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지옥. 그 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악마가
하나 있었다.
"이봐, 난 마족이라구!! 설명 똑바로 하라고!!"
아, 이런 실수. 그는 마족이었다. 빨갛게 빛을 내는 두 눈은 분명히 마족이었으나,
생김새나 피부색은 마치 천사의 그것처럼....... 어쨌든 지옥에서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보니까 마족이겠구먼. 그의 이름은 가이런. 특이하게도 마족이란게 지옥의 잡무
를 담당하고 있었다.
"왜? 떫냐? 마족이 똥지옥 관리해서?"
이런이런, 친구. 진정하라고. 참고로 그는 똥지옥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가
이런의 뒷머릴 향해서 날아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똥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자기가 자부하는 대로 마족인지라 금방 감지해내고는 손을 내밀어 증발시켰다.
"엇쭈구리, 누가 이연글(알죠? 황비홍!!) 아니라고 태극권으로 똥을 날려? 죄수번
호 133!! 간수에게 더러운 짓을 한 대가로 잠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똥을 날린 동양인 남자혼령의 머리를 지긋이 눌렀다.
"으이구, 내 팔자가 왜 이렇게 사납냐? 어떻게 마족서열 44위인 내가 이런 곳에 있어
야 하냐고?"
쯧쯔. 사정이 딱하게 되셨구려. 역시 이럴 때는 포장마차에 가서 쐬주나 한잔 칵!
아참, 이게 아니지.
"이 쒸방새야!!"
어디에선가 걸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야이 해설자 새끼야! 왜 니가 욕해놓고 딴데서 소리가 났다고 지랄이야?"
우와~~~ 상당히 갈구네? 내가 이래뵈도 해설자 중에서 인정받는 놈이야!!
"주제에 해설자라고..."
따악하는 소리와 함께 가이런은 말도 끝내기 전에 똥지옥에 쳐박혔다. 가이런은 들어
갈 때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떤 자식이야?"
'나다 이 자샤.'
지옥지존신이었다.
'얌마. 왜 해설자 선생님한테 덤벼? 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 별거 아니니까 신경쓰시지 마십시오.하하하하. 내가 이런 사람이라오.(크윽,
그 동안에 쌓아놓은 이미지가...)지옥지존신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야, 내가 널 왜 똥지옥에 보냈는지 알어? 다 기초훈련이야. 임마. 한 일주일 정도
더 있다가 나한테 와. 아. 너 내가 어딨는지 모르겠구나. 락커룸 들어가면 인터폰 있
을 거야. 수화기 들면 우리 비서가 받을 테니까 물어봐서 와. 자 일주일 후에 보자
고. 안녕!~~~~~~~~~"
퍼억~~~~~~~~~
가이런은 종전의 속도보다 더욱 빨리 똥지옥에 떨어졌다. 근데 옆에서 아까전에 쳐박
았던 이연글이 자꾸 키득거리며 웃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이연글의
머리를 똥지옥 속으로 쳐넣었다.
"크크크큭, 날 비웃어? 죽는거다(허억.. 어디서 많이 듣던 웃음소리와 대사!)
그러나 그 웃음도 잠시, 가이런은 어떤 힘에 눌려 다시 똥지옥 속으로 쳐박히게 되었
다.
"우러러러러러~~~~~~ 꿀꺽 아라라라라라[지옥지존신 두고보자!! 꿀꺽은 무언가를
(?) 삼키는 소리]"
그 어떤 힘이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에휴, 앞으로 이런 녀석을 주인공으
로 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 한다니... 전해련(전세계 해설자 연합)도 너무해. 이
런 놈을 주인공으로 주다니!! 으앗! 가이런 임마! 똥 튀기지 말어!!!!
제 1화
지옥지존신(앞으로는 그냥 지존신이라고 부른다. 쓰기가 힘들거덩 ^.^;;;) 직속 친
위대 레드 데블스에 편입되다.
구리던-프롤로그를 봤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 이야기는 프롤로그를 봐
야지만 처음 부분이 이해가 됩니다- 일주일 이 지나고 가이런은 락커룸에서 샤워를 하
고서는 툴툴댔다.
"에이 망할. 냄새가 몸에 뱄잖아. 입에서도 똥냄새가 나잖아!! 기분 드럽다!!"
야야, 거친 말 좀 쓰지 마. 네 이미지도 생각해야지..
"뭐 어때? 내 맘이지."
너 요즘 많이 갈군다?
"인터폰이 어딨지?"
나쁜 자식. 내 말을 씹다니... 그래도 내가 봐 줘야지.. 저깄다.
"이럴 때는 고맙군. 아 거기 지존신 사무실이죠? 거기 위치가... 예... 예... 지
옥 4333층이라고요? 예 예 알겠습니다."
지옥도 많이 발달했다. 현실세계가 발달할 수록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로 발달한
다. 언제 까지나 중세시대처럼 지내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가이런 녀석은 지존신 사무실에 도착했다. 근데 살짝 열린 문 틈으로 희미하
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꺄하하하~~~ 나 잡아봐요~~~~~"
"너 잡히면 밤이 뜨거울 줄 알어(?)!!"
가이런이 밀어 젖힌 문의 건너편에서 지존신은 서큐버스와 눈가리고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신이라는 직업이 이런 직업이었구나라고 생각될 때 쯤 지존신은 누군가가 자
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기겁을 했다.
"허억! 너 왔니?!!"
"그래요. 왔어요. 얼른 가죠."
"그래그래."
둘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너를 내 직속친위대에 편입하기로 했어."
"거기 이름이 뭔데요?"
"레드 데블스(red devils)."
"아이씨. 데블스가 뭐예요. 데블스가."
"데블스가 어때서."
"전 마족이란 말이에요. 악마가 아니라 마족이라구요."
"그것도 그렇네. 근데 마족이 영어로 뭐지?"
"지존신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요? 세계화 시대에 그 정도는 되야 천국이랑 경쟁
이 될거 아녜요."
"야, 그러는 너는 마족이 영어로 뭔지 아냐?"
"으으음... 그냥 레드 데블스가 좋네요."
"그래그래. 그래야지."
어느덧 엘리베이터는 둘이 무식을 겨루는 동안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의 문에
는 '레드데블스'라고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써져 있었다. 지존신이 문을 활짝 열었
다. 그리고 동시에 강력한 마기(魔氣)가 문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웃, 이 마기는 상당히 친숙한..."
가이런마저 약간 질린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의 가이런의 표정은 한 술 더
떠서 새파랗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방안의 세 마족 때문인 것
같았다.
"역시 너희들이었군. 케페니어스, 데메른, 헬리엇.............. 이건 악몽이
야. 또 턱이 아파져 오는군(턱이 아프다는 것에 주목할 것)!!!"
가이런은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근데 왜 그렇게 강력한 마기를 내뿜었지?"
커다란 방의 한 가운데 있는 남자마족.... 아니 여자마족인가? 하여튼 그 마족이 대
답했다.
"지존신님이 폼내는 연습하라고 해서 말이야."
여기서 지존신의 정신수준은 여실히 드러난다.. 여하튼 그 마족은 계속 말을 이어나
갔다.
"야, 가이런. 근데.... 어디서 똥냄새가 난다?"
"아, 저기 내가 똥지옥을 관리하다가 사고가 좀 있어가지고 말이야.."
"야, 너 똥지옥 관리했냐? 우린 귀족 대접 받으면서 살았는데?"
그 말이 끝나자 마자 가이런은 지존신을 칼날같은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지존
신은 급하게 방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방의 어두운 구석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
자가 가이런의 뒤로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서 가이런을 움직이지 못하게 뒤에서 꽉 붙
잡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이윽고 말했다.
"미안해 가이런. 하지만 이렇게 해주면 지존신님이 식권을 50장을 주신다고 하셔서
말이야."
"컥,커허헉. 헬리엇 네,네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 었다. 또 다른 방의 구석에서는 커다란 망토로 온 몸을 감싸
그 붉게 빛나는 눈만이 빛나는 존재가 나타나서 가이런의 정수리를 수도로 내리쳤다.
"으, 으음. 데메른. 너 같은 왕따가 어떻게..."
그 데메른이라고 불린 존재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가이런은 자신을 향
해 날아오는 주먹을 보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제 1 화 끝
제 2화
그들의 과거를 묻지 마라
지옥빌딩 건축번호 2번 47층. 그곳에서는 서열대회가 한창이었다. 속세의 시간으로
1년마다 열리는 대회로 지옥에서의 서열을 정하는 대회다. 그 대회장에는 주목받는
신인이 4명이 있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어린 마족 넷이었다. 바로 그 중의
하나 가이런이 여러 경기장 중의 하나에 있었다. 그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아직 한번
도 보지 못한 신종의 괴물과 대적하게 되었다. 관중석에 있던 헬쑥한 소년(소녀라고
해야하나?) 마족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야, 가이런!! 이겨서 돌아와라. 이 케페니어스가 예뻐해 줄게!!'
그 말을 들은 가이런이 말하길,
"입다물고 이 형님 경기하는 거나 봐. 그리고! 넌 정말 호모같은 놈이야!"
케페니어스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가이런을 쏘아보았다.
"흠흠. 이것 참 뒤통수가 따갑군."
"경기 시작!!
경기는 시작되었다. 그 괴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가이런을 향해 거대한 팔
을 휘둘렀다. 그러나 방금전까지 괴물이 팔을 휘두른 장소에 있던 가이런은 보이지
않았다. 어리절해 하는 괴물의 머리 위에서 나즈막한 소리가 들렸다.
"역시 머리가 나쁘군."
가이런은 괴물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괴물은 성이 났는지 콧김을 씩씩거리면서 가
이런을 향해 손톱을 세우고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가이런의 역시 잘 피했고 손톱은
괴물의 머리에 박혔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휘우우.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무지하게 덥네."
가이런은 락커룸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 하
나가 드리워졌다.
"헬리엇, 왔냐? 앉아라."
소년 답지 않게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헬리엇은 3인용 벤치의 끄트머리에 앉아있
던 가이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나무로 된 벤치는 기형적으로 휘어졌고, 가이
런은 헬리엇에게 기대는 꼴이 되었다.
"야야 다이어트 좀 해라, 응? 이게 뭐냐? 너 애 맞어?"
"가이런, 체력은 국력이라고 하는 말 못 들어봤니?"
"에구구, 너라는 녀석이 원래 그렇지 뭐. 근데 용건이 뭐냐?"
"이제 우리 4명이 승부를 내야 하는 거잖아. 내가 너를 가뿐히 이겨줄 테니까, 네가
너무 섭섭해 할 것 같아서 위로해주러 왔어."
"이 자식이 진짜!"
가이런은 헬리엇을 가격하기 위해 팔을 휘둘렀지만 헬리엇은 가볍게 피해 어느 새 락
커룸 출구에 서있었다.
"우리 잘 해보자!!"
헬리엇이 나가고서 가이런은 툴툴대면서 말했다.
"이녀석이 어느 새 내 도너츠를 가져 갔지? 덩치에 안 어울리게 날렵한 놈이야."
짧은 휴식시간은 끝나고 또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가이런은 일찌감치 경기장 한가
운데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페니어스가 올라왔다. 그리고 헬리
엇과 '마족자제 양성학교 최고의 왕따'인 데메른도 올라왔다.
"뭐야! 경기는 1:1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가이런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헬리엇이 머릴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너 몰랐냐? 우리 전투력 수치가 똑같아서 전부 나와서 경기하는 거."
"너 같은 녀석하고 전투력 수치가 똑같다는 게 수치스럽다."
다른 편에 서있던 케페니어스가 띠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역시 헬리엇은 둔
한 녀석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서도 아무 말도 안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
다. 그리고 한편에선 데메른이 경기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경기장 바닥에 손가락
으로 이리저리 선만 긋고 있었다. 정말이지 왕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경기시작!"
심판의 외침이 끝나자 마자 넷은 눈빛이 틀려졌다. 넷은 모두 빙빙 돌면서 서로의 전
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아는 넷이었다. 전력탐색은 금
새 끝나고 가이런이 선공을 취했다.
"헬리엇, 나한테 헛소리 했던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웃기는 소리."
가이런은 헬리엇에게 발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달려들었고, 그 옆에서는
케페니어스가 데메른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야 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이
었다. 케페니어스가 손에 들고 데메른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드래곤의 뼈로 만든 로
드(지팡이)였다. 드래곤의 속성에 따라 로드의 공격성향이 달라지는데, 지금 그 지팡
이에서 불이 솟구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로드는 레드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 진 것 같
았다. 그러나 데메른도 장난이 아니었다. 망토로 가리워진 손에서는 금빛이 은은하
게 감돌고 있었고, 그 팔은 케페니어스의 지팡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막아내었다. 아
무래도 팔에 금(金)의 기운을 깃들여서 단단하고 열에 강하게 만든 것 같았다.
한편 옆의 가이런은 헬리엇에게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그의 검은 백색 호선을 그으
면서 헬리엇의 방어를 피해서 꽂혔으나, 공격을 받으면 몸이 순간적으로 단단해 지면
서 마치 갑옷 같은 역할을 하는 특이한 신체를 가진 헬리엇에게 검이 들지가 않았다.
"훗, 검이 들지 않는 다면 장법을 쓰는 수 밖에 없겠군."
"나도 네 녀석한테 얻어맞고만 있는 녀석이 아냐."
가이런과 헬리엇은 서로 무기를 내버리고 주먹으로 맞붙게 되었다. 둘 사이의 팽팽
한 긴장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둘의 주먹이 서로의 신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헬리엇
의 주먹이 거대하고 날카로운 전투용 도끼(battle axe)와 같이 둔중하다면 가이런
의 주먹은 빠르고 가벼운 롱소드(long sword)와 같이 예리했다. 헬리엇이 가이런의
빠른 주먹을 피하고서 거대한 주먹을 날리면, 가이런은 날렵한 족제비 같이 그 주먹
을 피하고 빠르고 정확한 주먹을 날리는 형국이었다.
이런 형편은 옆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케페니어스의 지팡이에서 불을 뿜으면 데메른
이 물의 기운을 입힌 팔을 크게 휘둘러 물의 보호막을 치고, 케페니어스가 다시 지팡
이의 단단하고 예리함을 이용한 공격을 쓰면 데메른은 몸에 석(石)이나 금(金)의 기
운을 씌워 방어하고 반격하는 형식이었다. 이래서는 어떤 쪽에서도 결판은 나지 않
을 것이 뻔했다. 그 때 가이런이 소리쳤다.
"잠깐!! 다들 멈춰봐."
그러자 넷 다 공격을 멈추었다.
"이래서는 영원히 결판이 안 날거야. 우리, 마법을 사용하지 말고 순전히 몸만으로
싸우는 거 어때?"
곧바로 반박이 밀려왔다. 케페니어스였다.
"어떻게 이런 고결한 미모로 주먹을 사용하란 말이니?"
곧바로 가이런이 대답했다.
"난 너랑 학교 같이 다니면서 니가 애들 여럿 패는 것을 아주 감명 깊게 지켜봤지."
"큭."
"나머지는 반대하는 사람 없지?"
속전 속결이 생명인 경기장인 만큼 경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넷은 모두 한대씩 주
먹을 교환하고, 얼굴에 한군데씩 시퍼렇게 멍이든 상태였다.
"짜식들, 웬만하면 포기하고 물러나라."
"흥, 그건 내가 할 소리!"
"미 투 !!(me too)"
"......"
이것마저도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헬리엇이 헉헉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 한대씩 때리고 맞기 하는 거 어때?"
참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좋아!! 너희들은 어때?"
가이런이 먼저 찬성했다. 그리고 나머지 둘도 말없이 찬성을 했다. 그리하여 넷은 서
로의 주먹 사정거리로 빙 둘러섰다.
"자, 그럼 한대씩!!"
"뻐뻐버억~!"
"크읍, 주르륵(피흐르는 소리)"
"뻐억!"
"크왑!"
"퍽!"
"억"
이런 무식의 극치를 달리는 주먹 릴레이는 무려 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3시간 후의
녀석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터진 입술에 퉁퉁부은 눈, 삐뚤어진 코에 볼은 새
파랗고... 처참할 정도였다.
"헤헤헬, 이, 이제 포기하는 게 좋을... 걸."
"미친 놈! 맨날 내가 할 말 가로채고 있어."
"너나 포기해 이 쟈식아."
"......"
"뻐어어어억!"
이번에는 모두 사력을 다해 친 모양이었다. 모두 얼굴의 취약점인 상대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모두 주먹을 내밀고서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
각한 심판이 가까이 다가가 넷 중 하나를 툭툭하고 손가락으로 쳤다. 그러자 넷은 모
두 스르르하고 쓰러졌다. 그것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병원에 실려갔고 5주 동안을
입원해야 했다. 그러나 입원한 꼴이 더욱 가관이었다. 우리의 주인공 가이런은 화장
실이 어딘지 몰라서 병원 복도 벽에다가 실례를 하다가 간호사에게 걸려서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 맞고, 헬리엇은 그의 몸에 맞는 침대가 병원에 없어서 침대 제작사에서
그의 침대를 제작하는 5일 동안 서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심지어는 의자조차 그가
앉으면 호떡이 되는 정도이니 이 신세였다. 케페니어스는 구질구질한 병원 침대에서
누워있지 못하겠다고 갈구다가 진정제를 3방이나 맞고 잠잠해 졌고, 데메른은 역시
왕따 답게 병원에서 이틀만에 사라졌다.
5주가 지난 후 가이런은 병원에서 나왔고 헬리엇, 케페니어스, 데메른과 함께 44위
에 올랐다. 그러나 가이런은 이후에 그들 셋을 만나면 턱이 지끈거리면서 아파 왔
다. 사실 셋이 아니라 둘을 만난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데메른은 워낙에 외부에
노출되는 일이 없고, 또 그가 원래 존재감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
다. 어쨌든 이것이 가이런이 나머지 셋을 만나면 턱이 아파 오는 이유다. 그리고 넷
은 서로 만나면 그때의 일을 절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 2 화 끝
제 3화
첩첩산중
가이런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광순응을 하고 있다. 허긴 이틀동안 누워있었으니 광순
응을 해야 할 정도겠지. 그런데 갑자기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히호 히호히 어히허?(지옥지존신 어딨어?)"
야! 너 말소리가 왜 그러냐?
"헉이 아가흐니하 흐러허이(턱이 나갔으니까 그런 거지)."
쯧쯔. 데메른한테 한 대 맞더니 완전히 턱이 맛이 갔구만. 어쨌든 이런 상태로는 훈련
을 하진 못하겠군.
"흐헤 후흔호리아?(그게 무슨 소리야?)"
훈련 한댔어. 얼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야지. 그래야 훈련을 하지.
녀석은 역시 44위의 마족 다웠다. 그 재생능력은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의문을 갖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누워 있었던 이틀은 뭐냐고 말이다.
그것은 지존신의 청탁이었다. 바로 주먹에 마비 주문을 입혀서 가격하는 것이었다. 그
러면 시전자가 넣었던 마력만큼의 시간만큼 가격 당한 부위가 마법으로 인해 마비되
고, 재생능력도 마비 시간동안 많이 약해진다. 하지만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원
래 데메른의 주먹 자체가 막강해서 아무리 마족이라도 무방비 상태에서 맞으면 턱이
으스러질 정도 였지만, 가이런의 턱은 그냥 빠지는 정도였다. 거기다가 전혀 손을 대
지도 않았는데도 저절로 턱이 맞춰지는 그 재생능력은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
될 정도였다. 지금은 거의 완치 단계에 다다랐다. 잠시 후면 턱이 완전히 맞춰질 것이
다.
'끼익'
케페니어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호오~ 천하의 가이런이 이럴 때도 있네? 아유~~~ 이 방 꼴이 뭐냐?"
"무슨 용건이야?"
"오오! 역시 가이런이야. 데메른의 주먹을 맞고도 멀쩡하게 말을 하다니.. 오늘부터
훈련이야. 지존신 사무실 옆의 방으로 와라."
케페니어스는 그 말만 하고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군
훈련은 계속되어야 한다... 쭈~~~~~욱
"뭐 저런 해설자가 다 있어?"
가이런... 너 죽는다.
잠시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그 순간 마치 밤무대의 그것처
럼 휘황한 라이트가 켜지면서 지존신이 등장했다.
"120인치 대형 프로젝션 TV, 3D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 앉은 사람의 허리를 편안하
게 해주는 150만온 짜리 의자와, 홀로그램 영상기능을 갖춘 탁자가 갖추어진 최고의
회의실!!!"
저게 뭐하는 짓이지? 아주 쇼를 하는 것 같군. 불이 켜진 그 방의 모습은 정말 고급스
럽다 못해 사치스러웠다. 그 사치의 극치를 달리는 방에는 친위대의 나머지 세 명이
앉아있었다.
"어이! 왔어?"
헬리엇이 크게 손을 흔들며 가이런을 반겼다. (그냥 가만히 있는게 훨씬 나은데...
왜 저렇게 애 같을까?)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아. 헬리엇. 그리고 지존신 아저씨.(아주 건방진 태도로.
마치 양아치처럼) 이런 기계 살 돈 있으면 하급 악마 사서 쓰면 되지 뭣하러 나를 똥
지옥에서 일을 시켜요?"
"아하하하하, 서큐버스 용돈 좀 주느라고......^^;;"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내가 참죠."
"그래그래, 고마워."
그렇게 말을 끝마친 지존신은 방쪽으로 손짓을 했다.
"허억!!"
가이런은 그 '손짓' 한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경험 때문에 흠칫하면서 방 구석으
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너 뭐하냐?"
지존신은 프로젝션 TV의 리모콘을 조작한 것이었다. 졸지에 가이런은 바보가 되었다.
"푸헤헬, 내가 저번 일 땜에 '손짓'이 무서워져서 말이야.."
"훈련의 모티브만 설명하고 곧바로 훈련에 들어간다."
화면에는 단 네글자만 떴다.
'폼생폼사'
"우리는 앞으로 폼에 죽고 폼에 죽는다."
가이런이 불만이 있는 듯이 소리쳤다.
"뭐예요? 뭐 흑마법 수련 같은 건 없어요?"
"야야, 나는 내 한 몸 지키는 데 딴 거 필요 없어. 그냥 맞서 싸우면 그만이야. 하지
만 다른 신들은 다 친위대를 끌고 다니는데 나만 없으니까 그냥 폼으로 너희들 데리
고 다니는 거야. 너희들은 그냥 폼만 팍팍 잡아주면 되는 거야."
"그럼....."
가이런은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혹시 너.. 관두려고?
"월급은 많이 줄거죠?"
크아악! 속았다. 녀석은 역시 단순해.
"물론이지. 자 이제 훈련에 들어간다."
"훈련명 '공포 분위기 조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아! 눈에서 불이 나오면 상당히 공포스러울 거야. 누가 먼저 할래?"
"......"
데메른이 역시 말없이 나와서 눈에 불을 붙였다. 저승사자(큰 낫을 들고 검은 옷을 입
은...영화에 자주 나온다)들이 입는 검은 옷을 입어서 붉은 눈 밖에 보이지 않아 원
래 공포스러웠던 데메른은 눈에서 불이 나오자 더더욱 무서워 보였다.
"오오! 아주 멋져. 다음 케페니어스."
"저 같이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가 눈에서 불이 나오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라고요?
싫어요. 크아아악!!"
케페니어스가 비명을 지른 이유는 지존신이 헤드락을 걸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팀
에는 제대로 된 녀석이 없는 것 같아...
헤드락이 풀리고 헬리엇의 차례가 다가왔다.
"다음! 헬리엇."
"예에~!"
헬리엇은 대답은 힘차게 했지만 어찌할 줄 몰라하다가 갑자기 다른 방으로 뛰어들어갔
다.
"야. 쟤 어디가냐?"
"나도 모르겠어. 으으. 뭔놈의 헤드락이 이렇게 세냐?"
'크오오오오오옷. 뜨뜨거워!!!'
헬리엇이 들어간 방쪽에서 헬리엇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지존신과 가이런
일당은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방에는 석유통과 라이터, 그리고 걸레 빨던 양동이
에 머리를 박은 헬리엇이 보였다. 이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법하다...
"병원에 싣고 가."
간단한 치유 마법으로 헬리엇에게 응급처치를 한 지존신은 부하들을 시켜 헬리엇을 병
원으로 보내고 또 다시 훈련을 재개했다.
"다음! 가이런."
"네에~~~!"
가이런도 헬리엇과 마찬가지로 대답은 힘차고 좋았으나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
러자 케페니어스가 비웃었다.
"가이런 애쓰지 말고 그냥 들어와라~~~ 하하핫!"
"끄응~~~!"
불은 나왔지만.....
"크아아악!! 아름다운 내 눈썹이....¡_ ¡
가이런은 눈썹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그날의 훈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가이런이 눈썹을 태워먹은 지 이틀이 지난 후, 훈련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자아, 이번에는 본격적인 폼잡기에 들어간다. 다들 지옥 베스트 셀러 만화 '드라곤
보울'은 다들 한번쯤은 읽어봤겠지? 거기 나오는 손오곤처럼 온몸에서 불을 뿜어봐."
그러자 가이런이 툴툴거리면서 말했다.
"에이 씨, 오늘 미팅있다고 그래서 쫙 빼입고 왔더니.... 왠지 불안한데?"
"하라면 하지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알았어요. 하면 되겠지 뭐.."
먼저 데메른이 나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불을 일으키더니 금새 자기 방으로 돌아갔
다. 지존신이 목표를 달성하면 곧바로 돌아가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우와! 너 진짜 잘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냐?"
".................... 그냥 .......... 열심히 .....하는 거지 뭐...."
녀석의 첫 대사였다.
다음엔 케페니어스의 차례였다. 녀석은 투덜거리면서 하긴 했지만 역시 44위 답게 잘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헬리엇...
"야야, 너는 저번처럼 또 사고칠 것 같으니까 들어가. 그리고 너는 가만히 있기만 하
면 충분히 위압감이 느껴져.."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번엔 가이런....
"야! 너도 웬만하면 그만 둬라.."
"싫어요. 나는 의지의 마족. 꼭 성공하고야 말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가이런은 어정쩡한 자세를 잡았다. 데메른은 자세도 안 잡고 막 하던
데...
"끄응..."
잘 안되는 것 같았다.
'화르르르륵!'
잠시 지나가던 서큐버스에 한 눈을 팔던 지존신은 불 타는 소리만 듣고 박수를 쳤다.
"오오 저 서큐버스.... 잘했어 가이런!!"
그러나 그는 뭔가 커다란 잘못됨을 느꼈다.
'영적인 불에는 열기는 있지만 소리는 나지 않는데...'
역시나 가이런은 날뛰는 통구이가 되어 있었다.
"크아아앗, 누가 내 불 좀 꺼줘~~~!!!!!"
역시 엄청난 회복 능력으로 화상이 치료된 가이런은 말이 없었다. 하긴... 친위대에
서 자기 혼자서만 그렇게 실력이 없으니... 아니지. 헬리엇이 있는데?
'끼익~'
가이런의 방문을 열고서 케페니어스가 들어왔다.
"어머머, 방이 이게 뭐니? 어둡고 칙칙하고...."
"본론이 뭐야?"
"지존신님이 찾으셔."
"뭣땜에?"
"나도 잘 몰라."
그 몇마디만 남기고 케페니어스는 나갔다.
"저 자식이랑 60년을 같이 친구로 지냈지만 도무지 남잔지 여잔지 모르겠어."
너 나이가 쳐이냐?
"150살"
정말 오래도 산다.
잠시후 들어간 지존신 사무실에는 중년 아저씨 같이 생긴 지존신이 거만한 자세로 앉
아있었다.
"으음, 왔냐? 저기 앉아라."
가이런은 오크가죽 소파에 앉아서 말을 거냈다.
"왜 불렀어요?"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너....천계로 유학가라."
제 3 화 끝
제 4 화
걸리면 죽는다
"네에? 어떻게 천계에 가요? 나 죽이려고 그러죠?"
"아니."
갑자기 지존신은 무게를 잡았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마족 본래의 괴물 같은 손으로 변
화시켰다.
"안 죽인다면서 그 '흉기'는 왜 꺼내요?!!!"
가이런은 얼굴이 벌게 지면서 화를 냈다.
"안 쓸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군."
지존신은 오른손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휘둘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
다. 지존신이 휘두른 괴물손이 공간에 거대한 흠집을 만든 것이었다. 지존신은 남은
왼손마저 괴물손으로 만들고 그 공간의 틈에 손을 넣어 더욱 크게 벌렸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천국으로 가는 문이다!! 자 자~~알 가라.!"
지존신은 가이런을 집어올려서 그 틈새로 던져 버렸다.
"끼아아악! 죽여 버릴 거야 지존신! 두고보자~~!!!"
"두고보자는 놈 하나도 안 무섭더라."
"철푸덕!!"
천계의 공간으로 나온 가이런은 멋지게 착지하기는커녕 배부터 떨어졌다.
"에이씨, 유학을 보낼려면 옷가지는 줘서 보내야 할 거 아냐? 어, 어라? 내 몸이 멀쩡
하네?"
원래 마족의 마기란게 마나가 신력과 융합이 되지 않는 것처럼 천계의 신력과 융합이
되지 않고 반발하기 때문에 이렇게 제멋대로 들어오면 마기가 폭주해서 육신이 터지
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이런은 멀쩡했다.
"근데.... 땡전 한푼도 안 주고 날 이런 곳으로 보내? 으흐흐흐흐..... 죽여버리겠
어..."
가이런은 분개하면서 마기를 '강렬하게' 뿜어댔다. 원래 흥분하면 주체를 못하는 녀석
이라서....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커다란 실수였다. 그 '강렬한' 마기를 느낀 천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뭐야! 이 마기는?"
"저놈이다! 악마야!!"
가이런은 발끈해서 대답했다.
"나는 악마가 아니라 마족이다, 자랑스런 마족!!"
"마족이던 악마던 어떻게 천계에 들어올 수가 있는 거지?"
"어쨌든 잡아!!!"
가이런은 앉아서 맞아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떨어질
때 잘못 떨어졌는지 사지는 꼼짝도 안하고 천계의 신력과 반발하는 마기를 함부로 쓰
면 안 됐다. 가이런은 꼼짝없이 맞는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나... 죽었다."
천사들은 사악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이런을 개 패듯이 팼다.
'퍼버버버벅'
"쿠에에엑, 차라리 날 죽여라!!!"
"그렇게는 안 되쥐!! 우린 이 지긋지긋한 수용소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거든? 네 놈
이 샌드백 역할을 해 줘야겠다. 이 악마 자식아!"
"수, 수용소? 그리고 난 마족이라니까?"
'퍼버버버벅'
가이런은 거의 반 죽음 상태가 되었다.
"욘석들 그만두지 못해!!!"
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씨, 소장이 무슨 상관이야?"
웬 노인 하나가 와서 그 천사들을 혼내고 있었다. 그러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얻어맞아 팅팅 부은 가이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어이구, 허리야~"
"으음.. 벌써 깨어났나? 정말 놀라운 회복능력이군!"
"아무리 그래도 아프니까 치료 좀 해줘요!"
"알았네, 알았어."
소장은 가이런이 마족이란 것을 아는 듯, 신성 치료 마법이 아닌 일반 약물로 치료를
했다.
"내가 마족인걸 아는 거예요?"
"물론이지. 지존신한테서 연락을 다 받았네.'
"네에? 지옥하고 천계는 적대관계가 아니에요??"
"인간들에게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들만 그렇게 보이지. 사실은 협력관계야."
소장은 주저리 주저리 얘기를 하면서 가이런을 치료했다. 상당히 외로운 노인네인가
보다.
"근데 뭐 그런 녀석들이 다 있어요? 원래 천사는 다 착하지 않아요?"
가이런은 개모닥 당한게 상당히 억울했나 보다.
"다 착하지는 않네. 불량품이 나오듯이 천사들도 가끔씩 가다가 그런 녀석들이 나오
지. 그래서 그렇게 타락한 천사들을 타천사로 분류하고 이 수용소에서 갱생시키고, 그
래도 안 되면 지옥으로 보내 벌을 주지."
"그 벌이 뭔데요?"
"마기를 천천히 주입시키는 거지."
그건 벌보다 고문에 가까운데?.....
"그래도 안 되면 폐기처분하지. 자 이제 치료가 다 끝났네. 자네의 회복능력으로 보
아 한 반나절만 있으면 다 나을 걸세. 할 말 있으면 하게."
가이런은 진지한 얼굴로(웬일로?) 물어봤다.
"지옥과 천계가 어떻게 협력관계죠?"
"자네.. 빛과 어둠이 하나라는 말 들어보지 못했나?"
"네에?"
"빛이 있어야 어둠이 생기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필요하듯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야.
자 됐나? 지금은 몸이 안 좋으니, 방에 가서 쉬다가 나중에 말하세."
소장은 가이런을 비어있는 방 하나에 데려다 주고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 일러주었
다. 그리고 주의의 말도 잊지 않앗다.
"여기선 걸리면 죽는다네. 알지? 자네가 마족이란걸 잊지 말게. 함부로 돌아다니면 아
까 꼴 나니까 가만히 있게."
제 4 화 끝
제 5 화
출생의 비밀
방으로 들어간 가이런은 온몸이 쑤셔서 제대로 누워있지도 못했다. 그러나 역시 녀석
의 회복능력은 탁월했고, 곧 잠이 들었다.
"우웅~ 잘잤다. 몸도 찌뿌둥한데 나가 볼까?"
가이런은 소장의 충고를 자는 새에 잊었다. 가이런은 방문을 열고 소장실로 갔디. 참
고로 말하자면 복도에 소장실 문이 있고, 그 소장실 안에 가이런이 누워있던 방이 있
던 것이었따. 때문에 또 들키면 도망치지도 못하고 또다시 개모닥을 당하게 되
는 .... 그런 구조였다.
"헤헬~ 아무도 없네? 뭐 먹을 거 없나? 마침 냉장고가 눈에 띄는군."
가이런은 냉장고를 열어 젖혔다. 그러나 먹을 건 없고 약초로 보이는 것들만 수북했
다.
"에이, 어떻게 냉장고에 아무 것도 안 넣고 저런 풀만 넣어놓냐?"
그렇게 가이런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소장실의 복도 쪽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
다. 가이런은 소장이다 싶어서 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에이, 소장님! 어떻게 냉장고에 음식도 안 넣어 놔요? 그리고 이 약초 같은 건 다
뭐....."
"너, 넌 마족?"
"허걱, 죽었다!"
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소장이 아니라 여자 천사였다.
"마족이 어떻게 천계에...세상에! 난 대마초도 안 피웠는데... 헛것이 보이지?"
여자 천사는 어느 새에 칼을 뽑아 들고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끝은 정확히
가이런의 목에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가이런은 손에 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꼼짝없
이 죽을 판이었다.
"저~ 웬만하면 말로 해결을 보죠?"
그러나 그 여자는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가이런은 가만히 있다간 죽게 된다는
것을 예감하고 그 여자에게로 손을 조용히 뻗었다. 칼을 빼앗기 위해서 였다. 소장이
돌아와서 본다면 뭐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우선 자신을 겨눈 칼부터 내리게 하는 것
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오지마!"
여자가 소리쳤다. 가이런은 그 순간 뽀록 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주의했다.
'쉬익!'
'사악'
가이런은 순식간에 날아오는 칼끝을 보고서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자라고
깔본 것이 실수였다. 칼은 매우 빨랐다. 가이런은 손등을 상당히 길게 베였다. 검은
피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천사들은 상처가 나면 '광혈'이라고 하는 하얀 피가 나지
만, 마족은 '암혈'이라고 하는 검은 피가 난다.
"쓰읍, 상당히 아프군."
당연하지. 상처가 났는데 아프지. 그럼 안 아프냐? 가이런은 인상을 팍팍쓰면서 고통
을 참는 중이었다. 그 때 소장이 들어왔다.
"앗, 우리엘! 뭐하는 짓이냐?"
"여기 마족이 있어요! 아빠!"
으음, 소장의 딸인가 보다.
"그 마족은 내 손님이다! 지옥의 지존신이 보냈지!"
"그럴 수가."
유리엘은 얼굴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칼을 내렸다.
"자자, 진정하고 소파에 앉거라."
소장과 가이런, 유리엘은 소장실 한 쪽에 있던 소파에 앉았다. 흠, 소파를 보니 지존
신 사무실의 오크 소파가 생각나는군. 소장은 상당히 긴 시간동안 가이런이 어떻게 해
서 천계에 오게 되었는지 유리엘에게 말했다.
"유리엘은 내 딸일세. 아, 그러고 보니 우린 통성명을 한 적이 없구만. 내 이름은 수
르피엘일세."
"저는 가이런입니다. 서열 44위의 마족이죠."
자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가이런의 손등은 벌써 아물었다. 그걸 본
소장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으음, 자네의 회복능력은 정말 가공할 정도야. 그리고 이 천계에 들어와서도 이렇게
멀쩡하다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유리엘은 가이런에게 사과부터 하거라."
"싫어요, 어떻게 마족한테..."
"어허! 하라면 하지 못해!"
상당히 옛날 노인네이군. 유리엘은 머뭇거리면서 가이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이런
은 찬찬히 유리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유리엘은 기분 나쁜 것을 털
어 내듯이 손을 몇번 흔들고 가이런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문을 신경질 적으로
열고 나갔다.
"허허, 자네가 이해하게. 저 녀석이 원래 성격이 모난 편이라서."
가이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단지 멍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가이런은 방 밖에서 나가지 말라는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상당히 오랜 시간 동
안 '몸을 이용한 걸레질'을 해야했다. 이윽고, 저녁 식사 때가 되었고, 소장은 회식
이 있다면서 미리 차려진 저녁을 주고 나갔다. 웬일로 말이 없어진 가이런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 식사 때라 그
런지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한 번도 나가 보지 않은 길이라 길 찾는 게 조금 어려웠
지만 가이런은 정원에 도착했다. 가이런은 조용히 서서 달을 쳐다보았다. 반달인 그
달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었다. 동시에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차가운 것 같
기도 했다.
"후~ 이게 빛과 어둠이 하나라는 소린가?"
가이런은 웬일로 한숨까지 쉬면서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 순간 가이런의 붉은
색 눈동자는 누군가가 정원에 있다는 걸 포착했다. 유리엘이었다.
한편, 회식을 하러 간다던 소장은 다른 곳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소장은 이것
저것 조작을 했다. 그 순간, 스크린에 웬 중년 아저씨가 나왔다. 지존신이었다. 소장
은 스크린의 지존신에게 말을 걸었다. 음, 화상통신을 하는 것 같군.
"가이런은 잘 도착했네."
"오, 그런가?"
"....."
"....."
둘은 한순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존신이 말을 꺼냈다.
"에이, 자식아. 아무도 없는데 어때. 말 까자."
"그래 이 자식아. 오랜만이다. 한 60년 됐나?"
아무래도 둘은 친구사인가 보다.
"그래, 그 녀석 말썽은 안 부리냐?"
"괜찮아. 조용한데?"
"웬일이지?'
둘은 한참 동안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 사무실의 비서가 더 예쁘다고 자랑하
는 등... 더 이상 얘기를 하면 둘의 이미지가 많이 상하므로 이만 줄이고... 이야기
는 본론에 접어들었다.
"근데... 가이런 그 친구 정말 이상하군. 어떻게 천계에 들어와서도 저렇게 멀쩡할 수
가 있는 거지?"
"그건 다 사연이 있어. 말하자면......"
원래 천계와 지옥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삶을 마친 영혼을 심판하는 일을 처리하
던 두 곳은 주신의 관리하에 운영이 되었는데, 천계에서는 라파엘이 태어났고, 지옥에
서는 디아블로가 태어났다. 나중에 라파엘은 막강한 힘을 가져 3대천사 중의 하나가
되었고 그로 인해 악마의 지도층보다 세력이 약했던 대천사는 그 세력이 막강해 졌고
또, 디아블로는 지옥불에 단련된 힘으로 악마왕의 자리에 올랐다. 디아블로는 그 자체
가 천계에 위협적이었다. 원래 사람들이 가급적이면 '착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표면
적으로 천계와 지옥은 대립을 했고, 항상 천계가 이기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악마
왕 디아블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계획되어 있던 양쪽 세력간의 전
쟁이 계획에 어긋나게 지옥의 승리로 끝이 나버렸다. 물론 이것은 디아블로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천계의 전투 천사가 90만이었다. 천계는 전체
의 1/3에 달하는 전력을 잃었다. 이에 분개한 대천사들이 지옥에 쳐들어갔고, 디아블
로와 맞붙게 되었다. 주신조차도 함부로 개입을 못했던 이 싸움은 정말 엄청났다. 원
래 하나로 되어 있었던 세계는 크게 갈라지게 되었고, 전투가 이루어졌던 3년 간 태양
의 빛이 비치지 않았고, 오직 어둠과 그 어둠을 가르는 번개와 천둥만이 있었다. 때마
침 인간들도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감히 신에게 대항을 하는 그런 정도에 다다랐다.
주신은 분노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의 이야기대로, 세상을 물에 잠기게
했다. 3년간의 싸움이 끝나고, 주신은 그 힘이 약해진 디아블로를 봉인시켜버렸고, 세
력이 약해져 있던 천계의 대천사들은 주신의 감시 아래에 행동하도록 했다. 이 싸움
을 '천마전쟁'이라고 했는데, 이 천마전쟁의 주역 가운데에 가이런의 부모가 있었다.
가이런의 어머니는 천사군의 총대장으로 있었고(과연 여자가 맞았을까?), 악마군의 총
대장이 바로 가이런의 아버지였다. 둘은 원래 부부 사이였으나 천마전쟁으로 인해 서
로 얼굴을 마주보고 싸우게 되는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성격이 꼿꼿한 대나무 같았
던 가이런의 아버지는 악마군의 대표로서 어쩔 수 없이 가이런의 어머니를 죽일 수 밖
에 없었다. 가이런의 어머니는 그 때 가이런을 임신하고 있었다. 가이런의 아버지는
가이런을 가이런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꺼내서 지존신에게 맡겼다. 물론 지존신은 아
들을 두고서 살 위인은 되지 않았기에 그냥 가이런의 부모의 이야기를 비밀로 해놓고
가이런을 길렀다. 그래서 지금의 가이런이 있게 된 것이었다.
제 5 화 끝
제 6 화
업그레이드 컴플리트(upgrade complete)
"흐음... 그런 거였군. 그런데 이 자식아 왜 그렇게 서두가 길어!"
"으음. 미안해 내가 요즘 외로워서 말이 좀 많아졌어."
"쯥, 그래. 끊자."
"그래. 끊자. 다음에 만나서 한잔 크~~ 알지?"
"그래."
그렇게 통신은 끊어졌다. 가이런은 몸 속의 피가 반쯤은 천사라서 천계에서 머무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가이런 자식. 과거가 상당히 우울하구나...
한편 나가있던 가이런은 계속 유리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숨어서. 유리엘의 성격
으로 볼 때 걸리면 죽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리엘은 창백한 달빛 아래서 계속 손
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가이런의 두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핏빛으로 빛나
고 있었다. 그 순간 정문 쪽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가이런은 몸을 더욱더 바싹 숨겼
다. 남자 천사였다.
"어이, 유리엘! 뭐해?"
"으응? 아, 아냐!"
유리엘이 깜짝 놀라는 것으로 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듯 했다. 가이런은 그 때
까지도 기 작은 나무 뒤에 쪼그려 숨어 있었다. 그 때 가이런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다
가왔다. 아무래도 식사를 끝내고 산책을 나온 천사인 듯했다. 그 천사는 웅크려 있는
가이런을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다가왔다.
'젠장할! 죽었다. 소장이 나오지 말라고 할 때 말 들을걸!!'
가이런은 이번에도 개모닥을 직감한 듯 더욱더 몸을 움츠렸다. 그 천사는 이미 가이런
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이게 누구지? 너 누구야!"
천사는 역시 수용소에 있는 녀석답게 상당히 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미친쉐이가! 말 안 해?!!"
그 녀석은(천사답지가 않아서 격하시킴) 역시나 예상대로 가이런은 개 패듯이 팼다.
가이런은 그 동안 맷집이 늘었는지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런 녀석. 왜 반
격을 안하지? 몸도 좋아졌으니까 맞붙어도 될텐데?
그 녀석은 가이런을 한참 두들겨 대다가 가이런의 턱을 잡고서는 완력으로 고개를 들
게 했다. 그러고는 가이런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는,
"이거! 마족 아냐?!"
더욱더 박차를 가해 패기 시작했다. 순간 유리엘과 얘기를 하고 있던 천사가 활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와서 가이런을 패고 있던 천사의 뒷덜미를 수도(手刀)로 내리쳐
서 기절시킨 후 가이런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어!"
아무래도 눈치를 깐 모양이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리엘도 눈치를 깐 모양인
지 달려왔다.
"유,유리엘! 마족이야!"
"라파엘로, 가만 있어봐.우선 소장실로 가자."
유리엘이 다행히도 라파엘로가 행동을 취하기 전에 조치를 취했다. 라파엘로는 성격
이 차분한 듯 유리엘과 함께 가이런을 소장실로 데리고 갔다. 으음, 성격이 차분한게
아니라 유리엘한테 꽉 잡힌 것일 수도 있겠군.
소장실에는 어느새 돌아온 소장이 있었다.
"흐음, 무슨 일이냐? 아니! 가이런!"
"아시는 마족인가요?"
"그 마족은 내 손님일세!"
왠지 유리엘과 가이런의 첫 만남 때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군. 역시나 소장은 그 때처
럼 가이런을 라파엘로에게 소개했다.
"....이렇게 된 거니, 앞으로는 비밀로 해주게. 유리엘 너도 마찬가지고. 아 참. 라파
엘로는 나를 도와서 이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네."
녀석, 어린 나이에 부를 얻었군.
"그럼 난 늦었으니 잠을 자러 가야겠네. 자~ 모두 잘 자게."
소장은 마치 약장수 같은 목소리로 굿 나잇(good night)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잠깐 나 좀 보죠, 가이런."
라파엘로는 가이런을 끌다시피 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라파엘로, 마족이랑 단둘이 들어가서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유리엘은 마치 바가지 긁는 아내처럼 말하면서 그들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맞
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은 라파엘로는 침대에 걸터앉은 가이런에게 물었다.
"몸도 멀쩡한 것 같은데 왜 그냥 맞고 있었습니까?"
"소란스럽게 하면 천사들이 더 몰려나올까봐 그랬죠. 적이 늘어나서 좋을 건 하나도
이로울게 없고, 또 이 안에 마족이 있다는 것을 많은 천사들이 알게 되면 더욱더 힘들
어지게 되죠."
"논리적으로 말씀하시는 군요. 그럼.... 거기에 숨어있던 것은 무슨 속셈이었죠?'
"숨, 숨어있었다뇨? 그냥 산책하던 중에 그렇게 된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죠. 당신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핏빛으로 빛나더군요. 혹시...."
"호,혹시 뭐요?"
"혹시... 당신,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아니겠죠?"
라파엘로의 혹시라는 말에 죄지은 사람처럼 뜨끔해 하던 가이런은 라파엘로가 이어서
내놓은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전혀 아닙니다. 근데 대마초가 뭐죠? 유리엘도 대마초를 피웠느니 안 피웠느
니 하던데?"
"거짓말 같지는 않군요. 대마초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죠. 흡입하면 환각을 느끼게
됩니다. 천국에서는 쾌락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있어서 마약을 단속하죠. 게다가 올해
는 '마약퇴치의 해'이고, 특별단속 중이라서.. 하하. 말이 좀 길었군요. 그럼 편히 쉬
시죠. 가자 유리엘."
유리엘은 가이런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 불만인지 뾰루퉁한 표정을 지
으면서 나갔다. 라파엘로가 나간 후에 가이런은 침대에 털썩하고 누웠다.
"겉으론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지만, 은근히 속으로 긴장하고 있는 눈치였어. 한 순
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어. 훌륭한 인재가 하나 있군."
가이런은 그 말을 끝으로 잠들었다. 라파엘로라... 분명 아까 전의 날렵한 동작은 뭔
가 있어.... 고급 전투 천사보다도 빠른 스피드와 단숨에 기절시키는 정확한 손놀
림.....
"이봐요! 가이런인지 홈런인지 얼른 일어나요. 아빠가 부르신다고요!"
가이런의 솜사탕같은 단잠을 깨우는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리엘이었다. 가이런
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일어났다. 어제 맞은 후유증은 전혀 없는 듯했다.
"얼른 세수하고 소장실로 와요!"
가이런은 방에 붙어있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하~암. 세수를 해야지."
가이런은 세수를 한다면서 물도 틀지 않고 있었다. 순간, 가이런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다 싶더니 눈곱과 거칠게 일어난 각질 등 불필요한 이물질들이 타서 없어졌다. 아
무래도 몸 속에서 순간적인 열을 발산해서 쓸모없는 것을 태워버리는 방법 같았다.
"이 방법을 사용해서 이를 닦으면 브레스(breath-영어의 뜻으로는 숨을 쉬는 것을 나
타내나 판타지영역에서는 드래곤이 입이나 콧구멍을 통해 내뿜는 불이나 가스, 냉기
등을 일컫는다)를 내뿜어야 겠지?"
가이런은 입안을 데이기는 싫었는지 화장실에 비치된 칫솔과 치약으로 이를 닦고 소장
실로 향했다.
"왔는가?"
"무슨 일이시죠?"
"유학을 왔으니까 공부를 해야겠지?"
"서,설마 책 펴놓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겠죠?"
가이런은 역시 석두(石頭-돌대가리)다운 발언을 했다.
"다행히도 아니네. 나도 이론을 가르치는 것은 따분해서 못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장실 바닥의 나무결 중의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소장실 벽의 책장이 열리면서 또 다른 방이 나타났다. 아니, 마치 엘
리베이터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또 다른 공간이 있네. '시간의 방'이라고 하지. 천계
와 지옥이 하나일 때 공동 수련의 목적으로 만든 방일세. 바깥의 시간보다 훨씬 시간
이 느리게 가지. 아마도 거기서 1년간 수련을 해도 이 바깥에서는 6시간 밖에 지나지
않을 거야."
"이런 방이 있다는 게 놀랍군요."
"특수한 마법을 사용해서 만들었다고 하더군. 자, 이제 들어가세.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네와 잠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갔다고 해놨네."
소장은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가이런이 따라 들어가자 책장은 저절
로 닫혔고, 약 2분 동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그 곳에는 거대한 도장(道場)이 있
었다. 가운데에 거대한 태극무늬가 있는 도장은 그야말로 거대한...... 먼지 구덩이였
다.
"우선은... 청소부터 해야겠구만. 아, 여기선 마기를 사용할 수가 있다네."
"그러면 청소가 간단해 지겠군요. 흡!"
가이런은 두 손에서 거대한 화염을 뿜어내서 도장의 먼지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가이
런은 불을 잘 컨트롤하진 못했지만 마음껏 발산할 수는 있었다. 가이런은 그 이점을
살린 것이었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그럼 어지 진맥을 해볼까? 잠시 누워보게."
가이런이 바닥에 눕자 소장은 가이런의 몸 이곳저곳을 지긋이 짚어보더니 말했다.
"몸 속에 강대한 두 기가 얽혀있군. 두 기가 반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를
잘 사용하지 못했던 거야. 두 기를 융합시킨다면 정말 놀라운 힘을 갖게 되겠군. 허
나....."
제 6 화 끝
제 7 화
업그레이드 컴플리트(upgrade complete)-2
"무슨 문제라도...?"
"두 기를 융합시키려면 막대한 양의 마력이 소요되네. 하지만 문제는 딴 곳에 있어."
"뭔데요?"
"아무래도 태극권을 써야할 것 같은데... 난 태극권을 모른다네."
"왜 하필 태극권이죠? 그냥 융합 마법 같은 걸로 하면 안 되요?"
"자네는 자신이 마족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나?"
"아~~ 그렇구나."
"그리고 이 서양 쪽의 융합마법은 완벽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지."
소장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태극은 융합을 상징하지. 그 무늬를 보면 금방 이해가 갈게야."
가이런은 도장 한가운데의 태극무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 가운데의 물결.... 그
리고 물결을 사이로 있는 붉은 색과 푸른 색. 한눈에 보기에도 융합을 상징하는 듯이
보였다.
"동양은 서양보다 훨씬 일찍 융합의 의미를 각성했다 할 수 있지. 지금도 서양은 융합
의 의미를 모르고 있어."
가이런은 아리송한 말을 듣자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소장은 그런 가
이런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융합은 단지 힘이 합쳐지는 것이 아니야. 진짜 뜻은 정신세계의 합일(合一)이지. 그
리고 하나 말해볼까?"
"뭘요?"
"지금 자네 안의 두 힘은 신과 마일세."
가이런은 머리가 텅 비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 신과 마라뇨? 전 마족 아닌가요? 근데 왜 그냥 마가 아니라 신과 마죠?"
가이런은 머리 속이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이 멍한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
"알려고 하지 말게. 다쳐."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구료? 소장 선생.
"다치긴 뭘 다쳐요!!!"
"자네 마음을."
가이런도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자네 속을 괜히 알려고 하지 말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어 있어. 이게 다 운명이
야."
"여하튼 간에, 융합을 하든 분리를 하던 간에 방법이나 있어요?"
"글쎄.... 생각 좀 해봐야지."
"흐으으음~"
둘은 도장 바닥에 앉아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가이런은 한참동안 턱을 괴고 앉
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엔 벌떡하고 일어나서
고래고래 소릴쳤다
"에이 띠벌!!! 이게 뭐야! 괜히 레드 데블슨가 뭔가 들어갔다가 괜히 고생만하고, 차
라리 똥지옥에 있는 게 낫겠다."
가이런은 씩씩거리면서 분을 삭히고 있었다. 그 때 가이런의 머릴 번개같이 스치는 것
이 있었으니..
"맞아! 똥지옥! 그 녀석이야! 소장님 여기 통신되죠?"
"으음, 그렇다네. 뭔가 좋은 생각이 있는가?"
"물론이죠."
"저 쪽 문으로 들어가면 컴퓨터가 있을 걸세."
가이런은 발에서 불이 나도록 달려서 컴퓨터를 켜고는 얼른 조작해서 화면에 무언가
를 띄웠다. 또.... 지존신이었다.
"아~ 누구세요?"
"눈 어디에 갖다 팔았어요? 나요, 나!"
"어? 너냐? 무슨일이야?"
"거기 똥지옥에 이연글(이 글을 꾸준히 읽으신 분들은 아실겁니다)있죠?"
"응, 지금 모범수로 출옥할 예정이야. 지금 옷 갈아입고 있어."
"안돼~~~~!!!"
가이런은 동물의 포효와 같이 커다랗게 소릴 질렀다.
"왜~~~~~~!!!"
지존신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업그레이드되려면 그녀석이 필요해요! 지금 당장 보내줘요."
"내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 녀석을 너한테 보내주냐?"
"유학보낼 땐 언제고....."
"싫음 말아라."
지존신은 마치 애처럼 굴었다.
"에이~ 제가 예쁜 여자친구 소개시켜 드릴게요."
"헤에~ 진짜?"
"물론이죠. 쭉! 쭉! 빵! 빵! 으로 보내드릴게요. 물론 그녀석을 보내준다면."
"그래? 그럼 지금 곧 보내주마."
"아앗! 잠깐만~!!"
가이런은 뭔가 위협을 느낀 듯이 도장 구석으로 몸을 서둘러 날렸다. 이윽고 도장 한
가운데서 공간이 찢기고 '뭔가 거무튀튀한 것'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
이런의 마음에 텔레파시가 울렸다.
"옛다!! 받아라!!"
그 '뭔가 거무튀튀한 것'이 떨어졌다.
'철푸덕!!'
그것이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튀기는 파편들은.... 똥이었다. 그것들을 온통 몸으로 뒤
집어쓴 소장은 말이 없었다.
"에이씨! 보내면 곱게 보낼 것이지, 한번 담궈서(!) 보낸 건 또 뭐냐?"
가이런은 투덜거리면서 일어섰다. 똥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연글이었다. 이연글은 일어나서 커다랗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물론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쏼라쏼라!(본 작가가 중국어를 못하는 관계로.... 죄송합니다...)
그 때 소장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지존신!! 이 씹새!! 그리고 너! 입 닥치지 못해!"
도장은 순식간에 냉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투두둑'
소장이 입고 있던 옷이 안에서 부풀어오르면서 뜯겨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불끈
거리는 거대한 근육들이 부풀고 있었다. 이런 걸 속세에서는 '람보현상(평소엔 멀쩡하
다가 빡 돌면 근육질의 람보가 되는...)'이라고 하나? 소장은 이연글을 향해 손바닥
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에서는 하얀 바람이 쏟아져 나와 이연글을 휩쓸었다. 이윽고
바람이 지나간 후 이연글과 도장바닥은 정말로 깨끗해졌다. 아무래도 클린징 마법 같
았다. 소장은 자신에게도 클린징 마법을 썼다.
"너! 이 씹새!"
소장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 같았다. 그는 이연글을 그야말로 개패듯이 패기 시작했
다. 가이런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이겠거니 하고 지켜봤는데 영혼이 깜박거리는 것으
로 보아서 소장은 끝을 볼 심신인 것 같았다. 말로해선 안 될 것 같아 가이런은 수도
로 소장의 머리 뒷부분을 내리쳤다. 그러나 소장은 기절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머리에
도 갑빠가 있던 것이었다.
"허걱, 어떻게 머리에 갑빠가!"
가이런은 도장 한 쪽에 있던 목도를 들어서 소장의 머리를 내리쳤다. 각목도 같이 있
었지만 각목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도가 부러져 나가고...
소장은 드디어 기절했다. 근데 어떻게 된 놈의 도장에 각목이 있지?
"우와~ 진짜 무서운 천사네. 욕도 막 쓰고... 근육질에 애 패는 기술까지... 너 괜찮
냐?"
"쏼라! 쏼라!"
가이런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면서 도장 한 구석의 화장실에서 물을 한 양동이 퍼와
서는 소장에게 퍼부었다.
'촤아아'
"으음..... 무슨 일 있었나?"
허헐... 완죤히 두 얼굴의 사나인데.
"에이씨, 소장님. 얘 말을 못알아 듣겠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소장은 이연글에게 회복마법과 함께 언어소통의 마법을 걸었다.
"언어 소통마법은 조금 시간이 지나야 효력이 발행할게야. 근데 물에서 왜 이리 냄새
가 나지?"
"아마... 변기 물이라서 그럴걸요?"
가이런의 그 말 한마디가 끝나자 소장은 안색이 퍼렇게 질리며 곧장 화장실로 돌진해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가이런은 소장이 "또 폭주할까봐 얼른 따라가서 소장에게 변
명하기 시작했다.
"소장님, 죄송해요. 수돗물이 안 나와서..."
다행히 소장은 폭주하진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도장에 걸어나가서 자신
의 몸에 클린징 마법을 걸고서는 주저앉았다.
"내가 왜 여깄지? 여긴 어디지?"
이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이연글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내가 널 불렀지."
"허억, 당신은!"
이연글은 가이런을 알아보는 듯했다.
"누구시죠?"
휘청! 가이런은 김빠지는 듯 다리를 휘청거렸다.
"네가 똥지옥에 있을 때 내가 널 관리했었지."
"아~!"
이번에는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뭐라고요?"
"이 새끼가 진짜!!"
가이런은 이제 화가 나는지 소장의 회복마법으로 회복된 이연글을 개 패듯이 팼다.
'퍼버버벅!'
"으아악! 농담도 못해요?"
가이런은 그제야 손을 멈추었다. 코에서 씩씩거리면서 김을 뿜어내는 가이런의 얼굴
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나저나 왜 부른 거죠?"
"내가 너한테 도움을 받을 게 있어서 말이야."
"그게 뭔데요?"
'내 안에 두 가지 기운이 얽혀 있어서 그걸 융합시켜야 해."
"그걸 융합시키기 위해서 태극권을 사용하려고 날 불렀단 말이군요."
"제법 머리가 좋군."
"제가 한 때는 한 머리했죠."
"그런 새끼가 반(半)또라이 짓을 해!!"
'퍼버버벅!!'
어느 새에 일어났는지 소장이 가이런을 말렸다.
"헉헉!! 씨벌눔!!"
가이런은 이제 때리는 것도 지쳤는지 헉헉대고 있었다. 소장은 그런 가이런을 뒤로하
고 이연글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태극권을 쓸 줄 아는가?"
"네, 그나저나 주먹이 드럽게 세네요."
"야 이 자식아, 내가 주먹으로 서열 44위에 오른 놈이야."
이번에도 소장은 가이런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태극권..... 기억하고 있나?"
"흐음..... 좀 옛날 영화라서...."
이연글은 뺀질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가이런이 발끈해서 소릴 질렀다.
"이 새끼가!! 진짜 죽도록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데!!!"
이연글은 움찔하면서 대답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기억납니다."
"그럼 시술해 주게."
"네! 근데... 더 편한 옷은 없나요? 도복이라던지...."
"물론 있네. 이 곳에서 여러 가지 격투기술을 배우면서 또한 여러 가지 도복을 사용했
기 때문에 없는 도복이 없다네. 저 쪽 문에 들어가면 있을 걸세. 가이런 자네도 가서
갈아입고 나오게."
금방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
"가부좌를 틀고 앉으시지요."
가이런은 다리를 꼬고서 도장에 앉았다.
"뭐해! 빨리 안하고."
"우선 당신의 기를 느껴야지 대처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
쉬십시오."
가이런은 입을 꼭 다물고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연글은 가이런의 몸을 천천
히 둘러보고서 진맥한 결과 입을 열었다.
"기가 너무 강대해서 제 기로는 융합시킬 수는 없겠군요. 태극권을 직접 익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제 경우엔 완벽히 익히는데 2년이 걸렸죠."
"2년이면 바깥에선 12시간 밖에 안 되니 해 볼만하겠군."
가이런은 그렇게 수련에 들어갔다. 일단 태극의 원리를 깨닫는데 2개월이 걸렸고, 정
신적 훈련으로 4개월을 소비, 육체적 훈련으로 3개월, 태극권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는데 1개월이 걸렸다. 실로 놀라운 속도였다. 그렇게 수련은 끝났고, 가이
런은 가슴속에서 폭발하듯이 융합하는 두 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딱 일주일을
도장바닥을 굴렀다. 용암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뜨거움과, 극한(極寒)의 얼
음 화살이 가슴을 꿰뚫는 듯한 차가움이 가이런을 고통스럽게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가이런이 때굴거리는 갑자기 멈추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연기
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운데서 가이런이 걸어나왔다.
처음에 가이런이 구르기 시작할 때에는 이연글과 소장은 매우 걱정했으나 며칠을 굴
러도 가이런이 멀쩡하자 그들은 가이런을 구르는 채로 내버려두고서 할 건 다했다. 그
랬던 그들이 가이런이 걸어나오자 놀라는 건 당연했다.
"허걱! 머리 색깔이!"
이연글이 걸어오는 가이런을 보고서 소리쳤다. 머리색깔이 어떻길래...? 헉! 머리색깔
이 회색이 되다니! 가이런의 머리 색깔은 원래 섬뜩한 핏빛이었으나, 무슨 일인지 머
리 색깔이 바뀐 것이었다.
"아무래도 신의 색깔인 흰색과 마의 색깔인 검은 색의 중간인 회색으로 변한 것 같
군. 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모양이군. 축하하네, 가이런!"
가이런은 10개월 동안 다듬지 않아 장발이 된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왔다. 그리고는
딱 한마디를 던졌다.
"업그레이드는 ... 끝났어."
제 7 화 끝
제 8 화 -1
월광(月光) 소나타
훈련이 모두 끝났으므로 나머지는 부작용이 있는지를 살피는 일만 남았다. 우선은 소
장실을 너무 오랬동안 비운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세 명은 소장실에 사람이 없는 틈
을 타서 얼른 나오고는 마치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행세했다. 잠시 후 유리엘이 들
어왔고 그들은 짜놓은 각본대로 연기를 했다.
"여행이 5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누구죠?"
그랬다. 시간의 방의 속성상 시간이 너무나도 적게 흘렀던 것이었다. 거기다가 짧은
스포츠 머리가 장발이 된 가이런을 유리엘은 알아보지 못했고, 보너스로 영혼 상태인
이연글까지 꼽사리를 꼈으니 그녀가 의아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역시 소장은
두 얼굴의 사나이답게 확실하게 연기를 소화해 냈다.
"아~ 그거. 여행도중에 연락이 왔어.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가이런은 여행도중에
어떤 일이 있어서 머리가 회색장발이 되었고, 이 영혼은 여행 중에 상처입은 것을 발
견한 거란다."
그러나 유리엘은 집요했다.
"어떤 일을 당해서 머리가 변하다니요? 무슨일이죠?"
다행히도 이연글의 일은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상처 정도는 소장이 치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하여튼 가이런은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을 한참동안 생
각하다가 간신히 대답을 했다.
"(어눌한 목소리로)음, 어~, 갑자기 빛이 내려오더니(여기서부터는 다 뻥이다) 정신
을 잃었고.... 이렇게 되어있더군요."
이건 마치... UFO에 끌려가서 생체실험을 당한 사람들이 증언하는 듯한 말투군.
"믿을 순 없죠. 그거 혹시 가발 아니에요?"
유리엘은 아직도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나저나 가이런 녀석, 외모는 멋있어 졌는데,
행동이 어벙벙한 건 여전하군. 유리엘은 가이런의 머리카락을 당겨보고 들여보고 했
다.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가이런은 가만히 있었다. 다혈질인 녀석이 잘도 참고
있군.
"머리가 길어지니까 좀 봐줄 만 하네요. 어쨌든 이상한 건 사실이니까 조심해요."
유리엘은 끝까지 경계의 눈빛을 지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휴~ 십년 감수하는 줄 알았네. 그러게 머리 좀 깎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장이 가이런을 나무랐다. 그러자 가이런도 지지 않고 공격했다.
"일주일 동안 땅바닥 구르는 사람 내버려두는 사람한테 어떻게 머리를 맡겨요?"
"자네가 깎으면 되잖는가?"
"중이 자기 머리 깎는 거 본 적 있어요?"
어쨌든 간에 그렇게 시간이 갔고 어느 덧 저녁이 되었다. 땅거미가 스물거리며 기어
와 어둠을 불렀고, 어둠은 세상을 집어삼켰다. 피로에 찌든 가이런은 몸을 뒤척거리
며 잠을 자고 있었다.
'사사사삭!'
풀을 밝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와 가이런의 귀를 간지럽혔다. 결국 가이런은 잠을
깨고야 말았고, 잠을 깨게 한 녀석을 찾아서 없애겠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밖으로 나갔
다. 그러나 그 생각을 곧 접어야 했던 까닭은 그 주인공이 바로 유리엘과 라파엘로였
기 때문이었다. 가이런은 저번에 들킨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번엔 단단히 숨어
서 둘을 지켜보았다. 둘이 것고 있는 것을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쳐다보던 가이런은
또 한차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분명 둘이 밟고 있는 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
다. 그렇다면 그 답은 다른 누군가가 여기 어딘가에 이 곳에 있다는 소리였다. 더군다
나 그 소리는 상당히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제발 눈치채라, 라파엘로.'
가이런은 라파엘로가 눈치채길 바랬다. 괜히 나선답시고 밖으로 나갔다간 무슨 오해
를 받을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둘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라파엘
로는 흠칫하더니 유리엘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는 그 자리를 박차 올랐다. 둘이 날아오
른 자리에는 길고 깊게 자국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위력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은 무
기가 날아오며 들리는 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무방비 상태
에서 잘 피했다.
'역시 심상치 않은 녀석이군. 라파엘로. 안심해도 되겠어.'
가이런은 안심하며 떠나려 했다. 그 때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깊은 동굴에
서 낮게 울려나오는 소리처럼...
'케켓, 용케도 피했군. 재미있게 가지고 놀다가 죽일 수 있겠어.'
라파엘로는 전신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서 소리쳤다.
"넌 누구냐? 당당하게 정체를 밝혀라!"
그러자 그 알 수 알 수 없는 존재가 대답했다.
'나는 그림자이지. 어둠 속에선 어디에나 존재할 수가 있지.'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후훗, 그럼 게임을 시작해볼까? 어디 한번 막아봐라.'
보이지도 않는 그 존재는 또다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라파엘로는 유리엘을 돌려보내
고 나서 검을 뽑아들었다. 검을 쥔 라파엘로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공격이 날아들었다. 라파엘로는 숨을 들이키며 공격을 피했다. 도
대체 무엇을 이용한 공격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공격들...
라파엘로는 벌써 옷이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고 그 부위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
다. 보이지도 않는 그 녀석은 라파엘로를 비웃었다.
"역시 약한 녀석을 가지고 노는 건 재밌어.'
한편 숨어있던 가이런은 정말 의아했다.
'어째서 라이트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빛이 있으면 녀석을 볼 수가 있을 텐데.'
가이런은 여차하면 튀어나갈 태세로 자세를 잡았다.
라파엘로는 적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얼룩진 칼을 들고서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
이 칼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였다.
"젠장할! 마법을 쓰지 못하는 수용소의 여건을 이용하다니!"
그러자 상대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큭, 너희들이 가두고 있는 녀석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마법을 사용 못하게 하는 결
계를 치다니.... 그것이 너희 천사들의 본모습이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두려워 떨
고 있는 모습. 자신들이 잡은 녀석들이 도망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너희들, 그게 바
로 천사라는 껍데기에 싸여진 겁쟁이의 모습이지."
"그렇지 않아!"
마침내 폭발하고야 만 라파엘로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나갔다.
'겁쟁이일 뿐만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하군.'
'퍽!'
라파엘로는 명치에 묵직한 타격을 받고는 허리를 푹 수그렸다.
"으으~ 다, 달빛이 있는 곳으로.."
라파엘로는 이를 악물고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그 집념만큼은 높이 사주마.'
녀석은 품에서 검은 색 검을 꺼내서 라파엘로의 등을 향해 내리 찔렀다. 그러나 라파
엘로는 이미 날개를 펴고 멀리 떨어진 후였다. 흰색 날개 6장에 파란색 날개 6장이었
다.
'호오, 날개를 폈단 말인가?'
녀석은 다시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어딜!!"
라파엘로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달려나갔다.
'날개를 펴니 더 무식해지는 구나.'
보이지 않는 공격이 또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날개를 펼친 라파엘로는 날렵하게 공격
을 피하고서 반격을 시작했다.
'이제 조금 쓸만하지만.. 허나!!'
"허나 뭐냐!!!"
'이제 죽어줘야겠다!!'
순간 라파엘로의 앞에서 공격을 피하고 있던 녀석은 흐릿한 그림자만 남기고 라파엘로
의 뒤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윽, 모, 몸이.."
라파엘로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녀석은 웃음을 흘리며 라파엘로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그 때 회색 궤적이 나타나 그의 손에서 검을 날려보냈다.
'뭐냐!!!'
회색궤적은 녀석을 무시하고 라파엘로를 흔들고 있었다. 바로 가이런이었다.
"이봐! 이봐! 정신차려!! 이런.... 안 되겠군."
가이런은 뒤에 있는 녀석을 무시하고 라파엘로를 살폈다. 그러나 살펴본다고 한들 어
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한거냐!!"
'동양에서는 혈도를 짚는다고 하더군..'
"도대체 라파엘로를 왜 없애려고 하는 거지?"
가이런은 자세를 잡으면서 말했다.
'그분은 이 세계를 가지려고 하시지. 그리고 그 첫 번째 단계가 이 녀석을 없애는 것
이지. 너도 나와 상대할 참이냐?'
"당근 말밥이지!!!!"
가이런은 힘차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도대체 <그분>은 누구지? 그리고 세계정복이 라파엘로와 무슨 상관이지?'
그 때 녀석이 말했다.
'무기를 뽑지 않느냐?'
"갑자기 끌려와서 검을 못 챙겼어."
'나를... 맨손으로 상대하겠단 말이냐?'
녀석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Hey!! come on~~~"
가이런의 되지도 않는 영어와 함께 또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쇄도하는 칼날들... 가
이런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오는 칼날의 옆면을 마치 거문고 줄 누르듯
이 눌러 튕겨 내었다. 녀석은 그것을 보고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허억! 어떻게 저런.'
그러나 녀석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강렬한 속도로 회전하
는 칼날이었다. 가이런이 아까 전과 같은 수법을 다시 사용한다면 손이 남아나지 않
을 것이다. 가이런도 그걸 아는지 다른 수를 쓸 모양이었다. 가이런은 손이 보이지 않
고 잔상만 남을 정도로 빠르게 두 손을 가슴 앞에서 회전시키고 있었다. 검은 벌써 가
이런의 가슴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어쩔 셈이냐!! 죽어라!!'
검이 가이런의 가슴에 꽂혔다. 아~~ 이 소설도 이젠 끝인가....
그러나 가이런은 죽지 않았다. 알고 보니 검은 회전을 멈추고 벌써 그 녀석에게로 쏘
아져 나가고 있었다. 녀석은 기겁을 하며 몸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검이 워낙
에 빨랐던 터라 녀석은 팔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크윽... 어떻게 이런...'
그러자 가이런이 녀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멍청아, 그것도 모르다니... 나는 검이 회전하고 있어서 반대로 손을 돌려서 바람을
일으켜서 검을 멈춘 후에 제대로 후려갈긴 것 뿐이야.."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 가이런이 사용한 방법은 손을 돌려 공기를 회전시키는 것이었다. 검은 면적도 적
고 거기다 앞으로 다가오는 힘을 생각한다면... 가이런이 사용한 것은 거의 환상에 가
까운 묘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 적은 면적에 공기를 부딪치게 해서 멈춘다는 것은 손
이 헬리콥터의 로터보다도 빨리 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가
이런은 벌써 싸움에 심취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녀석은 품에서 검을 하나 더 꺼내서 가이런을 향해 검 끝을 뻗고 달려오기 시작했
다. 그러자 가이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멍청아, 검은 찌르기 공격보다 베기 공격이 더...."
그러나 가이런이 말을 잇기도 전에 녀석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의 뒤통수에 뭔
가 뜨뜻한 것이 튀었다.
"이게 뭐지?"
가이런은 뒤통수로 손을 뻗어 묻힌 후 보았다. 뭔가 하얀 것이었다. 가이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개를 돌린 그 곳엔 정확히 심장에 칼을 맞은 라파엘로가 있었다. 그렇다
면 방금 전에 튄 것은 바로 천사의 피, 광혈이었다.
어이없어 하고 있는 가이런에게 녀석이 말했다.
'넌 너무 싸움에 심취해 있었어. 그리고 내가 처음 공격한 대상이 누구인지도 잊었
지.'
가이런은 분노해서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넌... 마족!!!"
그랬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어떻게 마족이.."
가이런은 과거가 있어 괜찮다지만 녀석은 어떻게 천계에 들어와서도 이렇게 멀쩡할
까.. 그게 가이런은 궁금했다.
'신력을 일그러뜨리면 가능한 일이지. 마기를 마치 비누방울처럼 만들어 주위에 씌우
면 신력과 반발이 적게 할 수가 있지. 그런데 너는 마족이면서도 마기가 느껴지지 않
는군. 그리고 여기 머무르는데 이 방법도 사용하지 않고 있구나. 어떻게 하는 거지?'
"입닥쳐!!"
'훗, 나도 임무만 마치면 그만이니 이만 가지.'
'팟!'
녀석은 사라졌고 가이런은 라파엘로에게로 달려갔다.
"이봐!!! 라파엘로! 괜찮아?"
라파엘로의 생명의 불씨는 이미 꺼져가고 있었다. 가이런은 지혈은 완력으로 할 수가
있으니 칼을 뽑으려고 했다. 품에 검을 여러자루 넣어 다니는 녀석인 만큼 확실을 기
하기 위해서 칼날에 독을 칠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이런은
칼을 뽑을 수가 없었다. 칼날이 마치 톱날처럼 되어 있어서 무식하게 뽑았다가 즉사였
다. 가이런이 라파엘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기침을 심하게 하며 광혈을 뿜어내는
그의 몸이 흔들려 검이 고통을 주지 않도록 검자루를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라파엘로
의 마지막 불씨가 최후의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 넌 괜찮은... 쿨럭!! 쿨럭!! 유, 유리엘을... 그녀는 비, 빛의.. 쿨럭!! 으
윽... 그녀를 부탁... 꼭...."
'툭.'
라파엘로가 고개를 떨구고 그는 빛으로 화(化)해서 없어졌다. 가이런의 손에는 광혈
이 묻은 칼만이 들려있었다. 가이런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려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의 몇발짝 앞에 유리엘이 서 있었다.
"!!!"
유리엘의 몸이 흔들거린다 싶더니 그대로 풀썩하고 쓰러졌다. 가이런은 전혀 말이 없
었다. 단지 유리엘을 어깨에 들쳐 메고 묵묵히 소장실 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유리
엘은 가이런이 걸으면서 흔들리는 바람에 다시 깨어나고 말았다. 난동이라도 부릴 줄
알았지만 의외로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왜 죽인거지?"
"......"
"말하지 못해!!"
"......"
'퍽퍽!!'
강하진 않았지만 신력이 실린 주먹들이 가이런의 등에 날아들었다. 가이런은 움찔거리
면서도 계속 걸음을 옮겼다.
"왜, 왜 죽인거야! 왜~~~!!!!!"
주먹이 날아드는 횟수가 준다 싶더니 유리엘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얇은 잠옷만을 걸
친 가이런의 등이 촉촉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가이런은 계속 무겁기만 한 발걸음을 옮
겨 소장실에 다다랐다.
'끼익'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가이런이 나올 땐 없었던 소장이 서류를 쌓아놓고 일하고 있었
다.
"가이런인가? 밤 늦게 자다가 밀린 일들이 생각나서... 여기 와서 이것들을 좀....!!
아니 !! 무슨 일인가?!!"
소장은 가이런의 등에 실신한 채로 늘어진 유리엘과 그의 손에 들린 광혈이 묻은 칼
을 보고 소리쳤다.
"라파엘로가... 정체불명의 마족의 습격을 받아 죽었... 습니다."
"서, 설마.. 정말인가?"
"미리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 제 실수였습니다..."
"이럴 수가, 유리엘은 왜 그런건가?"
"제가 라파엘로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칼자루를 잡고 있던 것을 보고서..... 제가 그
를 죽인 줄로 알고 마구 울다가... 실신했습니다."
"흐음.... 이런 일이 이 안에서 생기다니.."
소장은 라파엘로의 죽음이란 커다란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냉정을 찾았
다. 그는 유리엘을 소장실 소파에 눕히고 가이런에게 말했다.
"태극권의 부작용은 없는 것 같군. 원래 천계에서 좀 더 머무르다 가도 되는 것을...
천사가 죽으면 명부에 곧바로 기록되니 마족이 여기 있어서 이로울 것은 없을 거야.
여길 뜰 수 있게 해 주겠네."
소장은 뭔가 주문을 영창했다. 그러자 공간이 서서히 열렸다.
"자네가 라파엘로를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자네를 믿겠네. 가이런."
소장은 깊은 신뢰의 눈빛을 눈동자에 담고 말했다. 그러자 가이런이 대답했다.
"유리엘에게는 그냥 제가 죽인 걸로 해 주십시오. 정체도 모르는 녀석에게 죽음을 당
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제가 죽였다는 것이 견디기 쉬울 수도 있으니까요."
가이런은 그 말만 남기고 공간의 틈으로 들어갔다. 공간의 틈이 다시 닫히고 가이런
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가 않았다. 달빛이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밤에 일어난 일이었
다......
제 8 화 끝
제 9 화 신(新) 지옥 습격사건
'척!'
처음 천계에 떨어질 때와는 정반대로 가이런은 멋지게 공간의 틈을 벗어나 착지했다.
"얼~! 많이 바뀌었는데? 띨뻥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냐. 회색 장발에..."
여전히 쉴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지존신이었다. 그리고 가이런은 확실히 바뀌긴 바뀌
었다. 예전의 가이런 같았으면 저 잘났다고 날뛰기라도 했을 텐데 그는 조용히 걸음
을 옮길 뿐이었다. 괜히 무안해진 지존신은 그 나불거리던 입을 꼭 다물었다. 뒤 따
라 나온 이연글에게 지존신은 말했다.
"쟤 왜저러냐?"
이연글은 모른 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신력으로 이루어진 언어소통의 마
법이 깨진 모양이었다.
가이런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의 방에 다다랐다. 천천히 걷는 그의 앞에 두 개의 그
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든 그의 눈 안에 들어온 것은 케페니어스와 헬리엇이었다.
"이게 누구야! 가이런 아냐!"
"어! 진짜네. 너 많이 변했다~. 얼~ 멋져 졌는데?"
"......"
그들의 소란을 아까 전과 같이 침묵으로 눌러버린 가이런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밖
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우리가 너 없는 동안에 빡빡 닦았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줘야지!"
가이런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밖의 소란은 얼마 있지 않아 그쳤다. 눈을 감은 가이런
의 머릿속에서 오토리버스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장면은 라파엘로의 최후였다.
'너... 넌 괜찮은... 쿨럭!! 쿨럭!! 유, 유리엘을... 그녀는 비, 빛의.. 쿨럭!! 으
윽... 그녀를 부탁... 꼭....'
유리엘을 부탁한다고 라파엘로가 말했다. 하지만 가이런은 혼자서 떠나왔을 뿐이었
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더욱더 가슴을 저미는 것은 그가 아는 존재
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자신과 대화하던 존재가 그 입으로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는 것을 그는 처음 본 것이었
다.
가이런은 침대 위에 엎어져 침대 시트로 입을 막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제기랄!!!!! 으아아악!!!"
.
.
.
'너... 넌 괜찮은... 쿨럭!! 쿨럭!! 유, 유리엘을... 그녀는 비, 빛의.. 쿨럭!! 으
윽... 그녀를 부탁... 꼭....'
"헉!헉!허억!"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가이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왜! 왜 자꾸 나타나는 것이냔 말이다!!!!"
가이런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가 너에게 무엇인데 이러는 거야!!"
그의 눈가에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고여가고 있었다.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가이런이 천계로 떠나가기 전까지 했던 그 훈련은 이제 양
식이 약간 바뀌어서 마법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가이런이 다시 돌아오고 했으니까 간단한 것으로 몸 좀 풀고 시작하자! 헬리
엇 빼고 나머지는 파이어 볼(fire ball)로 저기 있는 표적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파이
어 볼 일발 장전!!"
입고 있던 망토는 아니지만 인간계에선 로브라고 불리는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데메른
이 빠르게 파이어 볼을 날려 표적의 머리를 깨끗하게 날려버렸다. 케페니어스는 데메
른보다는 작지만 그럭저럭 볼만한 파이어 볼로 표적을 박살냈다.
"다음!"
지존신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다음! 가이런!"
퍼뜩 정신을 차린 가이런은 금새 파이어 볼로 표적을 날려버렸다.
"너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졌냐?"
지존신이 따지듯이 가이런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훈련이다. 장거리 저격
에 대비한 보호막 형성이야. 헬리엇은 몸으로 때우면 되니까 빠지고, 나머지는 자기
가 원하는 속성으로 보호막을 만들어봐."
이번에도 데메른이 먼저 보호막을 쳤다. 옅은 철회색이 도는 것으로 보아 쇠와 관련
된 보호막인 듯 했다.
"그럼 강도를 시험해 볼까?"
지존신은 멀리 떨어져서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를 날렸다. 지존신의 파이어 애로
우는 데메른의 보호막과 부딪친 후에도 힘을 잃지 않고 계속 기세를 올려 밀고 나갔
다. 결국 데메른의 보호막은 파이어 애로우에 뚫렸고, 파이어 애로우는 지존신이 거두
었다.
"강하지만 아직 멀었어. 더 열심히 하도록. 다음 케페니어스."
케페니어스도 보호막을 쳤지만 지존신의 보호막에 뚫리고 말았다.
"너도 더 열심히 해봐. 다음 가이런."
가이런이 멍한 얼굴로 보호막을 쳤다. 일렁이는 불길 사이로 가이런이 보였다. 지존신
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녀석. 한번 놀라봐라.'
지존신이 파이어 애로우를 힘차게 날렸다. 아까 둘에게 날아갔던 것보다 힘이 더욱 들
어간 듯 보였다. 그러나 지존신의 생각과는 달리 놀라는 것은 가이런이 아니라 그 자
신이었다. 파이어 애로우가 가이런의 보호막에 부딪치는 순간 방향을 바꾸어 더욱 맹
렬한 기세로 자신의 방향으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지존신은 급히 마기를 사용해서 파이어 애로우를 소멸시켰다. 그의 이마에 한줄기 식
은땀이 흘러내렸다.
"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가이런은 그 때까지도 멍한 상태로 있었다.
"야! 훈련 끝났다니깐."
헬리엇이 소리치자 가이런은 그 때서야 훈련장을 나갔다. 훈련장을 나온 그는 어딘가
를 향해가기 시작했다. 곧 그가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 도착한 그는 신
화와 역사에 관한 책을 쓸어가기 시작했다.
"뭘 찾으시죠?"
어느새 도서관 사서가 가이런 옆에 서있었다. 가이런이 짧게 대답했다.
"신화와 역사."
그러자 사서가 곧바로 책 한 권을 집더니 말했다.
"그런 거라면 지옥습격사건에 대한 걸 읽으셔야죠."
가이런은 책을 집어 내리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지옥... 습격사건?"
"아, 그건 일반인들이 하는 말이구요, 정식 명칭은 천마전쟁이라고 하죠. 이 책을 본
다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사서는 책을 쥐어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가이런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사전으로 보이
는 것을 꺼내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빛,빛,빛..... 없네."
빛이라.... 그는 라파엘로의 마지막 말의 '빛의.....'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찾
지 못하고 그 책을 덮고 아까 사서가 건네준 책을 펼쳤다.
"천마전쟁은...... 디아블로의...... 되었다..... 라파엘은...라파엘?"
가이런은 꾸벅거리면서 책을 읽다가 라파엘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자 상당히 놀라며 책
을 고쳐 잡았다.
"라파엘로와 이름이 비슷한데? 어디 찾아볼까?"
가이런은 아까의 사전을 펼쳐 라파엘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찾았다. 라파엘. 3대 천사 중의 하나. 천마전쟁 당시 나머지 3대 천사의 두 명과 연
합, 디아블로를 공격했음. 엄청난 지력과 괴력을 고루 지니고 있음. 현재에도 현존하
고 있음."
가이런은 심각한 얼굴로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의 자손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이름과 그 뒤에 '-로'가 붙는다...그 뒤의 자손에게
는 3세..4세가.."
가이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렇다면..... 라파엘로는..... 라파엘의 아들?!!!!!"
라파엘로는 상당히 강했다. 어린 나이에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모두 라파엘의 자식이라서 그렇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제 엄청난 일
이 터진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가이런은 넋이 나간 표정
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귓가에서 사서의 책 정리하고 가라는 고함소리가 울리는 듯 했
다.
가이런은 지존신 사무실에 갔다. 지존신은 넓은 사무실의 여건을 이용해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가이런이냐? 왜 왔어?"
"할 말이 있어서요."
"여자 소개 시켜 줄려고? 언제 시켜 줄건데? 응? 응?"
"그런게 아니고요."
"그래? 말해봐. 굿샷! 골프가 꽤 되는데?"
"제가 천계에 있는 동안에 천사 하나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왔는데요..."
"괜찮아. 그런 건 다 묵시되게 되어 있어."
"저기..... 그 천사가 3대 천사 라파엘의 아들 라파엘로....."
"뭐야?!!!!!!!1"
지존신이 휘두른 골프채가 공을 맞추지 못하고 헛돌았다.
"너 지금 라파엘의 아들을 죽였다고 했어?"
"그게 제가 죽인 게 아니라 어떤 마족이 쳐들어 와서 죽였다니까요."
"어떻게 하냐? 죽었다!! 그게 얼마전의 일이냐?"
"2일 전 밤에 있던 일인데..."
"그렇다면 곧...."
지존신은 가이런을 내보내고 부하들을 시켜 전투준비를 시켰다. 유개진지를 파고, 전
투태세에 돌입했다.
"또다시 지옥습격사건이...."
낮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호막을 친 하늘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을씨년
스러웠다. 순간 보호막에 강렬한 신성마법이 충돌하며 보호막이 깨져나갔다. 전선의
맨 앞에 있던 지존신이 소리쳤다.
"전원 방어하라!!"
모든 참호의 지붕이 닫히고 기다렸다는 듯이 신성마법이 유성우(流星雨) 같이 쏟아져
내렸다.
'후두두두둑!'
지붕에 신성마법이 부딪치며 자욱하게 생긴 먼지구름이 온 사방을 가렸다. 먼지구름
이 대충 걷히고 그 속에 세 인영(人影)이 서 있었다.
"천마전쟁이 얼마나 지났다고 또다시 지옥에서 도발을 하느냐!"
분개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우린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
지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평화적으로 극복하려고 하
는 듯 했다.
"증인이 있는데도 시치미를 땔 테냐!!"
그 세 인영은 또 하나의 인영을 끌고 왔다. 먼지 구름이 겨우 걷히고 나자 그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그 천사는 가이런이 천계에 떨어졌을 때 개모닥을 하던 천사 중 하나
였다. 소장의 입막음이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이런은 뜨끔했다.
가운데에 서 있는 천사가 라파엘로와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봐서 그가 라파엘인 듯 했
고, 그 오른쪽에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끼고 서 있는 천사가 지혜와 용기의 천사 가브
리엘, 왼쪽에 번뜩이는 검을 들고 있는 천사가 힘과 파괴의 천사 미카엘인 듯 했다.
"이제 할 말이 없겠지? 라파엘로의 복수를 받아라!!"
또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법만으로 이루어졌던 아까 전의 공격과는 달리 이번에
는 가브리엘은 마법을, 나머지 둘은 육탄으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전원 공격!!!"
지존신의 목이 터져라 외치는 고함에 모든 악마군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갖가지
괴성들과 함께 악마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악마군은 3대천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곧 사방으로 예리하게 잘린 팔다리와 여러 가지 장기가 날아다녔다.
라파엘이 한 참호 안으로 들어가 연신 칼을 휘둘러댔다. 악마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
고만 있었다.
"내 아들의 한은 이것만으로 풀어줄 수가 없어!"
참호 안에서 죽음의 사신이 거대한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공중에 떠서 공격마법을 날리고 있었다. 유성이 날아오고 불덩어리가 날아
다니고 얼음화살이 악마들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세
천사 주위를 하얀 빛의 막이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시계에 장애를 받지
않는 듯 공격을 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악마들의 목이 공중을 날았다. 마족들의 검은 피
로 인해 검의 번뜩임이 곧 사라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검을 휘둘러 댔다.
"우하하핫, 이거 정말 오래간만이구만!!"
그는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뒤에서 3개의 파이어 볼이 천사들을 노리고 날아왔다. 천사들은 무시하고 전투
를 계속했다. 그러나 맷집으로 견디려던 생각이 빗나갔다. 그 파이어 볼은 상당한 힘
이 실려 있었다. 세 천사는 잠시 뒤로 물러섰다.
"누구냐! 상당한 마법이로군."
대답 대신에 그들 앞에 떨어진 라이트닝(lightning=번개. 전격마법의 하나)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이동한 그들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긴 로브를 입은 마족이었다. 바로 데
메른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우리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해...이봐 미카엘, 검 좀 빌려주겠
나?"
가브리엘은 미카엘에게서 검을 받아들고는 조용히 주문을 읊었다. 그걸 본 지존신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말했다.
"멸신의 권리를 가진 검....."
"모두 내 뒤로!!"
어느새 최전선으로 순간이동을 한 지존신이 외쳤다. 그는 양팔을 내밀고 있었다. 그
두 팔 앞에는 검은 색의 보호막이 형성되어있었다. 곧 엄청난 광풍(狂風)이 몰아닥치
기 시작했다. 지존신의 보호막의 범위에 들어가 있지 못한 악마들은 광풍에 가루로 변
해 흩날리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광풍은 거세
져만 갔다. 미카엘과 라파엘도 바람의 무서움을 아는지 함부로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
었다.
"크아아악!!"
지존신은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
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손가락이 떨어진 자리에서 검은 피가 솟구쳐
온 몸을 적셨다. 보호막을 지탱하고 있던 힘을 놓으려는 순간 어깨 쪽에서 막대한 힘
이 몰아오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말아요!!"
케페니어스가 뒤에 붙어서 마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더욱 거세져 둘이
감당하기에도 벅차졌다. 정말로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다가왔다. 그러나 데메른이 다
시 붙고, 또다시 가이런이 붙었다.
"제기랄!!!!!!"
바람에 밀리는 셋을 힘으로 헬리엇이 막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바람이 그쳤다.
바람이 그치고 나서 주위에는 황망한 벌판만이 있을 뿐이었다. 보호막 주위는 그야말
로 먼지 밖에 남지 않았다.
"막았단 말인가? 그럼 어디 친구들의 공격도 막아보시지."
가브리엘은 엄청난 마법 시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
파엘과 미카엘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또다시 대 살육이 시작되려는 찰나 헬리엇이 미
카엘을 막고 가이런이 라파엘을 막았다.
헬리엇은 어느새 엄청나게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가브리엘에게서 검을 건네 받
은 미카엘이 말했다.
"너 같은 하등 마족이 날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헬리엇은 여느 때와는 다른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으로 서열을 사고 휴가를 간 고등 마족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둘의 무기가 부딪쳤다. 무기가 격돌하며 나는 소리라고
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케페니어스와 데메른을 내려보는 가브리엘의 시선이 몹시 거만해 보였다. 그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이번의 내 공격도 막아 낼 수가 있을까?"
케페니어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우리의 것도 받아보거라!"
그와 데메른의 주위의 수십, 수백의 파이어 볼이 가브리엘을 노리고 빠른 속도로 날아
들었다. 파이어 볼들은 모두 가브리엘의 몸에 부딪쳐 폭발했다. 그러나 자욱히 생긴
연기가 걷히자 나타난 것은 멀쩡한 안색의 가브리엘이었다.
가이런은 말없이 라파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가이런을 라파엘은 광기(狂氣)가 가
득찬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도 나의 아들의 제물(祭物)이 되고 싶은 것이냐?"
가이런은 입술을 꽉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긍정의 뜻으로 알겠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칼날이 가이런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그러나 가이런은 모두
피하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이게 대천사란 말인가."
"뭣이!"
"이렇게 쉽게 흥분하고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게 과연 천계를 대표하는 대천사가
맞느냔 말이다!"
"네 놈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가이런의 급소를 노리고 날카로운 칼날들이 덮쳐왔다. 가이런은 검을 뽑아들고 원을
그리며 방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허점이 보였다. 라파엘의 칼이
원호를 그리면서 가이런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칼을 맞아야 할 가이런은 라
파엘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라파엘는 코웃음을 치며 나오기 위해 힘을 줬지만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가이런의
눈빛은 정말 불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이런이 입을 열었다.
"라파엘로가 죽을 때 내가 옆에 있었지."
"그, 그럼 네가!"
"끝까지 들어! 분명히 내가 죽이진 않았어. 단지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을 뿐이지. 그
리고! 잘 알아둬. 너희들이 우습게 죽이고 있던 게 마족과 악마지만 우리가 결코 약하
지 않다는 것을."
가이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파엘을 내팽개쳤다. 라파엘은 3대 천사답지 못하게 땅
바닥에서 구른 후 일어났다. 멀리서 가브리엘과 미카엘이 멍한 표정으로 그 쪽을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격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어
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을 라파엘이 저지했다. 만약 이유가 있다면 수치심 때문이리라.
"제, 제길. 가세."
라파엘과 나머지 둘은 공간을 열고 사라졌다. 이제 전시상황은 끝이 난 것이다. 그들
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가이런은 천천히 쓰러져 있는 지존신에게로 걸어갔다.
"괜찮아요? 무슨 신이 그래요?"
책망하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신뢰가 깔려있는 목소리였다. 지존신이 힘없이 대답했
다.
"가브리엘 그 녀석이 들고 있던 검은 멸신의 권리를 가진 검이었어. 하지만 너희들은
녀석이 어떤 공격을 퍼부을지 모르고 있길래 내가 나선 거야."
"알았어요. 이제 그만 말해요. 출혈이 심하니까."
케페니어스가 그를 부축하고 걸어갔다. 헬리엇과 데메른도, 얼마 남지 않은 악마군도
모두 떠난 그 자리에는 토막나고 구멍나고 부수어진 시체들과 가이런 만이 있었다. 가
이런은 이를 꽉 악물고 어딘가를 노려보는 했다. 꽉 쥐어진 그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가이런은 한참 동안 그러고 서 있었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달빛 아래 참호의
골을 따라 검은 피가 개울처럼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