 자신들의 희망과 각오를 나타낸 말입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나중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라는 말씀은, “사도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은, 하느님 나라에 그런 자리가 실제로 있다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뜻합니다.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당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세례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3) 두 사도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은, 다른 사도들을 자기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 것과 같기 때문에,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두 사도와 같은 명예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낮춤을 말씀하십니다. ‘섬김’과 ‘낮춤’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자신을 버려야만 진정한 섬김과 낮춤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남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고, 그 ‘낮춤’과 ‘섬김’은 ‘거짓 겸손’이(‘위선’이) 될 뿐입니다.
또, 그런 거짓 낮춤과 거짓 섬김으로 십자가를 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죄가 될 뿐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진심으로’ 섬김과 낮춤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고(요한 13,14-15),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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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존경받을 사람이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이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기를 소망하였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원하면 그것은 욕심이다. 그 욕심은 시기, 질투를 만든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이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준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한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나아가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이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이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하다.
세례성사 때 ‘마귀를 끊어버리겠다.’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된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행동한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 고백하고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한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보다 눈앞의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 하길 기원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주님, 저희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형제들을 한없이 사랑하며, 언제나 주님과 하나 되어 살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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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진정 높은 사람은>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어제 복음의 끝부분과 오늘 복음의 끝부분은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어제의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나무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죽으러 들어가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을 잡으러 들어가는 줄 알고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기득권인 데 비해 자기들은 입성하여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사람인 셈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셨음에도 수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3년이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야말로 구악을 대신하는 새로운 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높은 사람,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서번트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진정한 리더는 종처럼 조직원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일까요? 첫째와 높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일까요? 쉽게 얘기해서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말함일까요?
사실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도 섬기는 자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자들도 그러하면 그 섬김을 받는 백성이 행복하고 자신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높은 자리와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런 자리에 오르는 비결로서 서번트리더십과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너희 가운데에서” 곧 “우리 가운데에서”라고 생각지 않고 “그들 위에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백성들 가운데 있지 않고 늘 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무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무리 위에 홀로 높은 자라고 생각할 것이며, 백성을 우리라고 생각지 않고 늘 그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대영광송과 연결하여 생각해봅시다. 대영광송은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이시라는 말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아무도 홀로 거룩하거나 높지 않으며,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할 형제들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은 위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때 높은 사람의 의미도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무리 전체를 보는 사람입니다.
‘너희 가운데 첫째인 사람’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무리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물길로 치면 맨 앞에서 물살을 갈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진정 높은 사람은 무리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높이 나는 갈매기처럼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이어야 하고,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시야가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첫째인 사람도 무리를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맨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수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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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미루면서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옛날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 펀드가 아주 유행했습니다. 은행에 갔다가 창구 직원이 펀드 가입을 권하면서, “예금과 똑같은데 이자가 훨씬 많이 붙는 것 아시죠?”라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하면 무식한 사람으로 볼 것 같아서, “저도 이제 하려고 했어요.”라면서 펀드 가입했습니다.
바로 친한 신부에게 무식이 드러날까 봐 펀드에 가입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거 주식과 똑같아. 따라서 신부가 하면 안 되지.”라는 것이 아닙니까? 곧바로 해지하러 은행에 갔더니, 가입했던 펀드가 그새 하락했다고 합니다. 곧 오를 것이라는 말에, 본전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해지를 못했습니다. 그 뒤 한 달 내내 확인하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한 번만 아니라 하루 종일 수시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너무 한심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손실 20%를 보고 해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해지하자마자 이 펀드 종목이 폭등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지’라고 했지만, 저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의사결정 전문가 애니 듀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을 몇 년 동안 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을 때 최대한 빨리 접을 수 있는 능력이다. 손실을 조금이라도 빨리 줄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렇게 삶 안에서 단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더 분명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확실한 미래가 결정되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세상의 원칙과는 너무 다릅니다. 하느님이면서도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보다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다가올 경광의 날에서의 권력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제자가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들도 똑같이 권력을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완전히 다름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군림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사람, 종이 첫째가 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성공, 인정, 편안함 등의 세상 것을 단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가까워지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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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하였을(마태 20,22 참조) 뿐만 아니라, ‘진정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건만, 정작 제자들의 마음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를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높은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은 ‘종’이 되는 데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신뢰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요, 섬기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섬김 받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셨고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시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니요,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하더라도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존경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섬기면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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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피워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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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0,25-26)
36년 전 필리핀에서 신학교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다시 오신다면 지금의 교회 모습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실까 라는 질문을 신학교 교수 신부님에게 처음 들으며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어제처럼 느껴집니다.
섬기고 봉사하기보다 통제하며 군림하는 교회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지 않기를 예수님은 바라셨습니다. 교회나 공동체가 세속화되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세상을 성화시키기를 바라셨습니다. 교회나 공동체의 지도자가 통제하고 군림하면 세속적 권력은 강해지지만 본질적인 권위는 더 약해집니다.
보이는 교회나 공동체 조직의 내면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본질은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요 성령이십니다. 외형이나 조직이 강해질수록 그리스도와 성령의 활동은 약하게 됩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자주 만나 가톨릭과 동방교회의 일치를 위해 일하셨던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 1세가 하신 교회와 성령에 관한 말씀을 옮겨봅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단순한 조직일 뿐입니다. 성령 안에서 교회는 삼위일체의 친교의 표징이 됩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의 권위는 지배 권력이지만, 성령 안에서 교회의 권위는 자유의 원천이 됩니다.
성령이 없는 선교는 하나의 사상 선전이지만, 성령 안에서 하는 선교는 성령 강림절이 됩니다. 성령이 없는 전례 예절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례 예절은 과거를 현존하게 하며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이 없이 하는 신앙인의 활동은 노예윤리에 불과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거룩하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신 예수님과 함께 교회와 공동체 그리고 지도자들이 광야에서 섬김이라는 본질을 되찾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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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거룩한 새로움>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를 없애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버리자.”
예레미야만 아니라면 마치 누구의 말이든 잘 들을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예레미야를 죽인 자들이 예수님도 죽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레미야와 주님은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주님이 없어지고 나면 사제에게 가르침을 받고, 현인에게서 조언을 얻고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거라고 하지만 이 사제는 이래서, 저 예언자는 저래서 안 된다며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애초에 누구의 말도 들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듣고 싶은 말만 들었으며 도리어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과 다를까요? 다를 바 없나요?
일단은 다를 바 없습니다. 어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어제)
“너희 가운데서 높은 자가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오늘)
같으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접수하러 가시는 것으로 제자들을 착각하게 했는지 두 번이나 이미 수난 예고를 하셨고 이어 세 번째로 예고를 하셨음에도 주님의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스승님의 나라’니 ‘오른편과 왼편 자리’니 운운합니다.
그러나 역시 제자들은 다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주님을 죽이고는 자기들이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제자들마저 없애려고 들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늦게라도 주님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남은 삶에 할 바입니다. 우리도 아직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주님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 알아듣지 못한 것이 말씀의 뜻을 다 이해치 못했다는 뜻도 되겠지만 머리로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들어도 마음이 수긍하지 못하는 곧 마음으로는 종이 되거나 섬기는 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을 뜻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마음은 늘 늦됩니다.
그리고 다 했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 이해했다거나 다 실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달릴 바를 다 달렸다고 감히 얘기하는 것은 바오로 사도나 가능한 말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다 하지 못했다고 함이 좋고 프란치스코조차도 그러했습니다.
생애 말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
프란치스코가 남긴 이 말을 전한 다음 토마스 첼라노는 자기 생각을 덧붙입니다. “그는 아직 목적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삶의 거룩한 새로움을 얻으려는 뜻을 꾸준히 지니면서 늘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다.”
여기서 ‘거룩한 새로움’과 ‘늘 다시 시작’이라는 말이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 무디지 말라!”는 초대송 후렴과 겹치면서 저의 마음에 와닿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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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마태20,18ㄴ)
<예수님을 잘 따라가자!>
오늘 복음(마태20,17-28)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출세와 섬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 본질을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시면서, 이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청탁을 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닮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단순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분의 뒤를 잘 따라갑시다! 오늘도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합시다!
오늘은 울 어머님 이정숙(사비나)의 6주기 기일입니다. 누구보다도 삶으로 예수님을 믿으며 따라가셨던 분,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셨던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빌며,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 이정숙(사비나)와 이학우(안드레아)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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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생명은 우리가
움켜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용해야 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기 내어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 없는 영광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바치러 왔다.”라는
이 표현은 강요된
희생이 아니라
자발적 결단을
드러냅니다.
“많은 이들”이라는 표현은
구원이 공동체적
차원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라는
표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라는 초대입니다.
참된 치유는
우리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믿음이
깨질 때 시작됩니다.
해방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몸값은 벌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잇는
해방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사랑에서
우리는 값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을
얻기 위해 오시지
않으시고
되찾기 위해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존엄을,
상처 입은 우리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오셨습니다.
목숨을 바친 사랑 앞에서
내어주신 사랑의 깊이에서
사랑의 사람이 탄생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어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내어드려야
할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상처 많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열리는
우리 마음뿐입니다.
몸값과 목숨이
마음에서 만납니다.
마음의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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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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