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학(4) 김수영,「사랑의 변주곡」外
-우리는 아직도 문학 이전에 있다. (김수영 산문,「茉莉書舍」)
01. 시-문학에 대한 사유
a. 인간은 한 편의 완전한 시를 들은 다음 우수憂愁를 느낀다. 이는 심연으로부터 함께 울리며 솟구쳐오른 전체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막스 피카르트)
b.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문학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선 무지와의 싸움이며,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이다. 문학의 존재 이유는 현실에 잠재된 삶을 드러내고 더 나은 삶을 사유하고 상상하는 데 있다. (김현)
c. 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물의 본성과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독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 즉 문학적 감수성에 있다. 감수성은 일상적인 흐름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새롭게 감각하고 해석할 수 있는 감지 능력을 의미한다. (박형준)
d. 게오르그 루카치(G. Lukács)에 의하면, 모든 예술의 핵심적 문제는인간적인 것과 형식에 있다. 인간적인 것은 인간(삶)과 관계하는 모든 인적․물적 환경을 말하며, 이는 그것을 구체화하고 특수화하는 미적 형식의 문제와 긴밀하게 조응한다. 형식은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이나 격식의 측면보다삶 자체를 다시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뜻한다. 문제는 형形에 의해 비로소 형이상과 형이하가 통합된다는 사실.
02. 김수영을 말한다
a. 김수영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김현승)
b. 김수영의 시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제는 사랑이다.‘인간 상실로부터의 인간 회복이 시인의 임무’임을 말했을 때, 요컨대 그는 인간을 가난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노력 속에서 시작의 본질을 보았고, 그런 한에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사랑’이었다. 그의 죽음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온 중대한 결론이 사랑이며 이 사랑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했다. (김종철)
03. 김수영의 산문과 시론
a. 모든 진정한 시는 무의미시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그리고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제 精神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b.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 밖에는 없다. 내가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다. 이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다. 그대의 박해를 감수하는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近視眼이므로 나의 참뜻이 침묵임을 모른다. (「詩作 노우트」)
c. 禪에 있어서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까맣게 안 들렸다가 다시 또 들릴 때 부처가 나타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音이 바로 헨델의 망각의 음일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작품을 잊어버릴 것이다. 자기의 작품이 남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하고 골백번씩 運算을 해보지 않아도 되는 그의 현명만이라도 나같은 우둔파 시인에게는 얼마나 귀중한〈메시아〉인지 모르겠다. 이번 크리스마스의 유일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臥禪」)
d.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詩作은‘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몸’으로 하는 것이다.‘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그러면 온몸으로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모기 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詩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e. 우리의 생활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生活現實과 詩」)
f.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詩人의 태도이다. (「詩月評」)
g. 詩의 모더니티는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火焰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육체로서-추구할 것이지 詩가-기술면으로-추구할 것이 아니다. (「모더니티의 문제」)
04. 현대시 백년사 다섯 권의 시집
백석 [사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정지용 [정지용 시집],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서정주 [화사집]. 지용과 미당은 채彩요, 백석과 수영은 기氣요, 성복은 기채간氣彩間이라. (김인환)
05. 작품분석과 감상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감상] 풀과 바람의 관계, 시인의 정신과 태도 & 시의 창작방법, 부사어(드디어, 더, 다시, 먼저, 늦게)의 활용, 선禪의 시학적 가능성 등.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감상] 김수영 시의 핵심으로 지목되는「사랑의 변주곡」은 김수영이 도달한 가장 성숙한 경지를 보여주며 가장 김수영다운 작품. 김수영의 시들은 모두〈사랑의 변주곡〉으로 수렴되는 과정. 사랑의 절도節度와 기술과 앎. 사랑의 완성(단단한 고요함)과 리듬의 변주 등.
06. 더 읽을거리
도취의 피안 / 김수영
내가 사는 지붕 우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수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우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취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우에서 무슨 솔개미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의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너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이여
그날 /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참고문헌
김수영, 김수영전집1․2, 민음사. 1993.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책읽는오두막, 2013.
김유중, 하이데거 시 이해의 관점에서 본 김수영 문학의 근본 목표, 하이데거연구 제19집, 2009.
이은정, 현대시학의 두 구도-김춘수와 김수영, 소명출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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