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디스토피아를 배우는 아이들 / 한숭희
다음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매트릭스> <헝거 게임> <브이 포 벤데타> <설국열차> <오징어 게임>. 모두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들이다. 이들은 문명과 지성이 무너져 가는 과정에서 세상은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갈라지고, 정부는 다수를 억압하고 통제로 인권을 유린하며 모든 사람이 불행한 어두운 사회를 그린다.
이런 영화들이 대세가 되어버린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느끼는 현실 속에 이러한 디스토피아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유린당하는 다수의 피억압자들, 그래서 뺏고 뺏기는 소유투쟁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적 조건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써 희생자 대열로 배치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절망감 등이 우리들의 존재와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지 모른다. 이 현상에 대해 챗GPT는 “이렇게 디스토피아 영화가 확산되는 이유는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이 주는 긴장감이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챗GPT가 비록 생각을 할 줄 모르는 문장조합기계에 불과하지만, 빅데이터를 대변할 줄 안다는 점에서 볼 때 그저 웃어넘길 만한 일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이 디스토피아로 향하고 있지 않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환경은 파괴되고, 재생 가능 에너지 비중은 늘지 않는다. 지난 5년 동안 서울의 아파트값은 2배로 올랐고, 그 앞에서 젊은 세대들의 “영끌”은 오히려 민망해 보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평균 임금격차도 지속적으로 벌어져서 2배 이상이 되었다. 진정한 헝거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정치는 모든 것이 ‘윤심’이 지배하는 전근대적 군신관계로 퇴화했다. 남북 관계는 다시 대치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심지어 우리의 민족 자긍심마저 일제하 강제동원 보상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무력화하는 굴욕적 외교 때문에 무참히 뭉개졌다. 이제 젊은 세대는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해야 하며, 노후를 보장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연금을 부어야 하고, 오르기만 하는 사교육비를 감당해야 한다.
자신이 향하는 미래가 디스토피아라고 믿게 되면 사람들은 미래를 위한 행동을 중단하고 오직 현재의 생존에 모든 것을 쏟아붓게 된다. 결혼을 회피하고, 아이를 낳지 않으며, 현재의 ‘헝거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는 의지만 불태운다. 인구감소 문제, 지방소멸 문제, 과잉교육경쟁 문제, 자살 문제,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 등 대부분의 위기상황들이 모두 이런 디스토피아적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
희망 없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판타지를 갈구한다. 로또 구매가 늘어난다. 또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나를 대신해 정의를 실현해 줄 화끈한 복수의 화신을 기다린다. <더 글로리> 시즌2 공개 당시에 한때 넷플릭스 서버에 오류가 생길 정도였다. <모범택시> 시즌2는 시청률 최고를 기록한다.
이런 나라에서 교육이 올바로 설 리가 없다. 기성세대는 지금 아이들에게 디스토피아적 미래 이미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어두운 질서를 학교 안에서 재현한다. 정순신 아들의 학폭은 우리 사회가 체계적으로 빚어낸 ‘일그러진 정의’의 그림자다. 사회의 삐뚤어진 권력과 정의의 기준이 학교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권력을 통해 ‘X심’ 통치를 하는 방식을 아이들은 그대로 모방한다. 조폭을 따라하던 학폭은 이제 검폭을 모델 삼는다. 스트레스가 일상화된 학교상황에서 학생들은 교사들을 우롱하고 동료 학생들을 왕따시킨다.
이들의 미래가 디스토피아라면 교사들은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살아볼 만한 미래 비전이 없는 사회에서 교육은 <더 글로리>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미래교육은 미래의 살 만한 세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교육이어야 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동원하며 아무리 ‘잘’ 가르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고민해봤자 소용없다. 이런 마당에 교육과정을 바꾸고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교육전문대학원을 신설하며 지방대학을 육성하는 등의 정책은 부차적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MZ세대의 냉소주의는 이런 ‘미래 없음’을 반영한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를 넘어설 희망이다. 유토피아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지속 가능한 미래’가 존재한다는 메시지는 이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세대의 눈에 모든 것이 헝거 게임이나 설국열차로 보인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입력: 2023. 03. 16. 03:00 수정: 2023. 03. 16. 03:04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16030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