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門 안에는 문수, 山門 밖에는 보현
재가불자들에게 참선 교육을 시키는 것을 아예 못 마땅히 여기는 분도 있다.
이유인즉, 참선을 조금 가르쳐 놓으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말을 잘 안 들을뿐더러 시주도 잘 안 한다는 것이다.
그저 ‘제가 수행해서 제가 부처 되는 게 불교’라는 식이 되어버려 영 재미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도들은 그저 기도나 열심히 하고 시주를 많이 하도록 해서 복이라도 많이 짓게 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도 좋고 절의 입장에서도 좋다는 주장이다. 뼈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참선을 제대로 배운 이라면 복 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복에는 유위(有爲)의 복과 무위(無爲)의 복이 있어서,
참선은 무위의 복을 짓는 최상의 수행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선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선지식과의 만남을 필수로 하며,
선지식과의 만남은 복 짓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선지식은, 그저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유위의 복이든 무위의 복이든 열심히 짓다 보면 저절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복 지은 만큼 나타나게 되어있다.
무한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무한한 선지식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자그마한 선지식이 나타난다.
자비와 복덕은 통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항상 둘이어야 한다는 식으로는 자비 복덕이 쌓일 수가 없다.
‘작은 나’가 좀 손해 보더라도 ‘큰 나’가 잘 되게 해주는 게 자비가 되고 복덕이 된다.
그저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야 복이 된다.
그렇다고 늘 상 양보만 해서는 살 수가 없는-경우도 있다. 그런 때 지혜가 필요하다.
국사암 문수전 주련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입문견문수(入門見文殊)
출문견보현(出門見普賢)
군심약사아(君心若似我)
환득도기중(還得到其中)
산문에 들어서면 문수를 보고,
산문을 나서면 보현과 만나네.
그대 마음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그 중도에 다다르리.
문수보살은 지혜, 보현보살은 실천행의 상징이다.
좌선하고 있을 때야 지혜를 닦는 데 전념해야겠지만, 그 외의 시간에 실천행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 불교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