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시절, 김치(실제 이름입니다)라는 양반이 있었습니다. 그는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어느 날 꿈에서 노자를 만나지요. 이 꿈은 태몽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에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김치는 이 아들이 노자의 수호를 받는 인물이라 믿고 기대를 걸었지요. 이 아들이 바로 김득신입니다 (김홍도의 위인전에서 곧잘 등장하는 화가 김득신과는 동명이인입니다).
그러나 김득신은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영특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릴 때 천연두로 인한 고열로 뇌가 손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공부에 알맞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기억력이 매우 안 좋았지요. 얼마나 기억력이 좋지 않았는지 이에 대한 야담이 여럿 존재할 정도입니다.
당연히 이런 김득신이 다른 천재형 위인들처럼 3살부터 글을 읽는 것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그가 글을 처음 읽은 것은 10살 때로 오히려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늦은 시기였지요. 이때도 글을 제대로 읽지는 못했는지, 아버지가 준 쉬운 책을 3일 동안 단 한 줄도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김득신의 글공부가 무의미하다고 여겼습니다. 김치에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한 것도 여러 차례지요. 그러나 김치는 김득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김치는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공부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득신 역시 주변인들의 만류와는 무관하게 공부를 지속했습니다. 그는 우둔했지만 남들이 가지지 못한 끈기를 가지고 있었지요. 끊임없는 노력 끝에 김득신은 20살에 처음으로 스스로 글을 짓게 됩니다.
김득신의 노력은 <백곡집>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백곡집>의 ‘독수기(책을 읽은 횟수를 적어놓은 글)’ 따르면 1만 회 이상 읽은 책이 36권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좋아한 <사기>의 ‘백이전’은 1억 1만 3천 번(현재 수치로 11만 3천 번) 읽었다고 하지요. ‘백이전’을 1억 번 이상 읽었다 하여 그의 서재 이름이 ‘억만재’였을 정도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그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흔한 일이었으나 김득신처럼 만 번 단위로 읽은 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훗날 정약용은 "글자가 생겨난 이후로 상하 수천 년과 종횡 3만 리를 통틀어 독서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당연히 백곡(김득신의 호)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머리가 좋지 않은 그에게 과거 급제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차례 낙방 끝에 겨우 사마시에 붙어 진사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간신히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이때 김득신의 나이가 39세였습니다.
그가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은 20년 뒤의 일입니다. 59세 때의 일이지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과거 급제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김득신은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으나 사실 그의 진짜 재능은 글짓기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특히 시를 쓰는데 능해 당시 한문 4대가 중 한명인 택당 이식에게 극찬을 받았지요.
효종은 김득신의 대표 작품인 ‘용호’를 읽고 난 뒤 당나라의 시에 넣어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중국 한시의 양대 거장인 시선(詩仙) 이태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당나라 때 활동하였습니다. 그만큼 김득신의 시를 높게 평가한 것이고, 그의 이름은 현재까지 조선 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남아있지요.
이 모든 것이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아들의 공부를 지원한 김치,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김득신의 끈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국사의 대표적인 노력형 캐릭터로 오늘날 시사 하는 바가 크지요.
충청북도 증평군에 있는 김득신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려있을 따름이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참 교훈적 입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