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3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4,1-6
바리사이, 율법학자의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아닌지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 돌려보내신 다음,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나이 들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대답을 즉시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대답을 즉시즉시 했더니 사람들이 그 대답으로 옭아매어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도 일단 침묵을 지킵니다.
물론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신중한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이 말을 막 할 때가 좋습니다.
어떤 것들에 일부러 침묵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신중해서가 아니라 솔직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심으로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면서도
자신들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꼰대’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꼰대들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이날치’는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입니다. 본명은 이경숙이지만, 날쌔게 줄을 잘 탄다는
의미에서 날치라는 예명이 붙었습니다.
상민과 양반,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은 서편제의 대표 소리꾼으로,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판을 열기도 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전해지진 않지만,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실제 새가 날아들었다는
말까지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이날치의 재기 넘치는 멋과 흥을 되살린 ‘이날치 밴드’가 지금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조선의 힙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날치 밴드가 등장하는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은 조회수가 2억 7천만을 넘어서
해외에서도 인기몰이 중입니다.
반복되는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 홍대 앞 클럽에 어울릴 법한 분위기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엉뚱하게도 판소리 ‘수궁가’의 한 장면입니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범 내려온다.”
별주부가 호랑이를 만난 순간을 묘사한 이 노래,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고, 유튜브 조회
수만 2천9백만, 이날치가 등장하는 다른 영상들까지 합하면 2억7천만을 넘었습니다.
베이스 2명과 드럼 1명, 그리고 정통 국악을 전공한 소리꾼 4명의 조합으로, 2018년
밴드 결성 이후 국악도, 힙합도, 디스코도 아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국악계의 불편한 시선도 없지 않지 않습니다.
그 불편한 시선에도 음악은 무엇보다 일상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안이호 보컬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가 만들어준 가치라는 것이 주는 압박이랄까요.
그 무게감은 사실 일상에 스며들기는 힘들잖아요.
그 가치에 스스로 짓눌려있는 것 같아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오랜 가르침을 새롭고 독특한 음악으로 몸소
구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2억7천만 뷰 기록한 ‘이날치 열풍’, 세계 매료시킨 ‘조선의 힙합’’, 정연욱 기자,
KBS 뉴스, 2020.10.28]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이전의 틀을 고수하려는 사람과 이전의 것을 익혀서 현 대중들에게 맞추려는
사람들입니다.
판소리는 여전히 현대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일부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날치’란 젊은 그룹이 판소리를 힙합과 결합해 인기몰이 하니까 일부
판소리꾼들은 그들에 대해 거북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소리는 조선 시대의 힙합과 같은 대중음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시대에 맞춰 이 대중음악의 틀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중이 알아주지 않으면 판소리는 이제 영원히 잊힌 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형식만을 강조하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처럼 꼰대 소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고 잊히면 의미 없게 됩니다.
이전의 가치의 무게를 벗고 현시대에 그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면 ‘무엇은 바뀌면 안
되고 무엇은 바뀌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며년 전에 별세하신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중이 원치 않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을 만드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대되면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꼰대’는 젊은이들이 잔소리꾼 어른들을 일컬어 부르는 은어입니다.
이들이 잘 쓰는 말은 “나 때는 ~”입니다.
이것을 비꼬며 발음이 비슷한 ‘라떼’ 커피와 결부시키기도 합니다.
꼰대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이 현재의 가치에 대해 논하십니다.
‘지금’ 바뀌지 말아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랑의 가치’입니다.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기
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가차 없이
바꿔야 합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이 바뀌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하십니다.
‘지금’과 ‘이웃사랑’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다면, 절대 꼰대라 불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3일 [연중 30주간 금요일]
루카 14장 1-6절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더라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당장 구해내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
<내 코가 석자인데>
저는 너무도 부당하고 부끄럽지만 수도자 양성 책임을 맡은 지가 벌써 몇년째 접어듭니다.
양성책임자로서의 역할은 참으로 힘겹습니다.
매월 적어도 한번씩은 양성중에 있는 형제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동반자로서 어려움이나 하소연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은 첫 번째 가는 의무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취약점들이 무엇인지
늘 눈여겨보고서는 일일이 피드백을 해주어야 합니다.
내 코도 석자인데 너무도 괴로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일이려니 하고 또 다시 용기를 내곤 합니다.
형제들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늘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지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판단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기다릴 줄 아는 영적인 스승이 되어달라"는 요구입니다.
또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가 "제발 편애하지 말아달라"는 충고입니다.
또한 "부성애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아버지가 되어달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한 그룹의 형제들과 한잔하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최종적인 결론은
부성애였습니다.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네요.
한번은 제가 큰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몰던 승용차와 부딪친 차가 바로 폐차장으로 갈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물론 순식간에 자동차 보험 수가가 올라가서 책임자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을 상황
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저나 상대편이나 두드러지게 신체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사고를 마무리하고 미안한 심정, 잔뜩 주눅든 얼굴로 맨몸으로 수도원으로 들어오던
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송구스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잔뜩 주눅들어서 들어서는 제게 당시 원장 신부님은 오직 한마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나?"
제 생애 안에서 참으로 잊혀지지 않은 순간입니다.
화가 잔뜩 날만도 하련만 "차가 얼마나 부서졌는지? 보상해주어야 할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제 걱정부터 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존재라는 것,
바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 신적인 인물이셨지만 그에 앞서 따뜻한 피가 흐르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언어,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한 인간이 겪고 있는 슬픔과 좌절 앞에서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의 슬픔 앞에 눈물 흘리시던 분, 한 인간의 고통 앞에 당신 역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전혀 엉뚱한 길, 죽음의 길을 지척지척 걸어가고 있는 한 가련한 인생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하시던 분, 무엇보다도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
시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셨던 예수님의 자비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비록 우리가 비참하고 부끄럽지만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우리의 나약함에
다시 한 번 의연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청하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강론>
(2023. 11. 3. 금)(루카 14,1-6)
<종교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루카 14,1-6).”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즉 호의적인
사람이었을 텐데, 그 식사에 함께 참석한 다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종을 앓는 사람’이 마침 예수님 앞에 있었다는 말은, 우연히 그 자리에 병자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병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앉혀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고 그 병자를 고쳐 주실 것이라고 예상했고,
자기들이 생각한 대로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쳐 주시면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그런 속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병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지 않은 것도 그 자신이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데리고 왔음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병자 자신도 안식일 규정을 강하게 의식해서 치유를 청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자리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두려워해서 치유를 청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도와 속셈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자가 청하지 않아도 당신이 먼저
병자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요한 5,6).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병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라는 질문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율법을 위반하는 일이냐? 아니냐?” 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합당하다.”가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합당하지 않다.”가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루카 13,14).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초대한 집주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침묵은 예수님 말씀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 그를 돌려보내신 것은, 그가 손님으로서
참석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병자 자신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병자 입장에서는 ‘병을 고친 기쁨’보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박해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감’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과 압박감 때문에,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자기를 고
쳐 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종교와 신앙을 “남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이고, 자기를 억압하는 멍에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종교와 신앙에서 구원, 자유, 해방을 체험하지 못하고, 억압과 압박만을 느낀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아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은, ‘생명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 규정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종교는 ‘생명을 구하는 곳’,
또 ‘사랑만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말씀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적대감이 더욱 깊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사도시대 때에 율법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사도 15,10-11).”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계 신자들을 가리키고,
‘그들’은 이방인계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멍에’는 할례를 비롯해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베드로 사도는, “율법은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였다.” 라고 분명하게
밝혔고, 멍에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선언했고,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으로 받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선언과 고백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과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원과 해방과 자유는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