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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Sir Elton John
Sir Elton John , CH , CBE
본명 :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 Reginald Kenneth Dwight
(현재) 엘튼 허큘리스 존 Elton Hercules John
출생 : 1947년 3월 25일 , 잉글랜드 런던 미들섹스 피너 (現 잉글랜드 런던 피너)
작위 : 기사 (Knight Bachelor)
영국의 가수 · 작곡가 , 피아니스트 , 프로듀서 , 사회 운동가 , 사업가 , 기획자 , 라디오 진행자 ,
영국 축구 프리미엄 리그 왓포드 FC 前 회장이자 종신 명예 회장 .
엘튼 존은 1947년 3월 25일 잉글랜드 런던 근교의 피너(Pinner) 마을에 위치한 외조부모의 집에서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 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
1967년 12월부터 ‘엘튼 존(Elton John)’ 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
4년간 예명으로 사용하다가 1972년 1월 7일에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으로
법적 개명 절차를 마쳤다 .
엘튼 존은 3살에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으며 ,
어머니는 그가 에밀 발퇴펠의 〈스케이트 왈츠(Les Patineurs)〉를 외워서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
5살 때부터는 정식적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
그는 학교에서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 행사에서 제리 리 루이스의 곡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
1958년 , 엘튼 존은 영국 왕립음악원(RAM) 주니어 코스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고 ,
입학한 지 5년이 되어 졸업 시험 만을 앞두었을 때 중퇴했다 .
후에 그를 지도했던 한 교사는 헨델 음악의 악보 네 장 분량(Four - page Piece)을 들려주자
그가 즉시 축음기 녹음을 재생하듯이 그대로 따라 연주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
엘튼 존은 영국의 락 · 팝 가수 겸 작곡가 , 사회운동가이다 .
영화 · 뮤지컬 음악 작곡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1975년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으며 ,
1979년 5월에는 서방국가 락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소련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
1992년 작사가 버니 토핀과 함께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데 이어
1994년에는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단독으로 입성했으며 , 1995년 폴라음악상을 받았다 .
1996년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으며 ,
1998년에는 음악과 자선활동에의 공헌이 인정되어 2월 24일 서훈식에서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 .
또한 1999년에 그래미 레전드상(Grammy Legend Award)을 ,
2004년에는 미국 존 F. 케네디 센터 주관 공연예술 평생공로상(Kennedy Center Honors)을 받았다 .
2002년에는 모교 왕립 음악원(RAM)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왕립 음악원 역사상 명예 박사 학위는 이 해 엘튼 존과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에게 주어진 것이 처음이다 .
2006년에는 영화 · 뮤지컬 음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월트 디즈니 컴퍼니로부터
디즈니 레전즈(Disney Legends)에 선정되기도 했다 .
엘튼 존은 그외에
아카데미상 2회 (1995, 2020년) ,
그래미 어워드 5회 (1987, 1992 , 1995 , 1997, 2001년)
골든 글로브상 2회 (1995, 2020년)
토니상(2000년), 브릿 어워드 5회 (1986 , 1991 , 1995 , 1998 , 2013년)
아이버 노벨로 어워드 14회 (1974 , 1977 , 1979 , 1986 , 1991 , 1995 , 1998 , 2000 , 2005 , 2007년)
등의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
국가별 판매량 인증 합산에 따르면 엘튼 존은 세계적으로 통산 약 1억6,9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역대 5위) , 비공식 기록까지 합산한 추정 판매량은
2억 5천만 ~ 3억 장에 이른다 .
2008년 《빌보드》는 빌보드 핫 100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 엘튼 존은 3위에 올랐다 .
엘튼 존은 2020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CH ;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서훈자로 지명되었다 .
컴패니언 오브 아너는 예술 , 과학 , 의학 , 정부 등 분야에서 긴 시간 지속적으로
주요한 공헌을 한 인물이 대상으로 , 영연방 전체에서 65명만이 이 서훈을 받을 수 있다 .
대중 음악계에서는 베라 린 , 폴 매카트니에 이은 3번째 서훈자이다 .
엘튼 존은 화려한 의상과 수많은 선글라스 , 쇼맨십으로 유명하다 .
화려한 의상을 입은 채 피아노를 과격하게 연주하다가 의자를 걷어차고 폴짝 뛰거나 ,
피아노 위로 올라가는 등 1970년대부터 십수 년간 선보였던 쇼맨십이다 .
피아노는 매우 무거운 악기라서 연주하면 항상 앉아만 있는 등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쇼맨십을 선보였고 , 피아노 위에 발을 올리던 리틀 리처드와 피아노 위에서 뛰어내린
쇼맨십을 선보였던 제리 리 루이스를 보며 자랐던 엘튼 존은 그에 버금가면서도 차별성이 있는
무언가를 선보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2004년 9월 17일 서울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이 열렸다 .
이 공연은 SBS에서 기획을 했고 엘튼 존 측과 협의하에 카메라를 동원해 실황을 촬영하여
그 다음 주인 추석 연휴 중에 녹화했고 , 이날 부른 곡들 23곡 중에서 8곡을 편집하여 15곡만 수록된
공연 실황 영상을 특집으로 방영했다 .
2012년 11월 27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만 공연이 열렸다 .
2015년 11월 27일 , 세 번째 내한 공연은 서울 한남동의 소규모 공연장인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UNDERSTAGE)에서 500명 관객을 대상으로 열렸다 .
이런 형태의 소극장 공연은 2015년 〈All the Hits〉 투어가 진행된 세계 40여 개 도시 중에서도 유일했다 .
전석 스탠딩이었고 , 셋리스트의 24곡 중에서 6곡을 제외하고 18곡만 불렀다 .
공연 하루 전, 언더스테이지에서 윤하 , 윤종신 , 김수로 등
연예인들과 일부 관객을 대상으로 한 프라이빗 공연을 열기도 했다 .
엘튼 존은 꾸준히 자선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라이언 화이트 , 프레디 머큐리 등 많은 친구들이 에이즈 / HIV로 사망한 것을 수없이도 봐온
엘튼 존은 해당 질병에 대해 진지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
1980년대 중반부터 HIV / 에이즈 퇴치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 1992년에 비영리 단체
〈엘튼 존 에이즈 재단(Elton John AIDS Foundation)〉을 설립하면서
사회적 소수자 인권 운동을 포함하여 HIV / 에이즈 치료 연구 기금으로 수백억의 거금을
기부하는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
엘튼 존 에이즈 재단 주최로 1993년부터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 때
후속 파티(Elton John AIDS Foundation Academy Award Party)가 개최되었고 ,
아카데미 시상식 후속 파티를 포함하여 각종 행사를 통해 모은 수십억 정도의 모금액을
HIV / 에이즈 퇴치 및 치료 연구 비용으로 전액 기부했다 .
클래식 , 락앤롤 , 소울, 블루스 , 가스펠의 영향을 받으며 종합시키고 ,
락과 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피아노가 중심을 이루는 음악이 특징이다 .
사이키델릭 락 , 프로그레시브 락 , 글램 락 , 하드 락 , 포크 락 , 컨트리 락 , R & B ,
재즈 , 뉴웨이브 , 레게 , 디스코 , 필라델피아 소울 , 라틴 팝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면서도
단기간 내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력으로 대중성과 상업성을 유지하고 있다 .
활동 초기에는 테너 창법이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 소울에 한층 가까운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1986년 성대결절이 생겼고 , 1987년 성대 수술 이후에도 수술 이전의 창법을 유지했으나
1990년대부터 바리톤으로 창법을 바꾸었다 .
엘튼 존은 작사를 하지 않는다 .
가사는 작사가에게 맡기고 , 자신은 작곡과 연주를 맡으며 음악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 .
그래서 싱어송라이터가 아니고 가수 / 작곡가(Singer and Composer)로 분류된다 .
싱어송라이터의 정의에 따르면 , 작사까지 꾸준히 겸해야 엄격한 의미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무명 시절이던 1967년부터 1968년까지 직접 작사까지 맡은 곡들이 상당수 있고
1970년 곡 Border Song의 마지막 구절과 1977년 곡 The Goaldiggers Song ,
1978년 정규 12집 A Single Man 의 대부분 수록곡들 등 무명 시절 이후에도
작사에 참여한 경우가 있어서 넓은 의미로 싱어송라이터로도 분류된다.
작곡을 신속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버니 토핀과 팀 라이스 , 리 홀 등 작사가들이 쓴 가사를 보면서 평균 10 ~ 20분 이내에 피아노를 연주하며
곡을 작곡하고 , 녹음 작업도 신속히 한다 .
방송이나 인터뷰에 출연하여 가사 또는 온갖 글을 보며 즉석에서 곡들을 작곡하여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팝 / 락 뮤지션들 중 한 명이다 .
2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 , 추정치로 2억 5천만 장에서 3억 장에 이르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 .
비틀즈 , 엘비스 프레슬리 , 마이클 잭슨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뮤지션이자 ,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영국 솔로 뮤지션이다 .
빌보드가 선정한 시대별 아이콘에서 1970년대 아이콘으로 엘튼 존을 선정했고 ,
빌보드 200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200선에서 5위 , 빌보드 핫 100 100선에서 3위에 선정했다 .
빌보드 125주년 기념 올타임 아티스트 125선에서 3위 ,
빌보드 핫 100 60주년 기념 남성 아티스트 60선에서 1위에 선정했다 .
The One
1992년 6월 22일 발매
《The One》은 1992년 6월 22일에 발매된 영국의 음악가 엘튼 존의 24번째 스튜디오 음반이다 .
크리스 토머스가 프로듀싱을 맡았고 파리의 빌헬름 텔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
이 음반은 밴스 벅에게 헌정되었고 이 음반의 표지 작품은 잔니 베르사체가 디자인했다 .
《The One》은 라이오넬 리치의 《Back to Front》 컴필레이션에 밀려
1위에 오르지 않고 3주 연속 2위를 차지했다 .
이 음반은 1975년 이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엘튼 존의 음반이며 ,
미국 음반 산업 협회에 의하면 미국에서 플래티넘 2장을 인증받았다 .
The Last Song 은 피아노와 신시사이저로 애절한 분위기를 이끄는 발라드 곡이다 .
가사는 에이즈에 걸린 남성이 죽기 전에 아버지와 화해하는 내용이다 .
버니 토핀은 에이즈는 이전에 노래에서 다룬 적이 없던 주제였으며 ,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1992년〈Q〉 잡지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
엘튼 존은 교회에서 부를 수 있을 법한 곡으로 작곡했다고 1992년 WPLJ - NY 라디오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
곡 제목은 Song for 92 였지만 특정 날짜가 들어가는 걸 피하기 위해 제목을 수정했다 .
엘튼 존이 《The One》 앨범을 작업한 시기는 퀸(Queen)의 보컬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사망 시기와 겹치기도 했다 .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1991년 11월 24일 사망하고 몇 주 뒤 ,
버니 토핀이 쓴 가사를 팩스로 받고 나서 작곡했다 .
당시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으로 슬픔에 잠겼던 엘튼 존은 곡을 작곡하고 데모를 녹음하는 동안에 눈물을 흘렸고 ,
부르기 어려운 곡이었다고 밝혔다 .
라이언 화이트와 프레디 머큐리 등 에이즈와 HIV 로 수많은 친구들이 죽는 것을 1980년대부터 지켜봐왔던 엘튼 존은
1992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비영리 단체 「엘튼 존 에이즈 재단(Elton John AIDS Foundation)」 을 설립했다 .
설립 취지는 HIV / 에이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 , HIV / 에이즈를 예방하고
해당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프로그램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
자신의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재단을 설립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
에이즈 / HIV 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수십억 이상을 치료 기금으로 기부하는 등 사회운동가 활동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Yesterday you came to lift me up
As light as straw and brittle as a bird
어제 당신은 빨대처럼 가볍고 새처럼 부서지기 쉬운 나를 들어 올리러 왔습니다 .
Today I weigh less than a shadow on the wall
Just one more whisper of a voice unheard
오늘 저는 벽의 그림자보다 무게가 적습니다 .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한 번 더 속삭입니다 .
Tomorrow leave the windows open
내일은 창문을 열어두세요 .
As fear grows please hold me in your arms
두려움이 커지면 나를 당신의 품 속에 안아주세요 .
Won’t you help me if you can to shake this anger ?
이 분노를 떨칠 수 있다면 당신이 저를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
I need your gentle hands to keep me calm
나를 침착하게 유지하려면 당신의 부드러운 손이 필요합니다
‘Cause I never thought I’d lose
I only thought I’d win
왜냐하면 내가 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난 그저 이길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I never dreamed I’d feel this fire beneath my skin
난 피부 밑에서 이 불을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I can’t believe you love me
I never thought you’d come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I guess I misjudged love between a father and his son
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Things we never said come together
The hidden truth no longer haunting me
우리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다함께 모입니다
숨겨진 진실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Tonight we touched on the things that were never spoken
That kind of understanding sets me free
오늘 밤 우리는 그런 종류의 이해가 저를 자유롭게 해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Cause I never thought I’d lose
I only thought I’d win
왜냐하면 내가 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난 그저 이길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I never dreamed I’d feel this fire beneath my skin
난 피부 밑에서 이 불을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I can’t believe you love me
I never thought you’d come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I guess I misjudged love between a father and his son .
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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