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예수,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성인이 아니면 바보) 장기려 이야기들
*장기려 박사님 찬사의 글이 워낙 많아서
아주 일부분만 이동하여 소개합니다.
그 사람 ,바보의사 장기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1911.8~!995.12)박사는
늘 어둡고,낮고,배고프고,아픈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의 예로, 그 분이 원장이신 부산의 고신대병원에는
병원비가 없어 치료가 끝나고도 퇴원을 할 수 없는 농부가 입원해 있었다.
생각다 못한 농부는 급기야 장기려 박사님께 이 사실을 고백하는데 ...,.
"원장님, 모자라는 입원비는 돈을 버는대로 갚겠다고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제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밤에 병원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도망치시오
얼마 안되지만 차비요 열심히 사시오"
다음 날
"원장님 큰일 났어요 106호 환자가 간밤에 사라졌습니다"
"다 나은 사람,병원에 더 있으면 뭐하겠소.
알다시피 지금 농사철 아니오
농부는 밭에 있어야지 병원에 있으면 되겠소?
그래서 내가 문을 열어줬소"
북에 두고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끝까지 그 남편의 자리를 지킨 지조있는 분,
독실한 그리도인으로
작은 예수,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분
참으로 인간의 아름다운 품성을
은은히 풍겨내며
진정 바보소리 들으며
가치로운 일을 할 때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출처:해바라기의 사랑으로
https://youtu.be/uuJ-SCwk7Z0)에서>
당신은 성인 아니면 바보
평생 병원 건물 옥탑방에서 기거하며
밤낮없이 환자를 보살핀 의사가 있습니다.
덕분에, 그가 근무한 병원에서는
어떤 시간이라도 아픈 사람들이 진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그를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병원비가 없는 사람을 위해 자기 월급을 가불해서
대신 병원비를 내주는 마음 따뜻한
바보였습니다.
남북 분단으로 이산가족이 되어
해어진 아내를 그리워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이 의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선생님께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께 발급된 월급수표를 어떤 노숙인이
사용하려다 신고로 잡혀 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아니, 이 사람에게 적선을 하려는 데
마침 가진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냥 드린 겁니다.
아이고, 저 때문에 이분이 괜히 경찰서까지
와서 고초를 겪으시니 이거 미안해서
정말 어쩌지요."
어느 날은 한 환자가 병원비가 없다고
한탄을 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또 자신의 월급을 미리 받아 환자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려고 했으나 병원에서
거절했습니다.
이러다가는 선생님이 돈이 없어서 식사조차
제대로 못 할 판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던 선생님이 환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밤중에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눈치를 봐서 살짝 도망가세요."
수많은 인술을 펼치고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의
초석을 만들어 주신 분이 바보라 불리며
존경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1995년 세상을 떠난 장기려 선생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세상에 전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그 어떤 것도
세상에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성인 아니면 바보스러운
당신을 존경합니다.
<따뜻한 하루에서>
바보천사
병원에 갈 형편이 못 되어 의사라고는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부산에 천막을 치고 병원을 세웠다.
평생을 행려병자를 치료하며 살아온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평소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의과대학에 들어가게 해 준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그는 이광수의 ‘사랑’의 주인공 모델이 될 만큼
청빈과 박애의 삶을 살다 간 성자였다.
어느 날 경남의 한 농촌에 살던 아낙네가 중병에 걸려 수술을 했는데
수술비가 없어 고민하다가 원장실을 찾아왔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기회를 봐서 환자복을 입고 병원을 탈출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바보같은 천사였다.
모란공원에 가면 그의 소박한
묘비명을 만날 수 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예수 때문에 바보가 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
은혜글입니다
진정한 성공자의 모습아닐까요?
< 페북 손욱 에서 >
대한민국 보험 제도선구자 장기려 박사
당신은 성인 아니면 바보
2018년 11월 16일 알쓸신잡3에서 조명한 장기려 박사가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고인의 과거 훈훈한 미담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대한민국에 보험 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의사이자 넘치는
사랑으로 평생을 사회에 헌신한 위대한 대의입니다.
별명으로는 바보, 한국의 슈바이처 등이 있다.
바보 의사, 바보 장기려, 장바보라고도 불립니다.
한마디로 대인배 혹은 성인(聖人)의 표상입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 외과 과장자리를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합니다.
그 이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난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 옮긴 글>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장기려 박사
상패까지 팔아 가난한 이웃 위해 봉사한 참된 의사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남한에선 처음으로 부산에 무료 병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 병원에 일하면서 집 한 칸이 없을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다 못한 병원에서 방 한 칸을 마련해 줬습니다.
생전에 막사이상 등을 받았지만 선생은 상금은 물론 상패마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인류애를 실천한 참다운 의사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을 공격해 왔습니다.
서울은 물론 낙동강까지 점령했던 북한군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밀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까지 점령당했습니다.
“쌔액!”, “쿵~쾅!”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병원 의사들은 깜짝 놀라 모두 피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장기려 박사가 의사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저 밖을 보시오…….”
창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장기려 박사와 동료 의사들은 7 개 수술실에서 49 건의 중요한 수술을 했습니다.
국군과 유엔이 평양에 입성하자 이번에는 국군 장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12월 3일, 중공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 전쟁에 끼어들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사님, 다친 국군을 도와 줬으니 북한군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해 준 게 어찌 죄가 된단 말인가?”
“박사님,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제가 평양역으로 차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장기려는 둘째 아들 기용과 평양역으로 나가 군의관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지 4 시간 후 구급차 한 대가 급하게 섰습니다.
이 자동차를 급히 몰아 집으로 가 봤지만 나머지 가족은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가족을 못 만난 채 평양 종로 앞을 지날 때 둘째 아들 기용이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예요. 어머니!”
기용은 목이 터져라 어머니를 불렀지만 차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피난민 행렬 속에서 차를 세웠다간 큰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용아! 그만 울음을 그쳐라. 곧 만나게 될 게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는 이때 본 아내와 자식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들은 대동강을 못 건너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 부산서도 오직 치료에만 전념
부산으로 내려온 박사는 육군 병원에서 숱한 병사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서 알고 지내던 한상동 목사 등이 찾아와 5000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이 돈으로 1951년 6월 20일, 민간인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비록 천막 병원이었지만 피난지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던 환자가 하루에 200여명씩 찾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선생은 ‘의료보험조합’과 ‘청십자병’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환자 한 사람이 원장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습니다.
“원장님, 지금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퇴원해 돈을 벌면 반드시 치료비를 갚겠습니다.”
“사정이 딱하군요. 제가 몰래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도망치세요. 발각되면 나도 사정이 곤란하니…….”
원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 사내에게 교통비로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습니다.
박사는 이처럼 남한 최고의 의사가 되었지만 결코 부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가진 게 너무 많다.’며
늘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며 살았습니다.
1985년 9월, 장기려는 분단 40 년 만에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 있는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그럴 순 없소.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혜택이 돌아올 수 있었겠소.
나를 이번 고향 방문단에서 빼 주시오.”
박사라고 어찌 가족이 그립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장기려 박사는
그런 혜택을 받지 않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렇듯 젊은 시절 ‘경성의전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의사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죽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평생 살겠다.’는 첫 결심을 잊지 않고 살았던 참된 의사였습니다.
▲ 장기려 박사는 돈이 없는 사람을 치료할 때 자신의 피를 대신 주기도 했다.
또한 돈이 없는 환자에게 병원 뒷문을 몰래 열어주며 야반도주 시킨일도 있다
<장기려 연보>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남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 전신) 수석 졸업
일본 나고야대 의학박사
평양연합기독병원장, 김일성대학 의대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의원장, 부산 아동병원장 역임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 양성
국내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 및 대량절제술' 성공
부산 외과학회 창립,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병원
국내 첫 건강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창설
1945년 평양도립병원 원장을 지냄
1950년 둘째 아들 기용과 부산으로 피난, 제3육군병원 근무.
1951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료 병원 복음병원 세움
195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됨
1975년 청십자병원을 설립하고 원장 지냄
1979년 막사이사이(사회봉사상)상 받음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세상을 떠나 모란공원에 잠듦
-김남석(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