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 나들이
1. 용 되다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몸은 거대한 뱀처럼 생겼지만 온몸에 비늘이 있고 발도 있다. 머리에 난 뿔은
사슴뿔 같고, 귀는 소처럼 생겼다. 용은 깊은 못이나 호수, 바다 속에 살면서 때때로 하늘에 올라가 바람
과 구름을 일으키므로 용은 발로 여의주를 꽉 잡고 있는 형상으로 구름과 함께 그려 진 그림이 많다.
중국의 황허 강 상류에 용문이라는 협곡이 있는데, 이곳에는 물살이 센 폭포가 있다. 잉어가 이 용문의
거센 물살을 거슬러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데, 워낙 험해서 웬만해서는 성공할 수 없
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견디고 성공하여 크게 출세하는 것을 용이 되는 것에 비유하게 된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크게 출세하여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한다.
용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이 말은 주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으로 쓰였는데,옛날에는 과거 급제가 큰 출
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꾸라지 용 됐다’는 말은 변변하지 못하던 사람이 아주 훌륭하게 성장
하여 놀라움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2. 군불과 군것질
‘쓸데없는’의 뜻을 가지고 있는 접두사 ‘군’은 여러 단어에 붙여 쓰이고 있다. ‘군말’은 쓸데없는 말, ‘군살’
은 불필요한 살, ‘군침’은 흘려봐야 소용없는 침, ‘군식구’는 없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 식구를 뜻한다. ‘군
것질’은 쓸데없는 먹을 것 또는 본래 먹을 것 말고 덧붙여 먹는 것을 뜻한다. ‘군것질’의 ‘질’은 부정적인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고 약간 비하의 의도가 담겨있다.
즉, ‘군것질’은 먹지 말라는 것,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군불’에서의 쓰임은 좀 다
르다.새벽녘 온돌의 온기가 식을 무렵 잠을 이기며 깨서 다시 장작을 넣어 따뜻하게 지피는 불이니 ‘쓸데
없다’ 기 보다는 처음에 지폈던 불에 ‘더하다’ ‘보태다’ 의 의미가 더 크다.
3. 개떡같다
먹을 것이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에 해먹던 음식 중에 ‘개떡’이라는 게 있다.개떡은 밀가루를 곱
게 채치고 남은 찌꺼기나 메밀 속껍질로 만들었다. 밀가루나 메밀가루도 아니고, 그것을 고르고 난 거친
가루로 만든 것이니 모양이인들 정성 들여 예쁘게 만들 리 없다.가루로 반죽을 만든 다음 그 반죽을 편평
하고 둥글넓적하게 대충 만들어서 쪘는데, 생김새만 못생긴 것이 아니라 맛도 별로 없었다.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는 것이다. 그래서 못생기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개떡 같다’고 하는 것
이다. 이 음식을 왜 개떡이라고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다.
하나는 겨로 만든 떡이라서 ‘겨떡’이라고 하다가 차츰 소리가 변해서 ‘개떡’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변변치 못하다는 뜻을 가진 접두사 ‘개-’가 붙었다는 설(說)도 있다.
4. 심금을 울리다
석가모니 주변에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제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는데, ‘스로오나’도 그 중 하나였다.
스로오나는 몸과 마음을 다해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깨달음의 길이 보이지 않자
조바심이 나고 지치기 시작했다.
그런 스로오나에게 석가모니가 다가와 거문고를 비유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문고의 줄이 지나치
게 팽팽하거나 느슨하면 고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수행 역시 너무 강하거나 약하지 않도록 알맞게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처님은 마음을 거문고에 비유해 제자에게 깨달음의 길을 일러 준 것이다.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마음이
움직일 때 ‘심금(心琴)을 울린다’고 하는데 ‘심금’이란 마음의 거문고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거문고
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금을 울린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감동(感動)’이라는 말도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감격(感激)’은 크게 감동했을 때 쓰는 말이다.
5. 짬밥
‘짬밥’은 군대에서 유래된 말로 보인다. 어원을 ‘잔반(殘飯)’으로 보는데, ‘잔반’은 먹고 남은 밥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남은 밥을 먹였을 리는 없고, 아마도 과거 부실한 군대밥을 비꼬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잔반’은 빨리 발음하면 ‘잠반’이 되는데, 첫소리를 되게 발음하는 경향 때문에 ‘짬반’이 되고, ‘반’은 한글
‘밥’으로 바뀐 것이다. ‘짬밥’이 된소리 ‘짬빱’으로 변형되고, ‘짬’이 다시 분리돼 ‘짬통, 짬당번’ 등으로까지
용법이 확대되게 되었다. 군대에서 만들어진 ‘짬밥’은 군대 밖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짬밥을 많이 먹었다는 것은 그만큼 군대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이고, 그에 비례해 계급이 높고 경험이 많다
는 것이다. 사회에서도 ‘짬밥’ 혹은 ‘짬밥 수’는 경험과 경력,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지위를 뜻한다. 이때의
‘짬밥’은 이제 원래의 의미인 ‘남은 음식(잔반)’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6. 선술집
‘선술집’은 ‘선술’과 ‘집’이 결합된 형이다. ‘선’은 동사 ‘서다(立)’의 관형사형이고, ‘술’은 ‘酒’이므로 ‘선술’은
‘서서 먹는 술’로 해석된다. ‘서서 먹는 술(선술)’을 파는 집이 바로 ‘선술집’이다.
‘선술집’에서는 백 잔을 마셔도 꼭 서서 마시고 앉지 못하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한다. 앉아서 마시기라도
하면 다른 패의 술꾼들이 버르장머리 없다고 시비를 걸어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 따라 ‘선술집’ 형태는 달라졌지만, 서서 먹는 방식만은 그대로 이어져,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곳곳에
술청 앞이나 드럼통을 사이에 두고 삼삼오오 서서 술을 마시는 싸구려 ‘선술집’이 많았다고 한다.
요즘은 꼭 서서 먹지 않더라도 저렴하고 서민적인 술집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선술집’이라는 말은 옛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고, 민태원 소설 ‘부평초’(1920년)에서 처음 발견된다.
그래서 이 말의 생성 시기를 1910년으로 잡기도 하나 그닥 미더운 근거는 없다. 사전으로는 ‘조선어사전’
(1938년)에 처음 올라 있다.
7. 주책스럽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책맞다’ 또는 ‘주책스럽다’ 고 한다. 그리고 이
런 실수가 거듭되면 ‘주책바가지’라고 부른다. 흔히들 술에 취해 실수할 때가 많으므로 주책을 주책(酒責),
즉 ‘술의 책임’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주책은 주착(主着)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의 주관이나 뚜렷한 주장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책맞다' 또는 '주책스럽다'는 바른 표현이
아니고, '주책없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주책없이 그저 남을 따라하거나, 남 하자는 대로 하게 되면 잘못
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실속 없이 손해를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주책이 있어야 한다.
8. 이 정도는 약과
이 말은 ‘쉽다’ ‘별거 아니다’ 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고 있다. 여기에서 ‘약과’는 제사상에 올리거나 간식으
로 먹는 전통 과자를 말한다. 약과는 부드럽고 딱딱하지 않아서 먹기 쉽기 때문에 ‘그까짓 거 별거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을 때 쓰인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약과는 조선시대에 귀한 음식이었고,뇌물로 인기가 많
았다고한다. 하지만 점점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뇌물의 품목이 더욱 비싸고 귀한 걸로 바뀌면서 금은보
화나 산삼, 녹용 등의 진귀한 물건들이 많아지면서 ‘약과’는 인기품목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인들조차 “에이! 이건 약과네~~” 하면서 별거 아닌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정도는
약과지’는 ‘별거 아니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9. 호주머니(胡주머니)
우리의 전통 옷 한복(韓服)에는 주머니가 없다. 주머니가 달린 옷은 장돌뱅이나 장사치들이 주로 입었다.
그래서 양반들이 입던 전통 옷에는 손을 넣는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공간
이 아니라, 단지 손을 감추기 위한 공간으로 쓰이므로 무엇을 담을 수 있게 막혀있지 않고 트여있었다.
그래서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따로 독립된 ‘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오늘날의 작은 손가방이라고 할 수 있
는‘염낭’ 혹은 ‘귀주머니’ 등이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 살고 있던 오랑캐 호족(胡族)들의 옷에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전투를 좋아
하는 호전(好戰)적인 종족으로서, 전쟁이나 수렵을 하려면 많은 소도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족들의 옷에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호족들의 주머니’라는 뜻으로 ‘호
(胡)주머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개화기에 외국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양복이 들어오고, 우리도
주머니가 있는 옷을 널리 입게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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