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라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1991)
[작품해설]
시인은 우리 주위의 고통받고 상처받은 이웃들에게 따스한 위안과 희망을 주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 시는 이러한 아름다운 삶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실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인은 ‘진눈깨비’ · ‘함박눈’ · ‘편지’ · ‘새 살’ 등의 함축성 있는 시어와 ‘진눈깨비’와 ‘함박눈’의 대립구도 그리고 ‘-라면’이라는 가정형과 ‘-되자’의 청유형의 서술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가정형 서술’이 미래에 이루어질 그 무언사를 상정함으로써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효과를 얻는다면, ‘청유형 서술’은 개인적 차원의 노력과 실천보다는 공동체 차원의 노력과 실천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게 마련이다.
전 12행의 단연시인 이 시는 시상의 흐름에 따라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3행의 첫째 단락에서 화자는 우리가 ‘눈발’이 되어 날릴 때 ‘진눈깨지’는 되지 말자고 당부한다. ‘진눈깨지’는 눈송이가 작고 내리자마자 녹으며 차갑고 질척거리는 이미지를 환기시킨으로써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는 부정적 존재라는 함축성을 지닌다. 이런 까닭으로 화자는 우리 모드가 ‘진눈깨비’가 아닌 다른 ‘눈발’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4~7행의 둘째 단락에서 화자는 그 같은 소망을 ‘함박눈’에 담아 노해한다. ‘함박눈’은 눈송이가 크고 포근하며 소담하고 풍성한 이미지를 환기시킴으로써 ‘진눈깨비’와 대립 · 데조되어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긍정적 존재이다. 더구나 ‘바람 불고 춥고 어두’운 ‘마을’의 ‘가장 낮은 곳’에서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 빛을 발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8~12행의 셋째 단락의 중심 이미지로 등장하는 ‘편지’와 ‘새 살’은 앞의 ‘합박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깊고 붉은 상처’를 매만지며 고단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된다.
[작가소개]
안도현(安度眩)
1962년 경상북도 예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
1996년 제1회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0년 원광문학상 수상
시집 :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모닥불』(1989),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그리운 여우』(1997),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1999), 『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아침엽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