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사랑받는 톱스타
아주 한결같이 한남들이 개나대면서 요즘 자꾸 여대들 들먹이며 지랄지랄하는 넘들이 많음 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여자들 넘나 병먹금 잘 하는 것 ㅋㅋㅋㅋㅋ
숙대 대나무숲에도 한남들이 자주 찾아와 지랄발광을 하는데 그때마다 숙대생들이 존나 쟈갑게 내쫓는 걸 볼 수 있음 ㅋㅋㅋㅋ
한남들 내쫒는데 좀 쟈가우면 머어땨용?
암튼 ㅋㅋㅋ숙대 얘기가 왜 나왔냐면
숙명여자대학교가 바로 황실에서 세운 최초의 민족 "여성"사학이기 때문임..!
그리고 여자도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근대 여성 사학을 세운 분이 바로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황후'라고 할 수 있는 순헌황귀비 엄씨였음.
(순헌황귀비는 황후 칭호를 받으신 적은 없음! 다만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당한 후 고종의 옆에서 황후역할을 다 하셨기 때문에 현대에서 평가를 그렇게 해주는 것인듯..)
순헌황귀비는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명성황후 사후 사실상 고종의 황후나 마찬가지였던 여성이며 영친왕의 어머니임.
위 사진이 바로 순헌황귀비의 사진임다.
보다시피 아주 미인은 아니라고들 말함. 하지만 아주 미인이 아니면 머어땨용? 내 눈엔 충분히 당당하고 기품있어 보이심!!
순헌황귀비는 사실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음.
8살에 입궐하여 관례를 치루고 정식나인이 되었는데
입궐 후 15년의 교육이 끝나면 궁녀들은 각자 처소 및 기관에 배치가 됨.
순헌황귀비는 미모가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무척 총명하고 재간이 탁월했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직접 그녀를 선택하여 자신의 시중을 들게했음.
자신의 가장 측근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이므로 고종의 눈에 띄일 일도 많았음. 그래서 일부러 미색이 없던 순헌황귀비 엄씨를 골랐으나 (이제부터 엄씨라고 섞어부를게용) 엄씨의 총명함에 명성황후도 그녀을 무척 아꼈다고 함.
엥..그런데 고종도 엄씨를 무척 아꼈음. 엄씨가 무척 총명해서 고종의 고민들도 잘 들어주었기 때문에 고종이 엄씨를 매우 총애했다고 함.
또 당대에도 박색이라고 평가됐던 엄씨지만 고종을 모시던 시종원 부경 정환덕에 의하면 선녀가 하강한 듯 하여 정신이 혼미해질정도로 미인이라고 한 걸 보면 그녀만의 아름다움이 확실하게 있던 걸로 보임.
고종이 총애하던 엄씨는 고종에게 승은을 입게 됨....
그리고 엄씨가 승은을 입어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명성황후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남
자신의 시중을 드는 궁인들이 승은을 입을까봐 일부러 엄씨를 골랐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화가 더 날 수 밖에 없었음. 그리고 엄씨는 명성황후도 특히 총애하던 궁녀였기에 기분이 더 처참했을 것 같음......
...따지고 보면 왕비들도 ㅈ같은 유교규범의 피해자아니겠음..
.? 아무튼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난 명성황후는 그 사실을 안 즉시 노발대발하여 엄씨를 궁밖으로 쫓아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죽은 후 5일만에 고종은 다시 엄씨를 궁으로 불러들임. 그 때 엄씨의 나이는 42세였음.
의지하던 명성황후가 죽은 후 고종은 어쩔 줄 몰라했음.
고종이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그만큼 상식밖으로 월권하며 안하무인으로 압박해왔기 때문임.
그때 고종에게 절실했던 것이 바로 엄씨의 총기였음.
아니나다를까. 엄씨는 고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
엄씨는 입궐하자마자 고종의 밤시중을 전담하였고 엄씨에 대한 고종의 사랑이 한성(서울)에 다 퍼질정도였음. 백성들은 국모가 죽자마자 첩을 취했다며 욕해댔고 일본은 오히려 좋아했음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엄씨는 누가 뭐라하건 어느순간 궁밖으로 나가는 것을 매일 행하기 시작함. 가마 하나에는 시중을 태우고 하나에는 자신이 타고 나가는 것을 하루걸러 하루 시행함.
도성에는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매일같이 사가에 나가 뇌물을 걷고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음.
엄씨는 궁문을 지키며 오고가는 가마를 수색하는 군인들에게 기꺼이 협조하며 돈을 두둑하게 챙겨주었고 시간이 흘러 엄씨의 궁밖 출입이 익숙해질 무렵 군인들은 더이상 엄씨의 가마를 수색하지 않게됨....!!!
1896년 어느날밤 언제나처럼 엄씨의 가마가 궁문을 향해 다가갔음. 여느때처럼 두개, 여느때처럼 군인들의 손에게는 돈이 쥐어졌고, 여느때처럼 군인들은 가마를 수색하지 않고 궁문을 열어 가마를 배웅함.
벗뜨.....!!! 이 가마속에는 고종과 황태자 이척(순종)이 타고 있었다능.....!!!
가마는 곧장 아관(러시아공사관)으로 향했고, 안전하게 아관에 도착한 고종은 당장에 파천(임금이 궁을 떠나 피신을 함)을 천명하고 일본정부가 심어놓은 친일인사들을 반역자로 선언하고 단죄를 명함.
이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을미지변 이후 조선정부를 틀어쥐고 있던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새정권을 수립함.
그래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아관에 머물러 버림 ㅠㅠ
기지로서 고종을 피신시킨 엄씨는 아관에서 모든 궁녀를 배제하고 홀로 고종의 시중을 도맡게 됨.
1897년 백성들과 신료들의 성화에 고종은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됨. 그리고 엄씨는 그 때 고종의 아들을 품게되고, 고종의 7번째 아들, 영친왕 이은을 낳게됨. 이때 엄씨의 나이는 무려 44세였음. 아들을 낳은 엄씨는 상궁에서 귀인으로, 귀인에서 순비로, 순비에서 황귀비로 책봉되어 왕비가 없던 궁에서 실질적인 왕비역할을 하게됨.
고종황제는 순헌황귀비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했으나 엄씨의 신분의 본래 평민이었고,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도에 의해 신하들이 반대하며 ㄴㄴ 함.
결국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귀비의 직책을 받는 걸로 이 문제는 정리되었는데,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후궁이었으니 실질적으로는 황후로 대우받았고, 복색도 황후의 복색이었다고 함.
순헌황귀비는 여성교육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음.
여성들의 근대화 교육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설립하심.
(사담으로 이 때문에 숙명여자대학교의 경영권의 일부를 조선 황실과 영친왕이 갖고 있었는데, 광복 후 이로 인한 소송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이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아 결국 황실 측이 패소함. 황실은 숙대 경영권을 잃게됨. 하지만 엄 귀비가 기부한 토지는 숙명여대의 소유로 인정을 받아서, 서울시가 몇 번이나 뺏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숙대가 승소함.
이 때 판결문이었던 "황실의 약속은 유효하다."가 참 인상깊었음. )
가난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 대한제국의 퍼스트레이디까지 올라가서 + 여성근대교육에도 신경쓰고 + 왕세자도 낳았는데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받는 인물이라고 생각함...영화나 드라마화되면 존잼일 것같음..!!!!
문제시 쿠우쿠우감
삭제된 댓글 입니다.
원글에서도 사진이 엑박이더라고 ㅜㅜㅜ
@Saturdays New York City 아ㅜ누르면 나오려나 했는데 안나오네ㅠ
ㅠㅠ사진이 안보인댜
와 아관파천을 저렇게 한거구나 상상도 못했어!! 진짜 총명하신 분이셨다
황실의 약속은 유효하다.. 이거 진짜 ㅠㅠㅠ휴 국뽕
와.. 멋진 여성이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