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년 가을, 나에게는 두 여자가 있었다.
그 가을, 나의 전쟁이었다.
몇 달간의 묵호의 시간은 온통 싸움 뿐이었다.
그런 싸움은 그 이전도 그 이후로도 없었다.
도무지 되먹지 못한 싸움이었다.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철부지 어린 깡패들의 설익은 싸움이었다.
묵호 발한 삼거리 양복점 유리창을 깨고, 유리 조각을 들었고 손에는 피가 흘렀다.
내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지 몰랐다. 옷깃을 여미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왔고, 하늘은 정처없이 맑았다.
전투기가 하늘을 날며 꼬리에서 하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발한 삼거리는 주말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관중이 되어 우리를지켜보고 있었다.
“덤벼! 개새끼들아!”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놈들은 서서히 뒷걸음 치고 있었다. 이미 한 놈은 내 발길질에 양복점 유리창 너머에 쓰러져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 싸움이었다. 그 동안의 작고 어설픈 싸움들은 그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놈들과 묵호역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화해를 했다. 사실 특별히 우리들은 마땅히 싸울 이유도 없었다.
강릉 명문고에서 전학 와서 아니꼽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역시 바닷가날깡패새끼들은 순진했다.
그 날 한 여자를 만났다. 발한 삼거리에 넘처났던 사창가로 가는 것이 내가 승리한 선물이었다.
첫 경험이었다.
“남동생 대학 보내려고요”
뒤돌아 누워 가냘픈 어깨를 보이며 그녀가 한 말이었다.
내 또래의 그녀에게 왜 몸을 파느냐고 물었고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녀가 했던 그 짧은 말은 내 삶을 커다랗게 변화 시켰다.
남 동생 대학 보내기 위해 몸을 판다니. 나는 대학 가기 싫어서 묵호에 왔는데.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대학이라도 갈 수가 있는데.
누나가 몸을 팔아서 까지 가야하는 대학이라는 곳이 도대체 뭐길래.
그것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묵호항 앞의 쌀집 딸이었다.
그 당시 쌀집은 돈을 자루로 벌었다. 오징어 잡이 어선들과 원양 어선들은 항구를 떠날 때는 그녀의 쌀집에서 쌀을 사서 실었다.
그녀는 돈 많은 쌀집 딸년이었고, 묵호에서 소문난 미인이고 바람둥이였다.
대학생 애인도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내가 좋은지 내 주변에 항상 있었다.
그것 말고는 그녀와의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대학생 애인이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와서, 말을 함부로 하며 나의 뺨을 때렸다.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녀 애인의 입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왔고, 나는 강릉으로 도망을 갔다가 서울 망우리 이모집으로 피신을 했다.
내가 벌인 악행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숨겼다.
어린 어머니 혼자 등에 막내 여동생을 업고와서 양복점 유릿값을 물어 주었고, 내가 때린 대학생 부모에게 사정사정해서 이빨값과 약간의 합의금으로 다행히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종로 2가 학원에 다녔다.
묵호 사창가의 내가 순결을 바쳤던 그녀의 말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동생 대학을 보내려고 애를 쓰는데, 내가 대학에 안가겠다는 것은 어리광에 불과 한 것이었다.
대학생이 되고 묵호의 그녀를 찾아갔으나 그녀는 가고 없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경포대에서 인명구조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신문에서 였다.
신문 작은 귀퉁이에 그녀가 다녔던 YH 가발 공장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여공 한명이 떨어져 죽은 사건이었다.
YH 는 그녀가 다니던 회사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공장장에게 성폭행을 당해 묵호의 사창가로 오게 된 것이다.
YH 여공들의 농성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제명으로 이어졌고, 그것 때문에 부마 사태가 일어났고, 부마 사태의 처리 문제로 김재규와 차지철이 술먹고 싸우다가 박정희가 죽었다.
그녀의 YH 와 그녀가 당했던 성폭행과 신민당사에 떨어져 죽었던 그녀 또래의 여공과 그 이후 벌어졌던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사건들이 내가 데모를 하게된 원인이었고, 나는 비로서 내가 뭘 해야 될지 알았다.
데모를 하다가 군대에 끌려갔고, 제대를 하고나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막연함과 암담함으로 다시 데모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부를 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여공 한사람의 성폭행은 나를 변화시켰고, 여공 한사람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아주 작은 소녀들의 진실한 행동이 내 평생을 좌우 했던 것이다.
그녀 덕분에 내가 공부하는 방향은, 약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방법 뿐이었다.
지금 나는 그녀가 있었던 묵호에 다시 왔다.
단 한번만의 그녀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했던 그 말은 지금까지 나를 울리고 있다.
나중에 나를 따라다녔던 쌀집 여자아이는 센데이 서울의 수영복 모델 사진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묵호에서의 싸움이야기를 ‘1978년 그 가을 날의 기억’ 이라는 짧은 글을 썼는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부제가 내가 쓴 글 제목과 같았다.
아마 작가가 내가 쓴 글을 모티브로 시니리오를 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