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새 예루살렘 도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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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동강의 모란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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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둘로 나뉜 산정현교회는 공산정권의 박해 아래 더욱더 힘든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김일성의 친척 강량욱 목사의 회유 아래 너무도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가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면서 타협의 길을 걸었다. 또다시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배도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한 번 무너진 교회는 너무도 쉽게 배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왜 영광스런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이 이렇게 공산당의 말 발굽 아래 놓여야 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인간의 차원을 넘어 거대한 구원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에 맡길 뿐이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를 위해 바치는 믿음의 사람을 모델로 세우셔서 구원 역사의 모델로 삼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른다.
일제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 온 산정현교회는 이 거룩한 섭리를 거부하지 않고 또다시 순결한 신부가 되어 그 일을 감당했다. 그것은 노회 가입을 찬성한 형제자매이든 이를 반대하던 이들이든 김일성 공산정권에 편승하는 조선그리스도연맹 가입을 끝까지 거부하고 교회 탄압에 용기 있게 맞선 것이다. 전자는 이북5도연합노회를 통해, 후자는 독노회 결성을 통해 자신들의 남은 힘을 결집, 공산정권에 맞서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갔다.
교회가 나뉘고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더 이상 교회가 존립할 수 없을 때까지 불과 2년 4개월 동안 두 산정현교회는 순결한 신부가 되어 순교자의 삶을 걸어갔다. 1948년 2월 11일 그 추운 겨울 양재연 장로의 평양목장 2층으로 예배처소를 옮긴 산정현교회는 심을철 전도사를 강사로 연속 두 주간 부흥사경회를 열어 온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비록 산정현교회 건물을 양보했지만 신앙의 열기는 대단했다. 몇 개월 간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산정현교회는 평양 상수구리에 넓은 대지를 구입하고 예배처소를 옮겼다.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기선 목사 아래 방계성, 최동려, 김정덕이 남자 전도사로, 윤경패와 이재은이 여자 전도사로 부임하여 산정현교회를 섬겼다. 이기선의 리더십 아래 산정현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김정덕은 이렇게 증언한다: 평양산정현교회는 평양목장에서 몇 달 동안 예배를 드린 후 평양 중심지인 상수구리(上水口里 63)에 약 1천여 평의 대지 위에 1백여 평 되는 건물을 구입하여 새로이 발족하게 되었다. 그때에 평양산정현교회의 교역자로는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방계성 장로와 최동려(崔東麗), 김정덕(金正德) 전도사가 있었고 여 교역자로는 윤경패(尹庚貝)와 이재은(李在恩)씨가 있었다. 그때에 특이한 것은 남 교역자(개척교회 전도사 및 사찰까지 포함)들은 사례금 책정을 동일하게 지급하고 여 교역자는 여 교역자대로 동일하게 지급한 것은 한국교회에 역사상 처음으로 되여진 일이다. 이것도 역시 이기선 목사와 방계성 장로가 얼마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는가를 입증해 준다. 그러기에 산정현교회는 날로 부흥되었고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진실한 주의 종들이 이기선 목사의 감화를 받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혁신복구파 산정현교회가 구입한 교회 대지는 장대현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숭현여학교 건물이었다. 1천여 평의 넓은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를 이전한 후 1948년 8월 14일 그 동안 산정현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겨 온 양재연 집사와 장기려 집사의 장로 장립식을 거행했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이기선 목사는 평양노회에 가입한 산정현교회와 달리 노회 가입을 반대하고 1948년 11월 14일부터 1주일 간 평북노회 주최로 개최된 평북제6노회 교역자 퇴수회 강사로 청빙받아 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를 따르는 황해도, 평안도 지역 30여 교회를 규합 1949년 5월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소위 “혁신복구파”로 알려진 이들은 혁신에 관한 3개항과 5개항의 복구내용을 천명했다. 1938년 신사참배 이전의 장로교 헌법과 신앙노선을 복구하여 장로교 정통성을 계승해 나간다는 의미였다:
1948년 가을에 공동의회가 평양산정현교회에서 모이게 되었고 1949년에 신의주제6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여 1938년 신사참배 이전 헌법과 신앙노선을 그대로 복구할 것을 선언하게 되니 이것이 세칭 복구파(復舊派)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들은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혁신복구의 필연적 사실’이란 책자도 동시 발행하여 대외에 선포했다.”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면서 정통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신사참배 결정 이전의 순수한 장로교 전통을 계승하면서 공산주의 치하에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기독교연맹에 가입한 교회들과 공산정권으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다.
1949년 5월 독노회가 조직된 이후 공산정권의 박해는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기독교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들은 존립 자체가 힘들었다. 1950년에 접어들어 북한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무너져 내렸다.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혁신복구파가 공산정권에 과감하게 맞서면 맞설수록 박해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산정현교회는 북한 공산정권으로부터 강한 핍박을 받아 방계성을 필두로 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차례로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기독교도연맹에 가입된 목사, 장로들과 공산당들은 이기선 목사를 중심한 독노회를 가일층 핍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는 참된 성도들의 피눈물 나는 선한 싸움이 계속되던 중 1949년 12월 27일 평양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던 방계성 목사를 공산당들이 납치해 갔다. 그리고 이어서 문수리교회 김은신 전도사, 감북교회 김세순 전도사를, 1950년 봄에 심을철 목사 등을 6?25 전후하여 납치해 갔다.
방계성이 구속된 후 혁신복구파 독노회 소속 장로들이 나와 설교했다. 방계성이 구속된 뒤에도 적어도 5, 6백 명의 성도들은 계속해서 산정현교회를 섬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방계성에 이어 주영진, 이기선, 김은신, 김세순, 심을철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들이 신앙의 순결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공산정권의 회유와 타협을 거부하자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되어 순교의 행렬이 이어진 것이다.
평양노회 가입을 지지했던 남아 있던 산정현교회 교우들도 공산정권과 싸우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양노회에 복귀한 산정현교회는 지송암 목사가 잠시 섬기다 1948년 3월 김철훈(1905-1948) 목사가 부임하였다. 철저한 민족의식과 나라 사랑이 몸에 배어 있는 김철훈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부임할 당시 북한의 공산정권은 기독교연맹을 통해 기성교회를 회유하고 말살하려는 계획을 용의주도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그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교회 탄압이 가중되자 김 목사에게도 공산당의 어용단체인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할 것이 강요되었다.” 하지만 김철훈은 오히려 김진수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북5도연합노회의 중심 인물로 참가하여 공산당과 용감하게 맞섰다. 공산정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을 공박하는 설교를 계속했다. 1949년 6월 25일 김철훈은 아는 전도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다 공산당에게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으며 이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철훈 목사가 구속된 뒤 백인숙은 그의 부인 연금봉 여사와 숙식을 같이하면서 아픔을 공유했다. 목자를 잃은 데다 북한 공산정권의 계속되는 핍박으로 이북5도연합노회에 속한 산정현교회의 교세는 심히 줄어들었다. 김철훈 목사의 뒤를 이어 황해도 출신의 정일선(1883-1950) 목사가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산골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 오던 정일선은 해방이 되자 장연읍동부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다 산정현교회로 부임받은 것이다.
1950년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은 절정에 달했다. 1950년 3월 30일 강량욱은 김익두를 앞세워 과거 일제가 했던 것처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도연맹 총회를 평양서문밖교회당에서 개최케 했다.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하는 이북5도연합노회 산하 전체 교회를 기독교연맹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증경 총회장 김익두가 사회를 보았고, 공산당 강량욱이 설교했다. 강량욱은 “오직 너희만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나느니라.” 하면서 공산정권에 설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 예스, 노를 명백히 하라고 협박했다. 이날 기독교도연맹 총회는 북한의 모든 교회들을 기독교연맹에 가입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한국교회는 1938년 9월 제27차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했던 바로 그 장소, 평양서문밖교회에서 또다시 부끄러운 결정을 내렸다. 과거 홍택기가 했던 그 역할을 김익두 목사가 대신했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것이 전혀 없었다. 무대의 배경, 등장인물, 방식, 주제, 그리고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들이 똑같았다. 이날 총회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아니한 교직자는 제명하기로 가결하고 정치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라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앞서 기독교도연맹은 1950년 4월 장로교 평양신학교와 감리교 성화신학교를 강제 통합시켜 기독교신학교로 개교하고 김응순을 교장에 임명했다.
산정현교회가 기독교연맹 가입을 끝까지 거부하고 공산정권에 용기 있게 맞서자 김일성 공산정권은 6?25사변을 앞둔 어느 날 산정현교회 예배당을 적산가옥으로 처리하고 교인들을 교회에서 몰아냈다. 그토록 차지하려는 그 아름다운 건물이 박해자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괴뢰군의 군화소리가 산정현교회 안에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김일성 공산정권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성전을 아랑곳없이 자기네의 정치의 도구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평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산정현교회는 또다시 극심한 제2의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1940년 산정현교회가 폐쇄되던 그때보다 더 혹독한 시련이 닥쳐 온 것이다. 이날 백인숙 전도사는 “교인들을 모아 놓고 이 땅에 다시 찾아온 무서운 박해를 내다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런 가운데 정일선 목사와 산정현교회는 예배처소를 유계준 장로의 집으로 옮기면서도 기독교연맹 가입을 끝내 반대하며 공산정권과 기독교도연맹 가입을 거부했다. 교회가 하나 되어 생명 내걸고 공산정권을 반대하자 산정현교회에 대한 핍박은 더욱 극에 달했다.
북한 공산당이 자기네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사변 직전 평양시내에는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평양역에는 쌀가마니를 만재한 화차가 연거푸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심야에는 검은 열차가 무엇을 실었는지 쉴 새 없이 남으로, 남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평양 거리는 살벌했다.”
백인숙은 거룩한 부르심을 의식한 듯 자신의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 6월 24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정일선 목사가 공산당에 체포되어 평양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 순교를 준비했다. 먼저 자기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는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교회에 나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제목으로 새벽기도를 인도한 후 집에 기다리고 있던 내무서원에 체포되어 며칠 후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순결한 신부 동정녀 백인숙은 토마스가 순교한 평양에서 다시 자신의 생명을 바쳐 거룩한 “교회의 씨”가 된 것이다.
그 후 산정현교회가 계속 존립해 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산정현교회가 가시적인 교회로서 수년 더 존재했는지, 아니면 곧 교회 문을 닫아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지하교회 형태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람들이 모이는 외형적인 교회 형태이든 아니면 지하교회 형태이든 아마도 산정현교회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했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여정은 저 본향을 향하여 여행하는 나그네 인생들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주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는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그 찬란했던 산정현교회의 영광을 북녘 땅에서 찾을 수 없다. 북한 김일성 공산정권은 6?25전쟁으로 파괴된 교회의 복구를 전혀 허용하지 않았고, 남아 있는 교회도 “1954년부터는 교회당을 몰수하고 탁아소, 병원, 송회당, 창고, 사무실, 민주선전실, 정미소, 유아원, 심지어 극장으로까지 사용”하며 교회 존립을 막았다. 그러다 1950년대 말에는 아예 기독교인들에 대해 “여행(旅行), 진학(進學), 장학금수여(?學金授與)의 불리(不利), 사회활동(社會生活)과 공직(公職)에서의 부자유(不自由), 적대계층시(敵對階層視), 노동당가입 불가능(勞動黨加入 不可能) 등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투옥 추방 移住, 公開的 감시대상, 사회진출 제재, 아오지 탄광(炭鑛)에의 이송(移送), 학살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기독교인 말살정책을 실행에 옮겨 왔다. 김일성 정권은 아예 1972년 수정 채택한 “북조선신헌법” 제54조에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 종교 탄압을 정당화시켰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인 1981년 민경배는 한 책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현재로서는 북한에 기독교의 자취는 없다는 것이 공통된 관찰이요 정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지금 북녘에는 그들의 선전도구로 위장 설립해 온 한두 교회 외에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드러나고 있듯이 그 혹독한 공산치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그루터기는 남아 있다. 초대교회 터툴리안이 증언하듯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는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기독교가 놀랍게 성장해 왔음을 보여 준다.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터툴리안의 증언은 이 땅의 교회 역사 속에 그대로 적용된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온 순교자들과 그 후손들에 의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자유의 땅, 남한에서 어느 정도 그 영광이 계승되어 왔다. 심지어, 비록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먼 훗날 선명하게 밝혀질 날이 오겠지만 1950년 이후 그 가공할 만한 공산정권 치하 북녘 땅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마지막 순간 분열의 오점을 남겼지만 산정현교회는 영원한 새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 가운데 하나로 오랫동안 역사 속에 소중하게 자리 잡을 것이다. 산정현교회의 지난 역사는 이 땅의 순례자인 우리 가슴에 영원한 새 예루살렘을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그토록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평양을 주께서 다시 회복시키셔서 그 찬란했던 산정현교회의 옛 영광이 회복될 것을 기도한다. 그리하여 북녘 땅에 남겨 두신 복음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 “동방의 예루살렘”의 영광이 재연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 주여! 그날을 속히 주옵소서!
- 박용규,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산정현교회 - |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주님께 영광!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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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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