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도를 도입할 때, 처음에 잘 해놔야 잘못된 경로 의존성을 따르지 않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만들어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를 포괄하고 있는 사회서비스 영역입니다.
장애인이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기 위해 탈시설 운동이 있었고, 이를 위한 기본적인 서비스로서 장애인 활동지원이라는 요구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정부의 정책적 기획이 아니라 장애인운동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이 이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서비스를 제공해 줄 사람이 필요하겠죠. 그럼 장애인과 서비스 제공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나라는 이에 대해서 제도 설계 과정에서 고민이 하나도 안 되었습니다.
사회서비스의 기본방향은 ‘타인지향성’
(애초에) 돌봄서비스는 주로 가정 안에서 여성이 담당해 왔죠. 이 가정 안에서의 돌봄은 어떤 목적으로 수행되나요? “엄마 아빠를 돌봐서 반드시 유산을 받으리라!”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식이 많을까요? 또, 아이를 돌보는 부모가 “내가 나중에 꼭 효도를 받아야지” 이런 목적으로 돌보지는 않죠.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책임과 사랑, 이런 형태들로 돌봄이 이뤄지죠. 이것을 ‘타인지향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가정 안에서 이뤄졌던 돌봄이 사회로 나왔습니다.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교환이 주 원리로 작동하죠. 이것은 이윤이 목적인 공급자와 소비자 간에 일어나는 ‘대칭적 교환’입니다. 그럼 이 돌봄 서비스의 영역을 이런 일반 시장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요? 가정 안에서 이뤄졌던 돌봄의 가치를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실현해 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이 정부는 그런 것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마치 상품처럼 설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봄 영역 안에 시장 원리가 들어올 때, 공급기관․활동보조인과 이용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의 관계는 가족은 아니잖아요. 가족처럼 될 수 없어요. 그것은 사회적 관계에요. (그렇다면) 일반 시장의 교환 원리가 아닌 어떤 원리로 운영되어야 하며, 제공된 서비스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보상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사회서비스 분야 중 가장 단시간에 확대된 서비스가 바로 보육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고 있죠. ‘아이사랑 바우처’는 0세부터 만 5세까지 국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보육지원료를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달라진 것은, 예전에 0~2세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보다는 가정 안에서 케어를 했던 반면, 이제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엄마가 그 시간에 다른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죠.
예전에 엄마가 가정 안에서 아이를 돌보던 시간은 줄어들고, 그 시간에 아이들은 어린이집으로 갑니다. 그러면 아이 돌보는 보육교사나 어린이집 원장이 이 아이를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케어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이집을 설치해 운영하는 원장들은 어떤 목적으로 운영할까요? 주변에서 어린이집 지을 때 아주 쉽게 ‘돈벌려고 한다’라고 해요. (실제) 어린이집 한 채에 권리금이 어마어마하게 붙거든요. 어린이집을 설치해 운영하는 분들이 바우처로 인해 통제가 많아졌어요. 아주 피곤해 해요.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어린이집 해서 망했다는 사람 한명도 본적이 없어요. 그리고 50인 이상 아이들을 담당하는 곳 같은 경우는 몇 년 안에 빚 다 갚아요.
원장의 눈에는 아이들 한명 당 얼마가 남는다는 계산이 딱딱 떨어집니다. 반면 보육교사들은 처우가 어떤가 하면, 0세 아이를 한꺼번에 4명 씩 돌봅니다. 그런데 민간 어린이집의 경우 한 달 월급을 100만 원도 못 받는 분도 있습니다. 엄마들이 아이를 맡길 때는 그런 마음이 아니지만, 실제 어린이집이 운영되는 원리는 ‘이 아이를 잘 키워서 우리 사회의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팍팍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방금 원장들처럼 이용자 수 늘리는데 골몰하는 사고는 ‘자기지향성’의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이에 따른 책임은) 보육교사들에게 전가되죠. 그래서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타인지향성’이라는 방향을 받아들여야만 사회 안에서 아름다운 돌봄의 가치를 형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타인지향성이라는 것은 내 목적에 의해서 돌봄의 행위가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의 욕구에 맞춰서 돌봄이 이뤄지는 것이 타인지향성의 첫 번째 가치입니다. 그래서 이윤 같은 동기로부터 돌봄이 이뤄져서는 안되는 것이죠.
참 희한한 문제가 작년부터 발생했는데요.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한 활동지원 시간이 대폭 늘어났어요. 300시간 정도로 늘어났는데, 그러니까 총 급여가 200만 원 가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통해서 소득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는 가족들이 활동보조인 못 오게 하고, (장애아동) 부모들끼리 크로스해서 서로의 아이를 돌보는 거에요. “부모가 더 잘 돌보지 당신들이 더 잘 돌보냐”라는 논리로요. 그런데, 활동지원 서비스가 도입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 담당했던 돌봄 영역을 사회가 제공하도록 해서 가족에게 휴식을 제공하자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이건 시장을 왜곡하는 것이에요. 가족이 하면 안돼요. 가족이 할 거면 그 가족에게 그냥 수당을 주는 게 나아요. 이건 애초에 서비스란 말이에요.
이 제도를 소득적 측면에서 접근하기 시작하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가족조차도 타인 중심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복지가 누군가의 욕구에서 출발해 이윤으로 돌아오는 방식이 되었을 때에는 시장원리가 아주 복잡하게 작동합니다. 그래서 복지라는 공간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가 아주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얘기하죠. 활동지원서비스가 강화되면서 장애인들에게 보장되는 시간이 늘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는 서비스 질은 이야기하지 말구요. 이것을 국가는 장애인의 권리 증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활동지원 노동자들의 급여가 늘어난 적은 없어요. 시급제가 적용되고 있는 구조에서 최저임금이 해마다 오를수록 활동지원인들이 받는 단가는 오히려 떨어지는 모순에 처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설명합니다.)
복지제도 하나가 팽창함으로 인해서, 한 쪽의 서비스 받는 사람들의 권리는 확대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는 착취받는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지 공급 시장화의 단선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돌봄이 시장화된다는 것은 결국 타인지향적 돌봄의 가치가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입니다.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있는 이들의 생계가 제대로 보장받기 어렵다면, 그 노동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어렵습니다.
작년에 현장조사를 나갔을 때, 시각장애인 활동보조를 하시는 분을 만났어요. 이 분은 생계가 아주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자식들은 청년실업 상태고, 남편이 아픈데도 기초생활수급도 못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일을 하시게 된 거죠. 그런데 이 분이 시각장애인 이용자의 집에 갔더니, 집이 너무 좋은 거에요. 그런데다가 장애인 분이 활동보조인 대하는 태도가 약간 하인 부리듯 했나 봐요. 그래서 서비스 제공 하는 내내 자괴감을 너무 많이 받으신 거에요.
그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왜 국가가 이런 사람들한테 무료로 서비스를 주면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노동을 시키느냐”는 거에요. 자, 그러면 장애인의 권리를 확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 권리를 보장시켜주기 위한 나머지 환경에 대해서는 아직도 봉건적 수준을 유지한다면, 결국 이 서비스 제공 영역에는 어떤 사람들이 남게 될까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국가는 손 안대고 코 푸는, ‘사회서비스 전자 바우처’
사회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바우처가 도입되었습니다. 바우처 이전의 복지 전달체계는, 예를 들면 지역사회복지관에서 그 지역 장애인들의 욕구를 조사한 다음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예산 한계 내에서 프로그램을 계획해 제공하는 것이었죠. 이를 공급자 중심 제공방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비판했냐면, “실제 지역사회 장애인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공급자 중심으로 프로그램 설계해서 유연하지 못하다.” 이게 과연 맞는 이야기였나요?
만약에 예산을 풍족하게 줬다면 프로그램 다양하게 짰을 거에요. 서비스 이용하는 이용자 수도 대폭 확대했을 거구요. 문제의 핵심은 예산인데, 공급자 방식은 아주 나쁜 것으로 몰아넣으면서, 새로운 뭔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도입한 것이 ‘바우처’입니다.
바우처가 시행되기 위해서는 바우처를 가지고 사업할 수 있는 사업장이 많아야해요. 전국의 인프라가 짧은 시간 안에 굉장히 많이 생겨야 해요. 그런데 장애인운동이나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예전부터 인프라 구축에서 공적구조를 주장해 왔잖아요. 민간중심으로 하지 말고 지자체가 직접 하라고요. 그런데 지자체가 직접 센터를 만들려면 예산과 시간이 많이 들겠죠. (그래서) 아예 그것은 계획에도 없던 거에요.
결국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공급자를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나 할 수 있게끔 열어야 합니다. 다행히 활동지원서비스는 아무나 할 수는 없죠. 유일하게 활동지원서비스만. 그러나 다른 영역은 개인들이 설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은퇴 연령이 점점 짧아지고 있잖아요. 40대 말, 50대 초반에 은퇴해서 새롭게 자기 노후를 준비하시는 분들이 사회서비스 산업에 많이 뛰어들고 있어요. 반면 국가는 하는 일은 없습니다. 바우처와 중개기관 관리만 보건복지정보개발원에서 하고 있어요. 심지어 활동지원인 교육도 민간이 합니다.
지난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치매 특별등급을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치매는 초기치매자를 치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의학적 기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사회보험제도에 집어넣어 시행하고 있어요. 그래도 좋다 칩시다. 그럼 (서비스 제공인력이) 치매가 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초기 치매 환자들에게 어떤 인지 프로그램을 제공해서 이 분들의 병의 진행 속도를 지연시키고, 어떻게 인지적인 측면을 향상시킬지를 전문적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까요? 저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들도 그 교육 하지 않을 겁니다. 단가가 안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민간기관에서 교육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40~44시간 교육을 받으면 기존에 요양보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이 갑자기 치매 요원이 되는 거에요. 장애인 활동지원도 기본적으로 장애에 대한 이해와 장애인에 대한 인권적 측면에 대한 교육을 해야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자격자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해야 할 정부는 제도만 엄청나게 펼쳐놓고 수습을 못하고 있습니다.
전자바우처라는 것은 좋은 서비스를 간편한 방식으로 주기 위해서 고민했다기 보다는, 단시간에 많은 공급자를 만들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정부는 이용자들의 편의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걸 뒤집어서 말하면 노동자들의 유연성이에요. 이용자 입장에서 오늘은 2시간, 내일은 3시간만 하겠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하면 노동자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요. 장애인 입장에서는 시간 자체가 유연하니까 불편한 게 없지만, 이걸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거죠.
복지부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중개기관이 알아서하라고 해요. 중개기관이 뭘 알아서 합니까? 권한도 돈도 없는데. 이런 이상한 형태가 바우처를 통해 이뤄지고 있고, 정부는 바우처 뒤에 숨어만 있는 거에요. 재정만 마련하고 바우처 쏴 주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년부터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것 하나 있죠. 부정수급 적발. 온 힘을 다해서 모든 복지분야에서 하고 있어요.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이 부도덕해서 자기가 받으면 안 되는 복지를 받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죠.
결국엔 보편적 복지를 다 부정하는 논리가 완성되는 거죠. 대선공약으로 약속한 것까지. 그 자리에 다 부정수급 문제를 내걸어서, 재원이 사실은 부족하지 않은데 누수가 생겼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죠. 누수액이 얼마고, 이걸 잘 관리해서 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거에 걸려있는 중개기관과 노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중개기관이 잘못한 행위가 있을 때는, 아주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부가 하고 있는 것은 그런 목적이 아니라는 거죠. 전자 바우처는 별로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요. 복지분야 뿐만 아니라 다른 부처도. 심지어 기초생활수급자들 개별급여 한다고 하면서 주거급여 주던 것을 주거바우처 준다고 하죠.
바우처 도입 할 때 정부의 논리는 개인의 서비스 선택권이 강화된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의 전제는 바우처 공급기관이 많아지면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요? 장애인 분들이 활동지원 서비스를 지역에서 몇 개 기관을 두고 이 선택 했다 저 선택 했다 할 수 있나요? 조사해 보면 그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이 잘 맞지 않는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기관에 따라 서비스 자체가 차별적이어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요.
또 다른 논리는 공급자간 경쟁이 강화돼서 서비스 질이 향상될 것이란 건데, 이거 정말 말이 안되는 이야기에요. 공급자끼리 가장 박터지게 싸우는 영역이 장기요양인데요. 여기서는 배출된 요양보호사 중 20%만 현장에서 일하세요. 나머지는 과잉, 적체입니다. 그런데 장기요양기관에서 어떤 식으로 이용자를 확보하냐면, 요양보호사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키고 서비스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부담금 빼드릴게요” 이렇게 해서 유인합니다. 교회에서 장기요양기관 할 경우에는 교회 신도들 명단을 가지고 집집마다 찾아가서 ‘우리 기관하고 하세요~’라고 요구합니다. 서비스 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용자 확보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럼 활동보조 서비스는 어떤가? 자립생활센터 중심으로 운동적 성격이 강한 센터의 경우는 규칙을 잘 지키고 관리를 잘 하려고 해요. 그런데 굉장히 이상한 것이, 바우처 제도 안에서 원칙과 규칙을 잘 지키는 기관일수록 손해를 봐요. 운영하기 힘들거든요.
제가 작년에 기관 조사할 때 발견한 케이스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장애인 당사자가 운영하는 센터였어요. 그런데 이 센터에 취업한 활동지원인에게 처음 하게 하는 일이 뭔가 하면, 자기 집에 데려와 가사 도우미 시키는 거였어요. 무급으로. 처음 들어온 활동보조인읜 그런 과정을 겪는 거죠. 활동보조인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거의 코디네이터랑 통화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일을 선배들로부터 듣지 못하고 (계속 당하는 거죠).
결국은 ‘휴먼서비스’ 안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의 상태를 좋게 만들어야 장애인들에게 좋은 게 돌아가는 것인데, 실제로 바우처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나마 활동보조가 다른 사회서비스보다는 나은 상태에요. 왜? 그나마 여기는 개인사업자는 못 들어오고 있으니까.
사회서비스가 다른 상품처럼 이윤이 막 창출되는 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 초기자본은 국가가 댑니다. 이 때 국가가 공공적 방식으로 인프라를 까느냐, 시장적 방식으로 까느냐의 차이가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정은 공공재인데 나머지 전달체계나 시스템은 시장재에 가깝게 구축되었습니다. 양적인 측면을 보면 2007년 바우처 제공기관이 1274개소에서 2013년 7196개소로 확장되었습니다. 이것만 보면 복지국가 같죠. 정권이 한 번 바뀐 시간 동안 7배 가까이 양적 팽창을 이룬 거에요. 예산에서도 보면, 맨 처음에는 1461억에서 6963억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예산증대보다는 기관 증대가 높게 나타나고 있죠. 증대되는 것 자체가 뭐 나쁘냐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산이 확대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걸 따먹겠다는 중개기관만 늘어나는 것이니 결국 나눠먹기가 되는 것이죠.
한편, 사회서비스 이용자의 보편성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나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전체 인구 대비 하위 3%도 안 돼요. 그거랑 비교해보면, 2008년도에는 사회서비스 전체 수급자 비율이 기초생활수급자의 39%였고, 2009년에는 41%, 2010년 84%, 그리고 2013년에 기초법 수급자가 135만 1천명, 전체 인구대비 2.6%밖에 안되는데, 바우처 이용자는 그것의 74% 수준입니다.
제가 왜 기초법 수급자랑 비교하냐면, 기초법이 가장 잔여적인 복지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재산, 소득, 그리고 부양의무자 기준까지 봅니다. 그래서 선별되기 아주 어려워요. 이것도 3% 수준은 유지하다가 지난해 2.6%로 떨어졌는데, ‘행복e음’이라는 전산망을 통해서 부적격 수급자로 지목된 사람들 다 걸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자 바우처 이용자 수는 가장 잔여적인 제도에서 받고 있는 수급자 수 수준의 74% 밖에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정부는 (서비스 많이 늘렸다고) 홍보를 엄청나게 하죠.
사회서비스 확대의 목적은 오로지 ‘고용률 끌어올리기’?
혹시 뉴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무상보육과 기초연금 시행하면서 요즘 지자체장들이 난리 났어요. 연금을 통한 소득보장과 전자바우처 보육료 지원하는 예산이 크다 보니까(지자체에서 감당을 못 하는 거죠). 그래서 어제 전국에 있는 몇몇 시장군수가 모여서 성명도 발표하셨죠.
우리나라가 대통령 중심제잖아요. 그래서 대통령 선거할 때 이거저거 막 약속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해도 되는 게 있고 하면 안되는 게 있어요. 기초연금과 보육은 재원을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매칭펀드로 마련하거든요. 서울시의 경우 보육예산을 중앙정부로부터 40%를 받고, 나머지는 자체 재정으로 채웁니다. 그나마 재정이 좀 나은 편인 서울도 힘들다고 하는 상황인데, 기업도 없고 돈 버는 사람도 없는 군 단위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런 곳은 다행히 아이들이 없어서 보육료 지원은 많이 안 들어가는데, 기초연금은 많이 나가요. 그런데 정부가 지자체 수입구조를 늘릴만한 아무런 조세개혁을 안 해줬어요. 그래놓고 박근혜는 생색을 냅니다. “내가 노인들 위해서 기초연금 늘렸다”라고요. 하지만 지자체는 매칭해 줄 돈도 없어서 사회복지사들 임금도 못 주는 형편이 된 거죠.
장애인활동지원도 국가가 홍보 많이 하죠. 최근 벌어진 장애인들의 안타까운 화재사건으로 지원 시간이 많이 늘어난 부분이 있어요. 문제는 시간만 늘려서는 해결이 안된다는 거죠. 그건 굉장히 편의적인 방식입니다. 근본적으로 정부는 이 정책을 복지의 측면에서 해 온 것이 아니라 일자리 정책의 차원에서 추진해 온 것입니다.
고용없는 성장에 대해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산업화 사회에서는 공장에서 일자리가 많이 생기잖아요. 공장이 잘 돌아가면 관계된 사업도 막 부흥하는데 최근에는 3차산업으로 전환 되면서 일자리가 산업화 사회에서 제공되었던 것과 형태들이 많이 달라졌죠. 이런 구조에서 성장은 더딘데 일자리가 이전만큼 만들어지지 않아 골머리를 앓게 되죠. 복지국가들도 그런 것에 대해 골머리를 앓았죠. 그래서 그 이전부터 흐름이 있긴 했지만 2011년도에는 사회서비스를 산업으로 딱 규정시킵니다. 복지가 아닌 산업이라고요.
예를 들면 2009년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고용위기로까지 이어졌죠. 이 때 보건 및 사회복지 사업에서 15만 6000명 고용이 창출됐습니다. 이게 왜 창출된 것일까요? 바로 직전인 2008년도에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시작되었습니다. 요양보호사들이 대거 일자리로 등록이 된거에요. 딱 1년 만에 엄청난 일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면 이 재원은 누가 감당하죠? 여러분들 건강보험료에 같이 부과해서 매달 내시잖아요. 국가에서는 손 안대고 코 푼거에요. 재정도 없으면서 막 일자리를 만든거죠.
한편으로는 보건 및 사회복지 영역에서 우리나라의 고용률이 OECD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낮다는 이야기를 하죠? 2008년도 기준으로 보면 사회서비스 분야 취업자 비율이 미국이 12.5% 영국이 12.4% 일본이 9.4% 독일이 11.7% 우리나라는 4.7%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역을 일자리를 꾸준히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요양보호사인데, 2010년도 상반기에만 요양보호사자격증 취득하신분이 95만 명이에요. 반면, 이당시 취업자가 24%인 23만명이었어요. 나머지는 실업상태이고요. 그러면 이러한 노동력 과잉으로 인해 임금 단가는 낮아질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면 영혼까지 팔 노동자의 자세가 만들어지는 거에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활동보조인 1시간 단가가 8550원, 여기서 25%를 중개기관이 가져가죠? 그러면 6490원이 남아요. 그럼 시간당 6490원에 이분이 일한 시간 곱해서 돈을 줄까요? 그렇게 안 줘요. 실제로는 (최저임금*시간+시간외수당)으로 구성이 되는데요. 만약 6490원으로 다 주게 되면 중개기관이 시간외수당 1.5배 할증이 붙는 것을 해결 못하게 되는 거에요. 중개기관이 이분에게 시간외 수당을 드리기 위해 (돈벌기 위한)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근로기준법에는 시간외수당 1.5배를 꼭 지급해라, 주휴수당도 주라고 하는데, 정부는 이 단가에서 계산 끝났다고 해 버려요. 그래서 실제로는 중개기관이 6490원을 시급으로 주는 게 아니라 최저임금제에 따라서 5210원을 주고 남는 차액으로 각종 수당을 해결하는 거에요. 결국은 활동보조인이 현장에서 일한 걸 갖고 이리저리 돌려서 근로기준법에 위배되지 않는 형태로 주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시간당 최저임금이 높아지면 수당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게 되잖아요. 그래서 중개기관들이 한 달 근로시간의 상한을 정해놓기 시작하는 겁니다. 시간외 근무를 하면 할수록 시간외수당을 줘야하는 부담이 커지니까.
다시 이야기를 돌아가면, 저는 정부가 의도적으로 서비스 인력의 임금과 근로조건이 높아지는 것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공급인력을 양성했다고 생각해요. 요양보호사의 경우 (불만을 이야기하면) 중개기관이 대놓고 ‘너 말고 사람 많으니 관둬라’라고 말해요. 심지어 요양보호사들은 센터들이 너무 많다보니까 이용자를 끼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요. 이건 말도 안되는 상황이죠. 결국 “도대체 센터는 왜 필요한 겁니까? 내 돈을 떼먹는 놈들!”이란 말이 나오는 거죠.
“일자리가 복지다” 이게 박근혜 정부의 핵심 모토에요. 일자리가 복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맞춰져야 될까요? 첫 번째로 생활이 가능하고 생존이 가능해야겠죠.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야 해요. 그런데 작년에 국회에서 나온 사회서비스 일자리 사업평가 보고서를 봤는데, 바우처 사업에 참여했던 근로자 월평균 임금이 50만원 미만으로 나왔습니다. 그나마 활동보조인들은 좀 높게 나왔습니다.
괜찮은 일자리로 평가받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겁니다. 대부분 시급제이고, 서비스 빈도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활동보조인이 생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한 달에 거의 300시간 이상, 400시간은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용자가 그런 지속성을 가져줘야 하는데, 그 결정은 노동자가 아닌 이용자가 하는 것이죠. 노동자에겐 선택권이 없어요. 고용의 지속성이 없고, 일의 비전도 안 보이죠. 스스로 자기 노동에 대한 존중을 갖기 어려운 환경에서 서비스 질을 좋게 하라고 하면, 그건 폭력이죠.
여건은 하나도 안 만들어 주면서 ‘착한 마음을 가져야해’, ‘장애인을 만날 때 무조건 헌신하고 봉사해야해’라고 하는데, 성직자들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성직자에게 요구하기도 힘든 걸 활동보조인이나 다른 돌봄노동자한테 요구하는 건 결국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거에요.
서비스 공급 주체 과잉 상태, 이제 끊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돌봄의 영역에도 이미 (이윤에 목적을 두는) ‘자기지향적 가치’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돌봄 그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일자리 창출 많이 해서 경제지표 올리고 복지 수급자를 사전에 차단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어요. 또 이 영역에 들어온 관계자들의 이해관계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집니다. 중개기관은 기관대로 힘들다고 하고, 활동지원 노동자들 만나면 노동자들대로 너무 힘들다 하고, 또 장애인 이용자들 만나면 그들도 불만이 있어요. 이것을 우리가 좀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어떤 걸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지금 형태의 바우처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상태로는 노동자들의 환경이 개선될 수 없어요. 중개기관도 마찬가지고요. 또, 중개기관들이 도대체 서비스 제공자로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해야할지 정확하게 자리를 잡아야 하고, 중개기관을 누가 해야 하느냐도 다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금은 아무나 다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서비스 왜곡이 심각해 집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요즘에 계속 탈규제 이야기만 하고 다니잖아요. 세월호가 그렇게 일이 터졌는데도 탈규제만 이야기 하니 정말 무서운 나라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죠. 국공립 보육시설 짓자는 이야기 많이 하지만 재정이 없어서 못 짓는게 아니에요. 구청장 선거같은 거 할 때 공약으로 ‘공립 어린이집을 몇 개 짓겠습니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럼 당장 민간 협회에서 찾아와요. ’너 이번에 떨어지고 싶어?‘라면서요. 지금 상황은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공공재에 민간에게 운영을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죠.
지금 정부는 공공재를 그냥 시장의 원리에 다 맡긴 채로 돈만 대주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보니까, 복지의 양 자체는 확대되는데 서비스 제공 노동자들은 착취를 받는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이 구조가 해결되지 않으면 좋은 서비스가 나올 수 없다고 봐요. 이건 장애인의 권리 향상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지향적 가치, 그리고 현재의 서비스 이용자와 중개기관, 그리고 노동자 이 삼각 대립구도를 어떤 식으로 원활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를 계속 같이 고민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의응답>
질문 : 중개기관을 아무나 하면 안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게 장애인계에서는 당사자주의 또는 소비자주의에 입각해서 서비스 제공 주체가 장애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나아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저는 당사자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이 공급자를 당사자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년부터 바우처를 직접 장애인에게 달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 파란이 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반대합니다. 이 서비스를 화폐관계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반대합니다. 사회서비스는 사회적 연대 시스템이기 때문에,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 사이에 보이는 화폐 관계가 만들어지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관계의 종속성이 발생합니다. 물론 한국 사회가 장애인의 권리나 인권을 그동안 평가절하 해 왔기 때문에 권리를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권리의) 부족한 부분을 꼭 공급자의 지위를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장애인의 권리를 재고하기 위해서는 더 큰 사회적 연대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노동자 권리가 강화되면 이용자의 권리가 축소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전혀 관련이 없는 건대두요. 만약 활동보조인의 강화된 권리로 이용자를 제대로 케어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처벌할 문제이지, 권리를 주자 말자의 문제는 아닌거죠.
그러면 공급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멀티플렉스처럼, 한 기관에서 노인돌봄도 하고, 장기요양도 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활동지원 외에) 다른 서비스 영역에서 이윤을 목적으로 들어와 있는 기관들은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관장을 월급제로 돌려야 합니다.
반면, 활동보조는 이윤을 목적으로 들어와 있는 곳들은 아니잖아요. 여기서는 중개기관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의 문제인데, 기관 운영 자체가 현재 정부 지원금으로는 너무 허덕이는 측면이 있지요. 그렇다면 정부가 기관 운영에 대한 행정비용 지원을 안 해 줄거면 바우처 단가를 현실화시켜서 시간외수당을 안정적으로 줄 수 있도록 해주던가, 그게 아니면 행정운영 관련 비용을 따로 책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기관 운영하면서 이용자 몇 명 모아야 안정적 운영 된다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는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중개기관은 실제 서비스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담당하고 있는 장애인이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가치를 달성하겠다는 목적의식이 있는 주체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나마 장애인 쪽은 비영리 목적으로 하려는 주체들이 있는데, 다른 영역은 그런 주체들이 없어요. 여기서 무너지지 않게 지켜가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