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489
■ 2부 장강의 영웅들 (145)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18장 이의총( 二義塚) (8)
오(吳)나라를 이용해 초(楚)나라 전력을 분산시킨 진도공(晉悼公)의 외교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초(楚)나라는 오(吳)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정(鄭)나라 일을 살필 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영윤인 영제까지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여름, 진도공(晉悼公)은 진(晉)나라의 위세를 널리 알리기 위해 계택이라는 곳에서
여러 군주들과 함께 회맹을 가졌고, 연이어 척(戚) 땅에서 다시 대회를 열었다.
이로써 진나라의 명성은 중원뿐 아니라 멀리 적족(狄族)과 융족(戎族)들 사이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듬해인 BC 569년(진도공 4년)에는 동북방의 융족 중 하나인 산융(山戎)이 진도공에게 공물을 바쳐왔다.
- 무종국(無終國)을 비롯한 우리 산융족들은 진(晉)나라와 화평하기를 청합니다.
산융은 북융(北戎)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제환공에 의해 토벌당한 바 있었다.
당시 산융의 중심지는 영지국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무종국(無終國)을 중심으로 결합하고 있었다.
산융(山戎)은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환공 때를 제외하고는 늘 중원을 침공하여
여러 나라들을 괴롭히곤 했었다.그런 중에 진도공(晉悼公)이 중원을 제패하고 제환공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도자로 떠오르자 지레 보복이 두려워 호피 1백 장을 싸들고 멀리 진(晉)나라 도성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주나라 왕성에서 자란 진도공(晉悼公)은 산융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품고 있었다.
그는 무종국 사자인 맹락(孟樂)이 바치는 공물을 일단 물리치고 신하들을 불러 의논했다.
"융족(戎族)을 비롯한 오랑캐들은 도무지 신의가 없소. 화평하는 대신 차라리 군대를 동원해
중원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소?"
대부분의 대부들이 찬성하는 가운데 유독 사마 위강(魏絳)만이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건 안 됩니다."위강은 진문공 때의 명신인 위주(魏犨)의 직계 후손이다.
진도공(晉悼公)이 물었다."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오?""우리 나라는 이제 막 여러 제후를 통합하여
패업을 성취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산융(山戎)을 친다면 초(楚)나라는 틀림없이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중원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모든 제후가 초(楚)나라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붙으면 지금까지의 수고는 모두 헛것이 되고 맙니다.
어찌 산융과 중원 제후들을 맞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산융의 청을 받아들여 화평하자는 것이오?""그러합니다."
"산융과 친하게 지내면 어떤 이득이 있소?"
"그들과 화평을 맺으면 다섯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들어보시겠습니까?""말해보오."
"먼저 우리 진(晉)나라와 산융은 같은 황하 북부에 위치해 있어 서로 교류하기가 매우 편리합니다.
산융(山戎)은 땅은 넓으나 척박하여 재화(財貨)가 귀한 실정입니다. 우리는 싼 값으로 그들의 땅을
매입하여 토지를 넓힐 수 있으니, 이것이 첫번째 이익입니다."
"...................!"
"산융(山戎)과 친하게 지내면 그들은 더 이상 중원 땅을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변방 백성들은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이 두 번째 이익입니다.
또한 우리가 덕(德)으로써 그들을 회유하면 군사를 쓰지 않아도 되니, 이것이 셋째 이익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오?""산융(山戎)이 우리 진(晉)나라를 섬기면 우리는 사방에 위엄을 떨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제후들은 우리를 존경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넷째 이익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북쪽을 염려할 것이 없으니 오로지 남쪽 초(楚)나라에만 힘을
쏟아부을 수 있으니, 이것이 다섯째 이익입니다.이래도 주공께선 산융과 화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위강의 조리있고 열의 있는 웅변에 진도공(晉悼公)은 감복했다.
"그대 덕분에 나라와 나라 간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소."
그러고는 산융과의 화평에 관한 일을 위강에게 일임했다.위강(魏絳)은 맥락과 함께 무종국으로 갔다.
이때 무종국 군주는 가보(嘉父)라는 사람으로 진나라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가보는 위강을 맞이하여 주변 추장들을 불러모아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했다.
진공(晉公)은 중국의 방백으로서 북쪽 산융에 대해 군사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산융(山戎)도 결코 중원을 침범하거나 약탈 행위를 하는 일 없이 서로 평화스럽게 지낼 것을 확약한다.
이 맹세를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명신(明神)이여, 그를 벌하소서.
맹약이 끝나자 산융 추장들은 온갖 토산물을 위강에게 바쳤다. 그러나 위강(魏絳)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군주를 대신해서 왔을 뿐 개인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오. 그대들의 선물을 받을 수 없소."
산융 추장들은 서로 돌아보며,"진(晉)나라 대신은 청렴결백하기가 이와 같구나!"
탄복하고는 더욱 위강을 공경했다.진(晉)나라 위세가 중원을 넘어 변방까지 진동시키자
초공왕(楚共王)은 더욱 초조해졌다.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해 죽은 영윤 영제의 후임으로
우윤 임부(壬夫)를 임명했다.
그런데 임부(壬夫)는 천성이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여러 속국들에 대해 끊임없이 뇌물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진(陳)나라가 초나라를 버리고 진(晉)나라 속국이 되기를 자청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초공왕(楚共王)은 격분하여 신임 영윤 임부를 칼로 쳐 죽이고, 그 동생 공자 정(貞)을 새로이 영윤에 임명했다.
영윤 정은 진(陳)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한수(漢水)를 건너갔다.
이때 진(陳)나라 임금은 진애공(陳哀公)이었다.
그는 초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사색이 되어 얼른 국경으로 나가 다시 초(楚)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초공왕(楚共王)은 또 영윤 정(貞)에게 지시했다."다른 나라는 몰라도 정나라만큼은 진(晉)나라에 내줄 수 없다.
그대는 북진하여 정(鄭)나라 항복을 받아오라."영윤 정(貞)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 땅을 향해 진격했다.
이 무렵, 정(鄭)나라 역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하극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주의 권한보다 신하들의 세력이 더 세진 것이었다.
이 중 특히 6경(六卿)의 세력이 강했다. 자사(子駟), 자호(子狐), 자희(子熙) 등 6경은 정권을 장악한 채
군주인 정희공(鄭僖公)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문에 정나라 조정은 늘 군신간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초나라 침공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희공(鄭僖公)은,
- 진(晉)나라에 구원을 청하자.라고 주장한 반면, 6경의 우두머리격인 자사(子駟)는,
- 항복하고 초(楚)나라를 섬깁시다.라는 의견을 내세웠다.
정희공(鄭僖公)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초(楚)나라를 섬기면 또 진나라가 와서 우리를 칠 것인데,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아예 진(晉)나라 하나를 정해 섬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주공께선 진, 초 두나라 중 어느 나라가 우리를 더 아낀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둘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고 누구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옛 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면 사람의 목숨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느 쪽이건 강한 나라와 화친을 맺으면 그만입니다. 초(楚)나라가 오면 초나라를 섬기고,
진군이 오면 진(晉)나라와 동맹 맺는다 - 이것이 우리가 살아나는 방법입니다."
다시 풀이하면 이렇다.황하(黃河)의 물은 누렇다. 그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기로 한다면
사람의 한 평생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그러므로 초(楚)나 진(晉)나라가 정(鄭)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생기기를 기다리기로 한다면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니
아무 쪽이든 상관하지 말고 쳐들어오는 쪽과 동맹을 맺자.자사(子駟)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 아무리 기다려도 이루어질 가망성이 없다.'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자사의 이 말에, 정희공(鄭僖公)은 화를 버럭 내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그대 말처럼 하면 우리 나라는 해마다 동맹 맺느라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그대들이 진(晉)나라로 가지 않겠다면 내가 친히 진나라로 가
구원군을 청하겠다."마침 그때 진도공이 회맹을 열기 위해 각 나라 군주들을 위(鄬)라는 땅에
모이게 했다. 정희공(鄭僖公)은 잘되었다는 듯 자사(子駟)와 함께 신정을 출발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이것이 정희공의 마지막일 줄이야.
위(鄬) 땅으로 향하는 도중 정희공(鄭僖公)과 자사(子駟)는 초나라의 일로 계속 말다툼을 벌였다.
정희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자사에게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 날 밤이었다.자사(子駟)는 정희공에게 당한 모욕에 앙심을 품고 심복 수하를 시켜
잠자는 정희공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였다.- 주공께선 급살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자사(子駟)는 그 길로 신정으로 돌아와 신료들에게 이렇게 발표하고 정희공의 아들 가(嘉)를
군위에 올려 세웠다. 그가 바로 정간공(鄭簡公)이다.
이때 정간공의 나이 다섯 살. BC 566년 (진도공 7년)의 일이었다.
다섯 살짜리 군주를 세운 자사(子駟)의 전횡은 전보다 더욱 극심해졌다. 말만 신하일 뿐
임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사는 자신의 심복들과 의논한 후 국경을 돌파한 초군에게 사자를 보냈다.
- 그동안 우리가 진(晉)나라를 섬긴 것은 죽은 선군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선군(정희공)은 죽었습니다.
앞으로는 초(楚)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초나라 영윤 정(貞)은 사자에게 이끌려나온 다섯 살짜리
임금 정간공(鄭簡公)을 보자 더 이상 추궁할 마음이 사라졌다.
곧 군대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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