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민 작사 박춘석 작곡 최갑석 노래
삼팔선의 봄
故 朴春石," '삼팔선의 봄'을 새긴 비석을
휴전선에"
KBS 가요무대는
故(고)朴春石(박춘석) 선생이 작곡한
주옥 같은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生前 인터뷰 영상에서 朴 선생은,
"돌아가신 후
한 노래를 골라 비석에 새기고 싶다면
무슨 곡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 '삼팔선의 봄'을
휴전선 근방에 세웠으면 한다"고 했다.
'삼팔선의 봄'은
격조 높은 감수성과
깊은 애국심이
不滅(불멸)의 노래로 승화된 경우이다.
삼팔선의 봄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는데
설한에 젖은 마음 풀릴 길 없고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이란
대목이 가슴을 친다.
꽃이 피면 즐거워야 하는데
屍山血海(시산혈해)의 격전지인
삼팔선에선 그런 感傷(감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꿈이다.
유행가를 작곡해도
愛國 愛族(애국 애족)의 마음을 담았던
선배 세대의 위대한 희생 덕분에
잘 사는 한국인들은
北의 核공갈에 겁을 먹지 않고
화를 내어야
자유와 번영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가수 고 최갑석(崔甲錫)은
1937년 9월 16일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736번지에서
父 최종근(崔鍾根)과
母 백옥순(白玉順)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임실에서 성장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전주에서 콩쿨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학생신분임을 속이고 나갔었지만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춘석 선생에게 발탁되어
졸업 후에 오아시스레코드사로
찾아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졸업하자 백번악기점이라는 곳에
잠시 일을 하다가 상경하여
오아시스의 박춘석 선생을 찾아가서
연을 맺고
가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7년 반야월 작사 박춘석 작곡의
불국사 길손,
1958년에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철민의 노래,
손석우 작사 작곡의
사랑의 참뜻,
전오승 작곡의
서귀포 나그네, 평안도 사나이 등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최갑석의 곡 중
고향에 찾아와도(청운의 꿈)는
건전가요라하여
방송에서 집중적으로 내보내며
대 히트를 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여
삼팔선에 봄,
고향에 찾아와도,
내고향 찾아가면 등
23곡을 히트시켰으며,
28곡을 취입하여
50여곡 이상의 노래를 남겼다.
1970년대 초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동료가수인 도미와 함께
베트남으로 향하여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사업을 청산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최갑석은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인근
렌즈데일에서
노인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며
살았다고 하며,
운명하기 8년 전부터
고혈압과 심장, 신장 질병으로
투병을 계속하다가
2004년 9월 말 경
필라델피아 템블 대학병원에서
대동맥 확장수술을 받은 후
10월 14일 유명을 달리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이형숙 여사와
1남 1녀를 두고 있다.
전북 임실군 관촌면
사선대의 최갑석 노래비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
고향 그리움, 시대의 아픔 노래해
6.25 전쟁 때 불렸던
진중가요(陣中歌謠) 중에서
신세영의 전선야곡과 더불어
가장 많이 불렸던 대표적인
노래의 하나가
최갑석(崔甲石, 1937~2004)의
삼팔선의 봄이다.
성악가 스타일의 발성에
미성의 소유자인
최갑석은 이 노래 작곡자인
박춘석(1930~2010)과
조금 별난 인연이 있다.
전북 임실(임실읍 이도리 736) 태생인
최갑석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주에서 개최된 가요콩쿠르에 나가
1등을 했다.
물론 학생 신분임을 숨기고 참가했던 것.
이때 이 콩쿠르의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박춘석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
서울 오아시스레코드사로
날 찾아오라”고 귀띔해 줬다.
(훗날 삼팔선의 봄을
최갑석에게 부르게 한
박춘석 작곡가는 생전에,
“내가 죽고 나면 삼팔선의 봄을
노래비에 새겨
휴전선 가까운 곳에 세워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최갑석은 고교 졸업 후
전주에 있는 한 악기점에
잠시 취직했다가
곧바로 상경해
작곡가 박춘석을 찾아가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그는 1957년 불국사 길손,
(반야월 작사, 박춘석 작곡)이란
곡으로 데뷔한 이후,
철민의 노래(1958),
사랑의 참뜻(1958),
서귀포 나그네 등의 노래들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았으나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1958년에 부른 고향에 찾아와도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가
큰 인기를 얻어
스타로 발돋움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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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갑석 노래비 전북 임실군 관촌면 사선대 국제조각공원 소재 |
당시 고향에 찾아와도는,
‘시대의 아픔과 고향 그리움을
노래한 건전가요’라며
방송에서 집중적으로 내보내
뜻하지 않게
그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는 1974년 미국으로 이민 가
필라델피아 인근 랜즈데일
노인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다가
2004년 9월 말에
고혈압과 대동맥질환으로
긴급수술을 받았으나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그해 10월 중순 가족 동의하에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
불우하게 세상을 떴다.
그는 67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면서
50여 곡의 노래를 세상에 남겼다.
그의 고향인 전북 임실군 관촌면 소재
사선대 국제조각공원에
그의 대표곡인 삼팔선의 봄과
고향에 찾아와도 가사가
좌우에 새겨져 있는
노래비가 2013년에 세워졌고,
최갑석 가요제가
2010년부터 해마다
임실치즈축제 기간에
열리고 있어,
그의 때묻지 않은 맑은 노래를
추억할 수 있다.
고려성 작사 이재호 작곡
고향에 찾아와도는
1958년 발표된 곡이다.
이듬해인 1959년 유명한
삼팔선의 봄이 발표되었으니
한 해 앞서 발표된 곡이다.
한국전쟁 이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을 찾은 소회를
서정적으로 노래한 명곡이다.
성악가풍의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의
최갑석이 불러
노래 좀 한다하는 젊은 남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곡.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두견화 피는 언덕에 누워
풀피리 맞춰 불던 옛 친구여
흰 구름 종달새에
그려보던 청운의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세워 가느냐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실버들 향기 가슴에 안고
배 띄워 노래하던 옛 친구여
흘러간 굽이굽이
적셔보던 야릇한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세워 가느냐
최갑석은 1938년 생으로
1962년 부산 가요콩쿠르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미 활동 중이었던 가수였다.
기성가수들이 참가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할만큼
출중한 노래 실력을 자랑하면서
고향에 찾아와도와
삼팔선의 봄의 성공 이후
내 고향 찾아가면,
타향은 외로워,
한 많은 유랑나그네,
그리워라 부산항 등
고향을 그리는 노래와
휴전선 고갯길 같은
전쟁 직후
유랑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곡을 많이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후
좋은 곡을 발표하지 못하고
월남 등으로 진출했다가
사업 실패로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나
어려운 생활과 지병으로
2004년 타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노래비가 그가 태어난
전북 임실에 세워져
그나마 위안을 주고 있다.
김석민 작사 박춘석 작곡으로
1959년 발표된 삼팔선의 봄은
한국전쟁으로 처참하게 짓밟힌
나라와 겨례를 지키려다
젊은 용사들이
떨어진 꽃잎처럼 잠들어 있고,
155마일 휴전선엔
봄이 돌아왔건만
북녘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실향민의 심정을 그렸다.
김석민 작사 박춘석 작곡 최갑석 노래
삼팔선의 봄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는데
설한에 젖은 마음 풀릴 길 없고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녁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고나
이곡 삼팔선의 봄은
작곡가 박춘석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곡이었다 한다.
맑은 최갑석의 목소리를
반갑게 들어본다.
고 최갑석(崔甲錫) 원로가수는
고향 출생지가 임실군 임실읍이랍니다.
그는 임실에서 성장하여
초등학교(학력)를 졸업하고
전주에서 생활 하다가
6.25 후 제주도 제1육군훈련소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답니다.
이후에 부산에서 잠시 생활을 하던 중에
부산 가요 콩쿨대회에서
1등을 한 결과
작곡가들에게 선발되어
가요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가수로서 노래를 시작했답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여
삼팔선에 봄과 아울러서
고향에 찾아와도,
내 고향 찾아가면 등
23곡을 히트시켰으며,
28곡을 취입하여
50여곡 이상의
영원한 노래를 남겼답니다.
그는 1970년대
초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동료가수인 ‘도미’와 함께
베트남으로 향하여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아
모든 사업을 청산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답니다.
최갑석은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인근
렌즈데일에서
노인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답니다.
운명하기 8년 전부터
고혈압과 심장, 신장 질병으로 투병 중
필라델피아 템블 대학 병원에서
지난 2004년 9월 말 경
대동맥확장 수술을 받은 후
10월 14일 유명을 달리하였답니다.
가족으로는 부인 이형숙 여사와
1남 1녀를 두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