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와 함께 나란히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오른 조선인이 있었다.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다. 시상식에서 손기정 선수는 금메달리스트에게만 주어지는 월계수로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지만, 일장기를 가릴 수 없었던 남승룡 선수는 굳은 표정으로 하염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1912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남승룡 선수는 보통학교 6학년 때 전라남도 대표로 조선신궁대회에 출전하여 1만m에서 4위, 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양정고보를 거쳐 일본 아사부중학으로 전학하였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이던 1936년 일본 선발전에서 양정고보 1년 후배 손기정을 제치고 우승함으로써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올림픽 대표로 뽑혔다.
이어 그해 열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당시 대표 선수 3명 가운데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2 기록으로 1위, 조선인 선수가 두 명이나 출전하는 것을 꺼려했던 일본 육상연맹의 출전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남승룡은 2시간 31분 42초의 기록으로 3위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일제치하였기에 가슴엔 일장기가 붙어있었다. 그는 당시 금메달을 차지한 손기정을 평생 부러워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금메달이 아니라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라고 회고했다. 당시 시상대 사진을 잘 보면 손기정이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는 가운데, 남승룡은 어떻게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남승룡은 일장기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
팽생 태극 마크를 달고 뛰길 원했던 그는 광복 이후인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12위의 성적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후 1947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를 지내고, 전남대 교수로도 활동했다. 2001년 2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