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잠언 31,10-31; 1테살 5,1-6; 마태 25,14-30
연중 제33주일; 2023.11.19.
1. 전례의 취지와 말씀의 흐름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먼저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살펴본 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오가 집대성해 놓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종말설교에 들어 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베푼 자비와 사랑의 탈렌트를 우리가 사는 동안에 얼마나 잘 썼는지를 죽음 이후에 가게 될 하느님의 재판정에서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 자비와 사랑의 탈렌트를 잘 활용한 의인들은 자비와 사랑의 은총을 넉넉히 받게 되어 천국에 들어갈 테지만, 이 탈렌트를 쓰는 데 인색한 자들은 어둠 속으로 내쳐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판나는 그 심판의 순간이 반드시 죽는 순간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행해지는 모든 순간임을 전제로, 그 시간과 날짜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밤도둑처럼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 경고에 담긴 메시지는 최후의 순간에 도박하듯이 심판 받으려 들지 말고 살아 있을 때 매 순간 이 심판에 대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제1독서인 잠언에서는 이상적인 가정의 일상생활에서 아내 복을 누리는 남편의 처지를 칭송하고 있는데, 이를 신약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이러합니다. 신랑이자 남편은 그리스도이시고, 신부이자 아내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는 자모이지만 예수님께는 당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교회의 지체들인 신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면 구약성경에서 칭찬받는 훌륭한 아내처럼 교회의 머리이자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2. 왜 아직도 가난한 이들에 대해 말하는가?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이상과 같은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도록 권장하는 전례적이고 사목적인 배려입니다. 모든 가톨릭 신앙인들이 천국을 살다가 죽어서도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권유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함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는 표징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공동체적 삶의 버팀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려에 부응하여 신앙인들이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신앙인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고 환대하는 사회복지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돕는 이들의 숫자로 보아도 그렇고 돕는 노력의 규모만 보아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모자랍니다.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비참한 현실 속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빈의 삶을 기본으로 하고, 더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을 주님을 섬기듯이 섬길 수 있는 영성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전 주일인 오늘 주님의 식탁 둘레에 모여서 이 뜻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3.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토빗기의 교훈을 담은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는 증언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구약성경 본문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고 지혜가 가득한 토빗기 묵상을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저자의 메시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가정생활의 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아버지 토빗은 긴 여행을 앞둔 아들 토비야를 껴안고 축복을 해 줍니다. 나이 든 토빗은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영적 유언’을 남깁니다. 토빗은 니네베로 유배를 왔고 이제는 눈까지 멀게 되어 가난의 이중고(二重苦)에 놓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늘 한 가지 확신이 있었으니, 바로 자기 이름의 뜻이 그러하듯이 ‘주님께서는 나에게 좋으신 분’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로 또 좋은 아버지로 아들에게 단순히 물질적인 부(富)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따라야 하는 바른길을 증언하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평생토록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죄를 짓거나 주님의 계명을 어기려는 뜻을 품지 마라. 평생토록 선행을 하고 불의한 길은 걷지 마라”(토빗 4,5). 나이 든 토빗이 아들에게 하는 이 당부는 그저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에 그치지 말라는 것임을 이 대목에서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선행을 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어서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의로운 일을 하는 모든 이에게 네가 가진 것에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토빗 4,7).
이 현명한 노인의 말은 우리를 곰곰이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토빗이 자선을 베푼 다음에 눈이 멀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스스로도 말했다시피 토빗은 젊어서부터 자선을 베푸는 데에 온 삶을 바쳤습니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었으며, 내 백성 가운데 누가 죽어서 니네베 성밖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묻어 주었다”(토빗 1,3.17).
이러한 자선 활동을 이유로 터무니없게도 임금은 그에게서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그를 극빈으로 내모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전히 토빗을 필요로 하셨고, 토빗은 자기 직책을 되찾은 뒤에도 자신이 해왔던 일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을 향해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는 표양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한 말일 수도 있는 토빗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시다.
“우리의 축제인 오순절 곧 주간절에 나를 위하여 잔치가 벌어져, 나는 음식을 먹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 상이 놓이고 요리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그때에 내가 아들 토비야에게 말하였다. ‘얘야, 가서 니네베로 끌려온 우리 동포들 가운데에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잊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보는 대로 데려오너라. 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 그런다. 얘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마”(토빗 2,1-2). 가난한 이들의 날에 우리가 토빗의 이러한 관심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 의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찬의 식탁에 함께한 뒤에 누군가를 초대하여 주일 만찬을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거행한 성찬례는 참으로 친교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제대에 모인 우리가 모두 형제자매임을 참으로 깨닫고 우리의 축제 음식을 곤궁한 이들과 나눈다면 우리의 형제애가 얼마나 더 잘 드러나겠습니까!
토비야는 아버지 분부대로 따랐으나, 한 가난한 이가 살해당하여 장터에 던져졌다는 소식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이 든 토빗은 잔칫상을 뒤로하고 주저 없이 일어나 그를 묻어 주려고 나갔습니다.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온 토빗은 마당에서 잠들었는데 참새 똥이 두 눈에 떨어져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토빗 2,1-10 참조).
‘선행을 하는데 벌이 따르다니 이 무슨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더 깊이 들어가라고 가르칩니다. 토빗이 눈멀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주위에 있는 수많은 형태의 가난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그의 시력을 돌려주시고 아들 토비야를 다시 보게 되는 기쁨을 주십니다. 그날이 올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토빗 11,13-14).
4. 토빗의 유언에 대한 묵상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이민족 사이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토빗은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토빗의 이야기는 특별합니다. 충실한 남편이며 인자한 아버지인 토빗은 고향에서 멀리 추방되어 불의를 겪고 임금에게 박해당하며 이웃에게 냉대받았습니다. 그토록 착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는 시련에 놓였습니다. 성경에서 흔히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우리를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 토빗은 자신의 가난을 발견하고는 가난한 다른 이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을 직접 느꼈기에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하고 아들 토비야에게 전하는 말은 그의 참된 유언이 됩니다. 곧, 가난한 이를 만날 때마다 우리가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라면 누구든”이라는 토빗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모든 이가 우리의 이웃입니다. 피부색도, 사회 계층도, 출신도 무관합니다. 나 자신이 가난할 때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빤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고 부름받습니다.
5.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특히 섬세하게 헤아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풍족한 생활양식을 택하라는 유혹과 압박이 커져 가는 반면, 가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하곤 합니다. 젊은 시절에 재산을 모으지 못한 연로한 세대도 많지만, 절대 다수의 젊은 세대는 아직 재산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합니다. 그리고 이 젊고 가난한 세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화적 변화에 가장 취약하기 때문에, 원만하게 적응하지 못하면 늙어서까지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 참조)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고서 이 비유를 듣던 바리사이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죽을 뻔한 그 유다인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한 그에게 다시 쐐기를 박듯이 말씀하였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의 이 비유와 당부 말씀은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저마다에게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위탁하기는 쉽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선을 베풀도록 성금을 내는 것도 관대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을 돌보는 데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연령대와 각계각층의 그들은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우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 곧 스스로 묵묵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엇을 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청하고, 관계를 맺으며,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원인을 이해하고 대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필요는 물론 영적인 필요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개개인의 온전한 발전을 위하여 힘씁니다. 이 관대하고 이타적인 봉사로 하느님 나라가 현존하고 드러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과도 같이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려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루카 8,4-15 참조). 이러한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증언이 더욱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6. 요한 23세의 메시지
반포 60주년을 기념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 성하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의 다음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 육신 전체, 생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양식, 의복, 주거, 숙식 등에 관한 권리가 있으며 의사들의 치료와 그 외 정당한 사회적 봉사 등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인간은 병고, 노동력의 결여, 과부 신분, 노환, 실업 등에 처했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존 방법을 상실하는 경우에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11항).
말씀이 실현되려면 여전히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특히 정치 지도자들과 입법자들의 진지하고 효과적인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공동선을 위하여 식별하고 봉사하는 데에 따르는 온갖 제약과 때로는 정치적 실패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자발적인 헌신의 가치를 믿는 시민들 사이에서 연대와 보조성의 정신이 꾸준히 길러지기를 바랍니다. 공적 제도가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촉구하고 압력을 줄 필요도 물론 있습니다만, 모든 것을 ‘위로부터’ 받으려고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변화와 책임의 과정에 참여하고 동행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앞서 언급한 가난의 형태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다시 한번 인식하여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전쟁의 상황에 휘말린 사람들, 특히 평온한 현재와 품위 있는 미래를 빼앗긴 어린이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상황에 길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이며 정의와 대화를 위한 헌신의 열매인 평화를 증진하고자 끈기 있게 모든 노력을 기울입시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투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많은 가정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극적인 물가 급등을 일으켜 왔습니다. 수입은 빠르게 바닥나고 모든 이의 존엄성을 위태롭게 하는 희생이 강요됩니다. 어떤 가정이 영양 섭취를 위한 음식과 병원 치료 사이에서 선택하여야 한다면, 이때 우리는 인간 존엄성이라는 이름으로 두 이익 모두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노동계 안에서 빚어지는 윤리적 혼란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노동자에게 가하는 비인간적 대우,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대가, 고용 불안이라는 참상, 그리고 때로는 안전한 일터보다 즉각적 이익을 선택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과도한 재해 관련 사망자 수 등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강조하신 다음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하여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노동하는 인간」, 6항).
그 자체로 심각한 괴로움인 이러한 형태의 가난들은 이제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빈곤의 실태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점점 더 두드러지는 가난의 형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낙오된 패배자’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문화는 그들에게 허상을 만들어 내어 얼마나 많은 좌절과 얼마나 많은 자살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이러한 치명적 영향에 대항하도록 그리고 그들이 자기 확신을 가지고 너그러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도웁시다.
가난한 이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수사적 과장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는 통계와 숫자라는 수준에 머물려는 교활한 유혹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는 인격체로서 얼굴, 이야기, 마음과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장단점을 지닌 우리의 형제자매이므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토빗기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끼는 데 요구되는 화합을 촉진하려면 우리가 서로를 찾아내고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그저 재빨리 내미는 도움의 손길 이상입니다. 이는 가난이 훼손한 올바른 상호 인격적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비와 애덕의 유익을 누리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7. 우리를 이끄는 천사의 손길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복음의 현실주의, 즉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천사의 손길임을 알아차리는 영성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나눔은 단지 남아도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식별이 요구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희망과 열망이 아닌 우리 형제자매의 진정한 필요를 인식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우리의 인류애, 사랑에 열려 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신앙은, 모든 가난한 이가 하느님의 아들딸이며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올해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L’Histoire d’une âme)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한 애덕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참아 견디며, 그들의 약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들이 행하는 극히 조그만 덕행까지도 본보기로 삼는다는 것임을 나는 깨닫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등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비추고 즐겁게 하여야 하는 애덕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Ms C, 12r°).
우리의 집인 이 세상에서는 모든 이가 애덕의 빛을 경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빛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데레사 성녀의 굳건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면모에 언제나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주기를 빕니다.
2023년 11월 19일
교황 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