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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FLY KORAIL★인천 입니다.
경부고속선 2단계 시승 & 답사기는 잠시 쉬어가고,
밀렸던 거 하나 풀어보려고 합니다.
올해 2월, 디젤전기기관차 2001호를 마지막으로 '한국의 철도근대문화유산' 연재를 마치면서
새로운 철도 문화재가 생기면 답사하고 연재를 올리겠다고 약속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8월 말, 2년여만에 새 철도 등록문화재가 지정되었는데 바로 전차 381호였습니다.
2008년 10월 중순 용산 철도병원 본관의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1년 10개월만이었습니다.
전차로서는 두 번째 철도 문화재가 된 전차 381호에 대한 이야기 들어가겠습니다.
연재 방식은 기존에 답사했던 59곳의 철도 문화재에 대한 글과 같습니다.
다만, 전차 옆에 있는 전차 안내문이 있는 안내판 옆으로 전차 터치스크린 안내기가 있는데, 터치스크린 안내기에
있는 메뉴별 설명 문구를 거의 모두 담는 관계로 사진을 보시기 전 전차에 대한 설명 문구가 매우 길어지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사진의 경우 연재를 했을 때 당시 20장까지만 올릴 수 있도록 제한되어서 20장을 채워 올렸고 지금은
50장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만 그동안 20장을 올렸던 전통(?)을 이어받아 20장 안에 최대한 엑기스를 담아 올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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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1일과 9월 25일 두 번에 걸쳐서 방문했다.
6월 말 무렵 엄복동 자전거 등과 함께 문화재 등록예고를 거쳐, 8월 24일에 지정되었다. 지정을 맞아 가까운 주말에
방문하려 했으나, 방문하려 할 때마다 비 날씨가 예보되었고 또 스탬프가 새로 생긴 곳을 수집하는 것을 챙기느라
좀 늦어졌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지 않으려하는 편으로, 그동안 답사하면서 날을 잡을 때 날씨를 고려해왔었다.)
처음 9월 11일로 잡았을 때 비가 내릴지 말지 불안한 가운데 일단 없는 것으로 나오자 집을 나서 전차 381호가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빗방울이 쏟아졌는데, 전차 381호에 도착하였을 때 비가 내리다 멈추었고 그 사이에 외부을 조금 자세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내부가 개방되어 들어가려 했으나 갑자기 비가 다시 내리자 내부 개방을 담당하시는 분이 문을 잠그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비도 내리고 있었고 전차 381호 첫 번째 답사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 뒤로 주말마다 기회를 잡았지만 그 때마다 비가 훼방을 놓았고 두 번째 시도는 9월 25일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날은 다행히도 날씨가 매주 좋았다. 도착해서 전차 안내판을 읽고 전차 외부 일부를 찍은 다음, 전차 내부를 답사하는
순으로 답사를 했다. 답사하다가 다 보지 못한채 개방 시간이 다 되어, 나가서 전차 안내판 옆 전차 터치스크린 안내기
의 메뉴를 모두 누르며 안의 설명들을 모두 읽고 최대한 잘 보일 수 있게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나머지 외부 일부를 찍고
다시 개방 시간이 되자 들어가서 못 본 부분을 다 본 후에 나왔으니, 전차를 답사했던 시간은 총 2시간 26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009년 6월 27일 철암역두 선탄시설에서 2시간 30분여분를 답사한 이래 철도 문화재 두 번째 최장 답사 시간을 기록했다.
국립서울과학관에 있는 전차 363호와 비슷한 시기에 도입되었고, 차량 방식도 동일한 반강제(반은 철제, 반은 목재로 제작했다
해서 반강제라고 한다.) 보기(Bogie-이것은 당시 전차의 형식 중 하나)로 운행을 중단한 것도 거의 동일한 시기였다.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전시되었으되 사실상 방치 상태로 있다가,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박물관 앞 야외에 부지를 만들어
전차를 이전시킨 뒤에 보존처리를 거쳐 일반에 공개, 전시되고 있다.
전차 위에 지붕을 얹고, 관람 시간 내 상시 개방은 하였으나 내부 훼손이 심각했던 전차 381호와 전차 363호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나름 전차 운행 당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력을 기울였던 모습이 발견된다.
도색에서 운행 당시의 상부(창문 부분)- 연 베이지색 도색, 하부-진 초록색 도색을 적용했고, 앞 뒤에는 맨 위의 행선지 롤지와
중간의 운전실 창문, 아래의 차호와 등이 있었다. 내부의 경우 주간제어기, 신호종, 브레이크. 브레이크 압력기 등 운전 기기를 원형대로 복원, 운전 기기 앞에 유리 벽으로 막아 훼손되는 것을 막고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였다. 유리 벽에는 각 운전 기기에 대한 설명도 붙여두었으며, 명칭의 경우 한글, 영어, 한자를 병기했다. 의자 뿐만 아니라 천장 손잡이와 창문 사이의 전차 에티켓 문구, 전차 운전자의 모토 안내 문구, 창문 위의 옛날 광고와 정부 계도문 등이 사실상 재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전차 운행 중단 직전의 1960년대 전차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전차 안과 밖에는 각각 지각을 하게 되고 도시락까지 놓고 가게 되어 낭패를 본 듯한 표정을 지은 지각생 학생들과 학생이 놓고온 도시락을 들고 와서 배웅하는 어머니와 동생의 조각상을 '전차와 지각생' 주제로 설치했다. 전차 내부의 계몽문구와 광고, 내. 외부의 조각상을 통해 전차 시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전차 노선도도 창가 위 출입문에 붙여져 있었다. 전차 앞 안내판에 있는 노선도를 퍼온 것이나, 당시 어느 노선을 운행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자원봉사자 한 분이 전차 내부를 개방하는 것과 개방하는 동안 내부를 지키는 것을 담당하시고 계시어, 전차가 낙서나 손댐으로 인한 훼손이 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전차 앞부분 옆에는 안내문이 한, 영, 중, 일어 동시 표기되었고,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시내 전차 안내도가 있었다.
안내문 옆 터치스크린 안내기에는 전차의 소개, 전차의 역사와 운행 후 모습과 사람들의 반응과 전차와 관련된 사고 이야기, 전차 차량 변천사, 전차 보존처리과정, 일제강점기 서울 도심 주요 지점을 전차가 달리고 있는 상황으로 가정한 전차 가상체험 등을 안내하고 있었다.
전차에 대한 모든 것을 안내기와 안내판으로 알려주고, 전차 차량 외관과 내부는 운행 당시 모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보여주고 있어 전차 답사를 하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라 생각된다. 전차 전시에 대한 준비와 전시 후 관리에 대해서도 합격점을 줄만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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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381호(電車 381號)
○ 제조시기 : 1930년경
○ 운행기간 : 1930년경~1968년 11월 29일
○ 제 조 사 :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일본 나고야)
○ 제 원 : 길이 13.7m, 너비 2.4m, 높이 3.2m, 중량 18t
이 전차는 1930년경부터 1968년 11월 29일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하였다. 서울에서 전차운행이 처음 시작된 날은
대한제국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7일이었으며, 운행 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였다. 이후 전차 노선은 신설되고 연장되면서 급속하게 늘어났다. 전차는 1960년대 초반까지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버스, 자동차 등 대체교통수단의 발달로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버스와 자동차 운행에 오히려 방해가 되자 서울시에서는 1968년 11월 29일 서울 시내에서 전차 운행을 일제히 중단하였다. 이 전차는 현재 국립서울과학관에 전시중인 363호와 함께 서울에 마지막 남은 2대의 전차 가운데 하나다.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2008년 1월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온 후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 복원처리 과정을 거쳐서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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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구조
○전차(電車)란?
공중에 설치된 전선(電線)으로부터 동력을 받아 도로 위에 부설된 궤도 위를 달리는 전동차를 말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교통수단으로 등장하여 1899년~1968년 11월까지 운행하였습니다. 전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환경오염이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속도가 느려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전차 외부 들여다보기
집전장치(集電裝置, Bugel)
전차의 지붕 위에서 전기를 받아들이는 장치입니다.
보기(Bogie) 대차
바퀴부분인 대차와 차체가 축으로만 연결되어 곡선 운행시 매우 안정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전차 381호는 반강제대형보기차라는 차종입니다. 오늘날의 전동차는 모두 철제로만 만들어진 것에 비해 반강제 즉, 차체의 반은 철제로 반은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필자 주) 전차 터치스크린 안내기의 '전차 내부 들여다보기' 설명문은 전차 내부의 운전 기기에 대한 설명문과도 많이 겹치는 것도 있어 운전 기기에 대한 사진을 올리면서 전차 내부의 운전 기기에 대한 설명문을 올리는 것으로 대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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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역사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조선에는 서구 근대문물들이 물밀듯 들어와 당시 조선 사회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전차는 유일한 도시대중교통 수단으로서 서울의 도시질서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또한 도보에 의지하던 서울시민의 생활방식을 빠르게 변화시켰으며, 생활영역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차, 서울을 달리다!
서울의 전차는 1899년 5월에 처음 개통한 후 1968년 11월에 운행이 정지될 때까지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였습니다. 전차는 1950~60년대에 버스, 자동차 등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거의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었으며, 근현대 대중교통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 1887년 전기(電氣)의 도입
전기는 전차가 달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것은 1887년 3월,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의 점등식에서였습니다. 이후 전차가 달리는 종로 거리에도 점차 가로등이 설치되었습니다.
○ 1898년 고종황제의 홍릉행차와 전차 도입 결정
전차의 도입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는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있는 청량리에 자주 행차하였고 매번 거액의 비용을 들였다고 합니다. 이를 본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H. collbran) 등은 고종황제에게 전차를 설치하면 행차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능행이 없을 때에는 대중교통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설득하였습니다. 이미 근대 문명의 편리함을 체험한 고종은 전차의 도입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결국 콜브란은 황실과 공동합자를 통해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전차 개통을 위해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궤도를 설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1899년 전차의 개통
1899년 5월 17일(음력 사월초파일)에 개통된 전차는 철도와 더불어 근대화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최초의 전차 차량은 황실용 귀빈차 1대와 승객 정원 40명의 개방차 8대가 마련되었으나, 정작 고종은 전차가 상여를 닮았다고 하여 이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 전차의 운임(요금)과 운행 방식
초기 전차의 구조는 앞과 뒷부분은 막힘없이 의자만 놓여 있는 개방형이고 중간에는 유리창이 달린 객실이 있어 반개방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임(요금) 또한 상등석 3전(錢) 5푼(分), 하등석 1전 5푼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당시 물가에 비해 운임(요금)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습니다.
운전사는 일본인 경력자를 채용하고 한국인 차장을 채용하였습니다. 전차 정류장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고, 타고 싶은 사람이 손을 흔들거나, 내리고 싶은 사람이 말만 하면 아무 곳이나 정차하였습니다. 또한 전차 속도는 매우 느려 운행 중인 전차에 뛰어 올라타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사고도 많았다고 합니다.
○ 1909년 일본에 팔린 대한제국의 전차
1909년 한성전기회사(후에 한미(韓美)전기회사)가 일한와사주식회사(후에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매각됨으로써 전차는 일본회사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 1929년 일제강점기의 전차사업 호황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급증함에 따라 전차 안은 그야 말로 "교통지옥"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부(京城府)에서 부영(府營)버스를 운행하기 시작하였고, 경성전기주식회사[(주)경전電氣]는 1929년경 일본에서 반강제보기(Bogie)차를 여러 대 수입하여 운행하였습니다. 이 때 381호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주)경전은 부영버스를 매입하여 대중교통수단을 독점하며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 1945년 광복 후 전차운행의 쇠퇴
1945년 광복 이후 서울의 시내교통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급격한 인구의 증가와 사회질서의 혼란 등으로 전차는 점차 시내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잇달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차량과 궤도는 크게 파손되어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었던 전차는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1950년 전차 운행 중지론
한국전쟁 이후 서울은 빠르게 재건되었고, 도시공간은 이전보다 더욱 확대된 것에 비해 전차 노선은 더 이상 증설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전차에 비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버스의 이용이 점차 증가하였고, 전차는 계속되는 재정적 적자와 차량의 노후화, 느린 속도로 인한 대중교통의 방해 등을 이유로 전차 운행을 중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 1966년 서울시의 전차 사업인수
전차운행 중지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1966년 한국전력주식회사(옛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전차운행 운영권을 서울특별시로 이전하였고, 서울시는 단계적으로 전차 운행 중지를 추진하였습니다.
○ 1968년 전차의 운행 정지
1968년 11월 29일 자정, 마지막 운행을 끝낸 서울시내 모든 전차들이 일제히 운행을 중단하였고, 뒤이어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서울시내의 대중교통 수단의 주역은 버스와 지하철이 대신하게 되었고, 70 여년간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던 전차는 서울에서 사라졌습니다.
전차와 사람들, 그리고 사건사고
○ 장안의 명물이 된 전차
전차가 처음 서울 거리를 달리자 전차에 대한 호기심과 인기는 매우 폭발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차를 구경하느라 거리를 가득 메워 전차가 여러 번 멈춰 섰을 정도였고, 한번 전차를 타면 하루 종일 내리지 않고 전차 타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전차 개통 초기에는 전차를 대중교통으로 이용하기보다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온 사람들 중에는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있다고 할 정도로 전차는 신기한 문명의 이기(利器)였습니다.
○ 최초의 교통사고와 전차소각사건 <1899년 5월>
전차운행에 대한 계몽이나 교통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전차가 개통되었기 때문에 개통 10여일 만에 최초의 교통사고이자 최대의 불상사라 할 수 있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처음 사람들이 가졌던 전차에 대한 경외심은 점차 가뭄을 전차 때문이라 생각하여 원망으로 변해가고 있던 때에 마침 종로거리에서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당황한 전차 운전사가 전차를 그냥 출발시키려 하자 분노한 아이의 아버지와 군중들이 전차를 부수고 불을 질렀으며, 뒤이어 오던 전차까지 전복시키고 불태웠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운전사들은 신변의 위험을 이유로 귀국해버렸고, 이후 전차 운행은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 운전사 8명을 데려와 운행이 정지된 후 약 3개월 여만에 차량마다 방호기(防護機)와 대경종(大驚鐘)을 달고 운행을 재개하였습니다.
○ 서십자각 철거사건 <1923년 9월>
1923년 10월에 열리는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의 교통 편리를 위해 영추문 바로 옆으로 전차노선을 개통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전차 궤도 길목에 있던 경복궁의 서십자각이 헐리게 되었고, 동십자각은 짝을 잃었습니다.
○ 경복궁 영추문 담장 붕괴사건 <1926년 4월>
1926년 4월 28일자의 여러 신문에 전차로 인해 영추문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렸습니다. 영추문 바로 옆에 놓인 궤도를 달리던 전차들로 인한 진동 때문에 경복궁 영추문 담장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 때 어린아이가 무너진 담장에 깔렸다가 기적같이 구출된 사건입니다.
○ 진명여고보(進明女高普) 전차 전복 사건 <1929년 4월>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의 전차에 의한 교통사고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사고는 이른바 진명여고보(進明女高普) 전차 전복 사건이었습니다. 1929년 4월 22일, 전세를 낸 3대의 전차에 나누어 탄 여학생들이 청량리 홍릉으로 학교 설립자인 순헌귀비릉(純獻貴妃陵)으로 참배 겸 꽃놀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전차 중 한 대가 적선동 서십자각 급커브길에서 3, 4학년 여학생들을 가득 태운 채 운전사의 부주의로 전복하였습니다. 진명여고보 여학생들은 대부분 상류층 자녀들이어서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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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1일에 방문하였으나, 내부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나가면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부터는 2010년 9월 25일 2차 답사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전차 맨 앞, 뒤 부분 운전기기에 대한 설명문입니다.
① 주간제어기(主幹制御器, Master Controller)
전차의 속도를 조절하고 차량을 정지시키거나 전. 후진 등의 방향을 전환하는 기능을 한다. 좌측의 큰 레버를 돌려 전차에 공급되
는 전류를 제어하여 속도를 조절하고, 우측의 작은 레버를 밀고 당김으로써 전진, 후진 등의 방향을 전환한다.
② 신호종(信號鐘, Signalbell)
차장 또는 운전사가 차량이 정지하거나 출발할 때 신호종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땡, 땡, 땡' 소리로 신호를 한다.
③ 브레이크. 브레이크 압력계(制動機, Brake. 制動機壓力計, Brake Manometer)
브레이크의 레버를 좌우로 밀어 차량을 정지시키며, 브레이크 압력계는 정지시 적정 압력을 표시한다.
*전차의 변천사는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될 것이라 생각되어 생략하겠습니다.
전차 381호 복원 과정
전차 381호 복원. 보존처리 과정
○전차 381호는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에서 제작되었으며, 1930년경에 수입되어 1968년 11월까지 실제로 서울시내를
달렸던 전차입니다.
서울시내의 전차운행이 중지된 후 대부분의 전차들은 폐기처분되었지만, 다행히 381호는 (주)한국전력에서 보관하다가 어린이대공원에서 전시되어왔습니다. 이후 2007년 12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인수하여 복원. 보존처리작업을 거쳐 원형을 복원하였습니다.
전차 381호는 40여년의 운행기간 동안 탑승정원을 늘리기 위하여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습니다. 이번 복원 보존처리 과정에서는
1930년대의 초기 모습으로 복원하기에는 전차의 구조적인 안전문제나 변형 속에 남아있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변천사적인 면을 고려할 때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폐차 당시의 전차 형태를 유지하면서 제작도면 등의 복원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 보존처리 전
보존처리 작업 전의 모습으로 차체 내. 외부 모두 상태가 심각하였습니다.
2. 레일설치
현재 위치로 전차를 옮기기 위해 땅을 고른 후 광화문광장에서 출토된 침목과 레일을 복제하여 설치하였습니다. 그 위에 아스콘을 깔아서 60년대 전차 레일을 복원하였습니다.
3. 차체하부복원
전차를 옮기기 전 임시보관 장소에서 하부보존처리작업을 먼저 실시하였습니다. 하부 철제의 부식된 부분을 제거하고 녹슬지 않도록 안정화처리를 중심으로 작업하였습니다.
4. 전차이전
하부 보존처리를 마친 전차를 조심스럽게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5. 차체복원
- 전차 이전 후 차체 외부도색 복원 작업을 실시하였습니다. 복원하고자 하는 색상의 페인트를 선별하여 성분과 색차 분석을 통해
제작한 재료로 전차 외부의 원래 색상을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녹전환제를 도포한 후 코팅제를 통해 재부식을 방지하는 작업도 이루어졌습니다.
- 전차 지붕의 복원은 상단 목조구조물 복원작업과 방수천 복원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차체 내부의 철제 프레임은 녹전환제를 도포하여 부식 방지 처리를 하였습니다.
- 실내의 목재 부분은 나무의 종류를 분석한 결과를 근거로 부식된 부분을 제거하고 같은 재료로 교체. 복원하였습니다.
- 집전장치(뷔겔)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국립서울과학관 전차 363호의 것을 그대로 복제하였습니다.
- 속도제어기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복제하였습니다.
6. 보존처리 완료
- 실내 천정과 전등은 일본 보존차량의 조사결과를 근거로 재부착하거나 복제하여 설치하였습니다.
- 실내 도색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96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계몽문구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복원하여 60년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좌석은 제작도면을 근거로 팔걸이와 쿠션을 설치하였습니다.
찾아가시는 길)
저의 경우 광화문광장으로 나와서 광화문 반대방향으로 틀어서 가다가 큰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쭉 걸어가서 서울역사
박물관으로 갔습니다. 광화문역 7번 출구로 나와서 가는 것이 제일 가까운 편입니다. 다만 7번 출구가 광화문광장 방향으로 나 있는데 나오시자마자 쭉 가시지 마시고 반대로 틀어서 바로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가신다음 쭉 걸어가셔야 서울역사
박물관입니다. (7번 출구 : 초록색 원, 전차 381호 지점 : 노랑색 원, 광화문역~전차 381호 가는 길 : 주황색 표시)
전차 381호의 외부은 서울역사박물관 바깥에 있으므로 언제나 보실 수 있지만, 내부는 박물관이 여는 시간 동안, 몆 회에 걸쳐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10~11시, 12시~13시, 14시~15시, 16~17시에 개방하고 있고, 월요일은 휴관일이라 내부를 보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나 눈 등이 내릴 때나, 기타 관람이 불가능한 상황에 내부 관람을 제한한다고 하니 내부를 보신다면
가시기 전에 날씨를 잘 챙겨보시고 서울역사박물관(02-724-0274)에 전화하셔서 개방 여부를 알아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전 문의의 경우 출발 전과 박물관 도착 직전 두 번하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박물관과 야외가 탁 트여있고 입장료는 전혀
없습니다. 날씨만 잘 살펴보시면 될 것입니다.
전차 381호 답사로 한국철도 문화재 전체답사 2차 완료를 이루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 옛 나주역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등록문화재인 철암역두 선탄시설보다
더 빨리 도지정지방문화재로서 지정되어 옛 서울역사 다음으로 전국 두 번째로 철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정상 지금 가지 못하고 내년 초 겨울 내일로 하면서 나주를 찾아가서 답사를 하게 될 것이 유력할 것 같습니다만,
옛 나주역사로 '한국의 철도근대문화유산 61'로 찾아뵙는 것은 내년 2월말이나 3월초가 될 것 같네요. 내년 초까지
또 새로 지정되는 철도 문화재가 없는 이상, 옛 나주역사가 한국철도 문화재 전체답사 2차 완료를 이룰 곳이 될 듯
합니다.
내년 초에 다시 연재할 것을 기약하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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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울시내를 달리던 전차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