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1994)
[작푼해설]
이 시는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 속에 대다히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일상에서 흔히 보게 되는 ‘연탄재’를 통해 뜨거운 열정도 없이 타당성에 젖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속물성과 허위의식을 준열하게 질타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하찮은 연탄재에도, 지난 시절 불같은 열정을 꽃피웠던 한때가 있었음을 상기하며, 우리의 지나온 삶을 반성하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한다.
이 시가 보여 주는 이러한 반성의 미학은 「연탄 한 장」 · 「반쯤 깨진 연탄」 · 「겨울밤에 시 쓰기」 등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연탄 한 장」은 이 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탄 한 장」을 보기로 한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면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이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연탄 한 장」 전무 -
[작품해설]
이 시는 ‘연탄 한 장’이 만들어진 이후, 차에 실려 ‘조선 팔도’의 모든 가난한 집으로 배달되어 그들의 허기와 추위, 그리고 외로움까지 자신의 온몸으로 뜨겁게 어루만져 준 다음, ‘눈 내려 미끄러운 길’을 위하여 ‘산산이 으깨’지는 연탄의 일생을 통해 진정한 ‘삶이란 / 나 아닌 그 누구에게 /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임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보듯 ‘연탄’은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 열정이 만들어 낸 ‘따스한 밥과 국물’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이 되어 그들의 삶을 지속시켜 준다. ‘연탄’은 이렇게 온몸이 불타는 고통을 사람들에게 참사랑ㅇ르 베풀어 준 다음, 스스로는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연탄’의 일생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산산이 으깨’지는 또 한 번의 고통을 통해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길’을 만듦으로써 완성된다. 물론 여기서 완성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슴에 살아 있는 ‘사랑’으로 승화되어 다시 그것을 보는 사람의 가슴을 태우는 감동의 연탄으로 남게 된다. 결국 ‘연탄’은 거룩한 희생을 통해 사랑의 열정을 꽃피우는 ‘영혼의 연탄’이 되는 것이요, 그에 따라 ‘연탄재’도 ‘영혼의 연탄재’로 재생, 부활하는 것이다.
「연탄 한 장」에서 보여 준 ‘연탄’의 이러한 희생은 「너에게 묻는다」에 그대로 이어져 뜨거운 사랑을 가진 ‘연탄재’로 나타난다. 지금은 비록 차갑게 식었지만 한 때는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연탄재’는 우리에게 그 뜨거운 사랑을 환기시켜 주는 감동의 소재로 등장한 것이다. 시인은 ‘연탄재’가 갖고 있는 열정· 생명 · 희생 같은 함축적 의미를 통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줌으로써 우리의 삶이 진정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한편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표제도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나오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라는 시행에서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소개]
안도현(安度眩)
1962년 경상북도 예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
1996년 제1회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0년 원광문학상 수상
시집 :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모닥불』(1989),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그리운 여우』(1997),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1999), 『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아침엽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