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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3:55), 2차(04:10), 3차(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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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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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2,28ㄱㄷ–34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십니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겉으로 많은 규정을 지키는 신앙보다
중심이 바로 선 사랑의 신앙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예수님의 대답은
수많은 계명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계명의 심장,
모든 율법의 중심이 무엇인지 밝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떨어진 두 길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위와 옆으로 동시에 열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먼저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삶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하느님께 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일 한때만,
기도하는 몇 분만,
생각의 일부만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 자체를 하느님께 두라는 부르심입니다.
크리소스토모의 관점에서 보면
이 계명은 무거운 부담이기 전에
인간 존재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삽니다.
돈이든 인정이든 체면이든 두려움이든
무엇인가를 가장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문제는
사랑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가장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사랑, 뒤틀린 사랑,
잘못된 중심에 붙들린 사랑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려놓으십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말씀하신 뒤
곧바로 이웃 사랑을 떼어놓지 않으십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복음의 중심과 어긋납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신앙이 입술의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의 자비와 돌봄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보이지 않는 열심으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 안에서 시험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부록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가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응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도 매우 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신비한 장소 이전에
사랑의 중심이 바로 설 때 가까워지는 현실입니다.
형식보다 사랑,
제사보다 자비,
겉의 열심보다 중심의 진실이 바로 설 때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바로 이 자리에서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이 갈린다고 보았습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아주 단순하지만 깊게 묻게 합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
가장 쉽게 무너지는 자리가
곧 내 사랑의 방향을 보여 주고 있지는 않은가?
또 나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판단과 무관심, 피로와 자기보호 뒤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성찰은 바로
삶의 중심 사랑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셨기에
자기 삶 전체를 “예”로 내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걸음이 되었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남을 먼저 살피는 마음이 되었고
십자가 아래 끝까지 머무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한 몸처럼 드러난 삶이 바로 성모님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 길을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내 삶의 첫째 계명은 실제로 무엇인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다른 많은 것들을 더 크게 두려워하고 더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만 품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랑의 중심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주님,
제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워 주소서.
당신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흘러가게 하소서.
형식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사랑의 중심이 살아 있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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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잠을 청하기도 합니다. 노트북이 있으니 강론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좌석 스크린에 준비된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이번 순례에서 돌아올 때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국 영화 ‘대가족’이었습니다. 영화는 혈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을 넘어서 사랑으로 맺어지는 가족을 이야기합니다. 주인공은 입양을 통해서 많은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따뜻함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인상 깊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스님이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와 같다. 아이는 부모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아이는 신(神)과 같다. 부모는 신을 모시듯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제게 우주와 같았습니다. 그 품에서 먹고, 자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후에 제게 맡겨진 본당과 공동체가 있습니다. 과연 저는 그 본당과 공동체를 하느님처럼 섬겼는지 돌아봅니다.
여론(輿論)과 민심(民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날씨와 기후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합니다. 비가 오기도 하고, 해가 나기도 하고, 눈이 오기도 하고, 덮기도 하고, 춥기도 합니다. 기후는 일정한 패턴과 특색이 있습니다. 온대기후, 열대기후, 몬순기후, 아열대기후, 사막기후, 한대기후가 있습니다. 기후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날씨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같다면 기후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와 같습니다. 여론은 작은 사건과 사고로 출렁거리곤 합니다. 여론은 주도하는 언론과 방송에 따라서 변하곤 합니다. 그러나 민심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물처럼 민심은 더 깊고 넓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여론을 따라서 춤을 추기보다는 민심을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天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제 대한민국에서는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있었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을 파면하였습니다. 작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올해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작년에 새롭게 탄생한 이재명 정부에 대한 민심을 알 볼 수 있는 선거입니다. 정부 여당의 국정 심판에 대한 민심이 크다면 야당에 힘을 몰아 줄 것입니다. 새롭게 탄생한 정부 여당에 대한 민심이 크다면 여당에 힘을 몰아 줄 것입니다. 민심을 반영하는 것은 무엇보다 ‘먹고사는 경제’입니다. 삶의 터전이 ‘부동산 정책’입니다.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큰 대한민국의 민심은 경제 상황과 주식 시장이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링컨 대통령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날씨처럼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 여론처럼 쉽게 출렁거리는 것이 아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두 가지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온 정성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정성과 마음과 힘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기호에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여건에 따라서 바뀌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겉절이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익은 음식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기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싱겁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체질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공포, 액션 영화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가족, 사랑 영화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사랑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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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의 길인 ‘계명’에 대해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와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나아가,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계명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요한복음>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아니면,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우리가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고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며,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재물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로 보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이웃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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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 사두가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적대감을 가지는 대신 존중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모습을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마르 12,28)라고 묘사합니다.
“듣고”, “보고”, “다가와”라는 동사를 잇따라 쓰며,
한 인간이 진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라삐들이 613개의 계명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나누어 논쟁하던 시대, 그는 율법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을 묻습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 무엇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계명만으로 답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신명기 6장 4절의 고백을 꺼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면, 사랑도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인간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삶 전체를 돌려놓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1).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인간을 향한 책임으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국 형제적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율법 학자는 더 나아가 이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라고 고백하며,
성전의 제도보다 더 깊고 넓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짚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34).
아직 문턱이지만, 이미 빛은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사랑은 그 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놓은 숱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율법은 제도와
사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완성을 이루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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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규정되기를 거부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끊임없이 성숙해 가며,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펼쳐져 갑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는 길
규정되기를 거부하기!
2026년 6월 3일 수요일
CAC 팀의 일원인 캐시디 홀(Cassidy Hall)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는 충동에 대해 성찰합니다:
"언제 알게 되었나요?" "당신이 퀴어(성적인 경향이 다른 사람)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언제 처음으로 여성에게 끌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요?"
우리는 보통 이런 질문들을 던지곤 하고—때로는 지나치게 많이 묻기도 하는데—그 이유는 사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스스로 편안함을 얻거나 자기-이해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런 우리의 질문들이 하느님의 형상이 우리 위에,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둘레에 가득하다는 광대함을 묵상하는 데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실한 답만 고집하거나, 단순한 추측에 기대거나, 사회가 정해 놓은 규범과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태도가 얼마나 해로울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나 이해해야 할 필요를 내려놓는다 해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름 붙이고, 주장하고, 정의하려는 집착을 버리지 못합니다. 제가 토마스 머튼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작업하면서, 그의 은수처에서 흘러나온 의식의 흐름 같은 생각들을 담은 오디오 클립을 들었는데, 특히 이 한 문장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내가 정의될 필요가 없음을, 또 나도 나 자신을 정의할 필요가 없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정의에 알레르기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저도 제 삶의 많은 시간을 주변의 것들을 알아내고, 이름 붙이고, 규정하는 데 써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정의 속에 가두려 할 때, 동시에 우리 자신도 가두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정의하거나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단순히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에게 무조건 질문을 던질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름 붙이고, 정의하고, 규정하려는 욕구는 전혀 다른 초대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정의, '나' 자신의 이름, '나' 자신의 정체성을 거듭해서 살펴보고, 열린 손으로 붙들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숙해 가며,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끊임없이 은총 안에서 펼쳐져 갑니다. 정체성은 늘 움직이는 목표이며, 자아가 단일하거나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은 제한적일 뿐 아니라 때로는 해로울 수 있습니다. 대신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열린 손으로 붙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되어감을 허락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숨 쉴 공간과 꽃피울 여지를 줍니다…. 관상적 삶은 우리에게 같은 길을 걸으라고 손짓합니다: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집착을 느슨하게 풀어내도록 격려합니다.
홀(Hall)은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초대합니다:
무언가를 안다고 단정해 버리면, 그 밖의 더 깊고 더 넓은 앎의 다른 가능성들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더 참되고, 더 궁금하며,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 존재로서 누구인지를 끝없이 깊이 파고드는 여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의(definitions)에 알레르기가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물음이 남습니다: 우리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꽃피워 갈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가요?
우리 존재의 넓은 공간 안으로 들어섬으로써 우리는 질문들을 붙들고, 또 질문들을 맞아들이는데 도움을 받니다. 우리의 호기심은 가능성의 넓은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무한한 광대함은, 고정되지 않고 온전히 순수하게 집중된 마음을 바칠 수 있는 자리이며, 기도의 자리이고, 관상적 삶이 살아 숨 쉬는 자리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오래 전부터 제 성적 경향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느껴 왔습니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제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깊이 체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성공회 신자로 자라났지만, 동성애자로서의 제 경험을 나누는 데에는 저항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번 제 안의 빛—그리스도의 빛—을 등잔 밑에 감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어둠이 저와 저와 같은 이들을 향해 존재하지만, 이제는 퀴어(queer)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희망 안에서 우리는 힘을 얻고, 더 넓어진 배움 속에서 참된 자아로 성장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William P.
References
Cassidy Hall, Queering Contemplation: Finding Queerness in the Roots and Future of Contemplative Spirituality (Broadleaf Books, 2024), 97, 98–10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eth Macdonald,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의 하구(河口)는 땅도 물도 아닌,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세계를 드러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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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06.03 08:40
하느님의 집을 마련하는 사람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살아 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세상의 시간 기준으로 보면 이미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여전히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부르십니다. 이는 육체적 죽음이 인간의 끝이 아니며,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그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뜻합니다.
단절되지 않는 계약과 신실함하느님은 과거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들과 맺으셨던 그 사랑과 구원의 계약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보증"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이 선언은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죽음이나 소멸, 허무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을 영원히 유지시키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슬퍼할 때, 이 말씀은 큰 위로를 줍니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품 안에서 가장 온전하게 살아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산 이들'임을 일깨워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가운데 있다.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과 함께 마무신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은 단지 죽은 뒤의 부활만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가 죽음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는 선언이며,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정의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앎'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 안에 머물고, 서로의 생명에 참여하는 깊은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에 받게 될 어떤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 맺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과 삶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 도착할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관계의 공간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받아들이는 곳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품어 줄 때, 한 형제가 다른 형제의 짐을 함께 져 줄 때, 한 공동체가 서로의 부족함을 판단하기보다 기다려 줄 때, 그곳에 하느님 나라는 자라납니다. 그리고 묵시록은 그 완성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결국 구원의 완성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보다 더 깊은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 안으로 내려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살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죽음도 끊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것을 내적 가난과 형제성 안에서 살아갑니다. 내적 가난은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고, 형제성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시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형제를 알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문턱을 넘어선 것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자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음의 하느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그곳에 내가 있으며, 너희가 함께 머무는 그곳이 곧 나의 집이다.”
일상의 관계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소리 내어 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고 구체적인 관계의 자리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아침에 누군가를 깨울 때 짜증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선택하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식탁에서 마지막 반찬을 내가 먼저 집지 않고 상대에게 슬며시 밀어 주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말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한 번 숨을 고르고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상대가 실수했을 때 “왜 그랬어?”보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고 말하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상처 입은 관계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오래된 서운함을 다시 꺼내 공격하지 않고 오늘의 대화를 새롭게 시작해 주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과거의 무덤을 열고 부활의 숨을 불어넣습니다. 누군가의 약점을 알면서도 그 약점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침묵, 그 침묵 안에 하느님 나라는 숨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말이 느린 사람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줄 때,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길을 찾아 줄 때, 내 방식이 옳다고 우기기보다 상대가 살아온 길을 존중해 줄 때, 하느님 나라는 관계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랍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이기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나는 곳입니다. 가정에서는 밥을 차리는 손길, 설거지를 대신하는 작은 배려, 피곤한 얼굴을 알아보는 눈빛, “오늘 힘들었지?” 하고 묻는 한마디 안에 있습니다. 형제회에서는 먼저 인사하는 마음, 낯선 형제를 가운데 앉히는 친절, 늘 조용한 사람에게 발언의 자리를 내어 주는 배려, 다른 의견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 겸손 안에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는 나만 옳다고 말하던 마음이 조용히 낮아지고, 상대도 하느님 앞에서 사랑받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순간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관계 안에서 내가 중심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를 고치려 하기보다 먼저 받아들이고, 소유하려 하기보다 놓아주며, 판단하려 하기보다 축복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완성만이 아니라 오늘 내가 누구에게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자리, 조금 더 작아지는 자리, 조금 더 기다려 주는 자리, 조금 더 용서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사람들 가운데 머무십니다. 거기가 하느님이 머무시는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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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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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4 03:55
하느님 사랑 앞에 마주 서서
“그대는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하는데
이 말이 지금의 제게는 이런 말로 들립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 서라는 말로.
저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느낌을 늘 가지고 살아가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안에서 하고 있다는 느낌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한 연설 덕분입니다.
그 연설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도 모르는 채
모르는 신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지요.
그것은 진정 큰 깨달음이고 하느님 안에서 늘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제가 너무 안심하며 하느님 앞에 차렷하고 서려고
하지 않게도 한 측면도 있음을 오늘 처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마치 아기가 안심하고 엄마 품에 있지만
장난감 놀이에 너무 빠져 엄마를 쳐다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하느님 사랑 안에 있기에 사랑은 다 받아 누리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지는 못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랑을 받을 때 사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할 때 하느님께 더 사랑을 받는 것이지요.
그것은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사랑 좀생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도 우리를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고,
당신을 더 사랑해야지만 더 사랑해 주시는 분도 아니시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햇빛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비를 맞으러 나가지 않고 피하고,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햇빛을 쐬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 사랑 앞에 서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느님 사랑 안에 있고 사랑에 잠겨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하느님 사랑 앞에 마주 서서 그 사랑을 포옹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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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율법의 완성과 예수님의 새 계명~~~
오늘 율법 학자 한 사람은 어제와 그제 우리가 만났던 이들과는 달리 비교적 진솔한 질문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모든 계명 가운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자주 논쟁되던 주제였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 율법을 수천 가지 규정으로 세분화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핵심을 뽑아내어 가장 짧은 형태로 표현하려 애쓰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도 흔히 하던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자 그는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하고 응답했습니다.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잘했구나!" 하고 칭찬하는 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 율법 학자는 질문자라기보다 시험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어제와 그제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보다는 더 정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엄연히 예수님께서 그 율법 학자에 해 주신 칭찬이긴 하지만 뭔가 조금 모자라는 듯한 칭찬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다."거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 학자에게 하신 말씀과 당신 십자가 옆에 달렸던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비교해 볼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예수님께서 당신(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하느님 나라)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사실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올바른 공식을 암송하는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들일지라도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두고 그분께 의탁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 은총은 큰 파도처럼 우리 안으로 밀려와 우리를 하늘 나라라는 깊은 현실로 휩쓸려 들어가게 해 주는 사랑의 힘입니다.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에게 주어진 은총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질문을 받으시고 나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두 번째 계명을 덧붙이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계명은 흔히 우리가 "황금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독특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는 여러 종교와 철학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수 세기 전, 플라톤도 "내가 다른 이에게 행하기를 바라는 것을 나도 그들에게 행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황금률은 복음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복음의 핵심이나 그 자체는 아닌 셈인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세 율법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신 것이지, 복음의 핵심으로서의 당신의 고유한 가르침을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그저 "서로 사랑하여라!"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당신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며 그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 서로의 사랑을 살아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요 예수님의 고유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실 때 염두에 두셨던 당신의 고유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의 자기 사랑에 바탕을 둔 사랑은 왜곡되거나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사랑(하느님 사랑)은 절대 우리를 다치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고 허물을 용서해 주며 우리의 생명을 더더욱 충만하게 해 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의 기준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서로간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내' 힘나 '내'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착각이나 환상에서 벗어나, 그 사랑이 하느님 은총에 의해 촉발되고 발전되며 완성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도 형제들에게 준 권고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자기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결국, 악마의 꾐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먹은 것이 그에게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성 프란치스코의 권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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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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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과의 첫사랑!
사랑에 관해서 하느님은 참으로 요구가 많으시고,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십니다.
인생 모든 것을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존 포웰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체험한 하느님과의 첫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게 와 닿았다.”
신부님은 그 특별한 체험 이후 자신의 삶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완전히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 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한 그 이후, 더 이상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의 접촉 이후 더 이상 이웃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감미로운 체험 이후 봉헌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두 가지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둘은 구약 모든 율법의 종합이요 요약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갈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게 될 때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자비의 흔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뵙듯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총이 오늘 우리에게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이 하루를 기쁘게 살아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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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1)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너는 하느님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쳐야 한다.”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으로 여기고, 너 자신에게 주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이웃에게 주어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다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이 말은 부부 사이의 사랑에도, 가족에 대한 사랑에도, 친구에 대한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같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동전 두 닢을 봉헌한 어떤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2)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든지 이웃에 대한 사랑이든지 간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3,16; 4,10). <이미 받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고, ‘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3)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라는 말에서,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에게 한 말이 연상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무슨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실행하는 것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4)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그 율법학자를 칭찬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말만 잘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실제 삶으로도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5)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가르침은 ‘황금률’에 연결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로 압축한 것과 같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말은,
성경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이고,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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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9:55. 추가.
마르 12,28ㄱㄷ-34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첫째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에 ‘마음을 다한다’는 건 하느님 이외의 다른 쓸데 없는 것들에 신경 쓰느라 내 마음이 갈라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부질 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고 시간을 쏟아붓다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에 쓸 시간과 노력이 부족해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편,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또한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선물인 ‘생명’을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께 남은 ‘전부’였던 외아들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걸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그 큰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방법은 우리 또한 모든 걸 다하여, 후회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 뿐인 겁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느님을 향한 그 사랑이 그저 머리 속에, 관념적인 개념으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사랑을 누군가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해야 비로소 그 사랑이 제대로 열매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역시 적당히, 대충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지요. 그렇기에 내가 누군가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으니만큼, 내가 최선을 다한 사랑으로 이웃을 섬긴다면 그건 곧 주님을 섬긴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께 질문한 율법학자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깨달아 알게 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긴 하지만, 아직 그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그 앎이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습관’이 되고 ‘삶’이 되어 내 마음과 영혼 깊이 배어 들어야 비로소 내가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그분 나라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니 망설이거나 미루지 말고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랑이신 하느님을 ‘지복직관’하는 큰 기쁨과 영광을 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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