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496
■ 2부 장강의 영웅들 (152)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0장 동방의 암운 (1)
동방의 대국 제(齊)나라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10여년전 2경(二卿)인 국좌와 고무구가
몰락한 후, 제(齊)나라는 전혀 다른 체제를 보여주고 있었다. 최저(崔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국정이 확대된 5경(五卿) 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5경은 최저를 비롯하여 경봉(慶封), 포국(鮑國), 국약(國弱), 그리고 고후(高厚)였다.
경봉(慶封)은 성맹자의 정부(情夫)였다가 국좌에게 살해된 경극의 아들이다.
최저로서는 다루기 쉬운 경봉을 경(卿)의 반열에 끌어올림으로써 국정 동반자로 삼은 것이다.
포국(鮑國)은 발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포견의 아우였다.
노나라에 살고 있던 그를 데려다 포씨 일족의 계승자로 삼았다. 역시 최저로서는
포숙의 후광을 입고 있는 포씨 일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였다.
국약(國弱)은 성맹자에게 피살당한 국좌의 차남이다.
장남인 국승은 역시 국좌가 죽은 직후에 살해되었다.
이 현장을 목격한 국약은 노나라로 망명했으나, 나중에 제영공(齊靈公)의 명에 따라 귀국하여
국씨 집안의 계승자가 되었다.- 국가 원훈의 집안을 몰살시킬 수는 없다.
이런 명분이었으나, 제나라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국씨 일족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인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고무구의 아우인 고후(高厚)가 제 5경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5경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면 최저를 기준으로 볼 때 경봉과 포국은 친최(親崔) 노선이었고,
국약과 고후는 반최(反崔) 노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러나 국약과 고후가
멸족 직전에서 구제된 것을 감안하면 그들로서는 대놓고 최저의 뜻을 거역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고루고루 권력을 분배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최저(崔杼)는 그만큼
치밀한 계산하에 조각(組閣)을 단행했던 것이다.또 한 사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었다.
안약(晏弱)이었다. 안약은 망명사족이기 때문에 제(齊)나라 내에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품이 중후하고 외교를 비롯한 행정 능력이 뛰어난데다가 늘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특히 잘못된 점이 있으면 군주에게도 경대부들에게도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 어쩐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제(齊)나라 재상자리에 올라
국정을 한 손에 장악한 최저였지만 안약의 말과 행동에 만큼은 신경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완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최저(崔杼)는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공(功)을 세우게 하자.'
안약의 약점이라면 집안이 보잘것없다는 점이었다.대부라면 식읍(食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망명했을 당시 받은 손바닥만한 영지가 고작이다. 그나마 그것도 고씨 일족의 땅이다.
고고(高固)가 살아 있을 때는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고고가 죽은 이후로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최저의 도움을 받는 형편이다.
자기 나름의 버젓한 영지를 소유하는 것이 안약의 가장 큰 바람일 것이다.
영지는 아무나 소유하는 게 아니다.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워야 받는 것이다. 영지를 하사받을 만큼의 큰 공훈이란 무엇인가.
- 전쟁에서의 승리.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전쟁에 나가 이기고 돌아오면 일약 공신의 반열에 오른다.
영지를 받고 가문을 탄탄하게 구축한다면 안약(晏弱)의 영향력은 지금보다 더욱 커질 것이요,
그런 계기를 최저(崔杼)가 마련해준다면 안약으로서는 최저를 은인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위험도 따른다. 이기면 다행이지만 지면 몰락으로 이어진다. 전쟁터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안약의 운에 맡길 수밖에.'
이런 면에서 최저(崔杼)는 냉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각 물밑 작업에 착수했다.
제(齊)나라 동쪽에 내(萊)라는 나라가 있었다. 지금의 산동 반도 밑동에 위치한 땅이다.
예부터 제나라는 내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내(萊)나라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은(殷)나라가 하왕조를 무너뜨릴 때 성탕(成湯)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산동성 일대에 거주한 것이 분명하다.
은왕조시대에는 어엿한 제후국으로 활약했다.
제(齊)나라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동방의 지배자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런 내(萊)나라가 역사 무대의 한 귀퉁이로 쫓겨난 것은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리는
태공망 여상(呂尙)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주무왕(周武王)은 무력으로써 은왕조를 무너뜨렸는데,
그때 은왕조의 대부분 후예들은 동방으로 도망쳤다.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재기를 위한 도망이었다.
그들은 은왕조에 호의적이었던 내(萊)나라 사람들을 설득하여 주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주왕실이 가장 유능한 인물이자 혁명의 일등공신인 태공망을 동쪽으로 보내
제(齊)나라를 세우게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 동이(東夷)를 토벌하고 그 땅을 그대 영지로 삼아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이와 관련한 재미난 일화가 있다.
.....주무왕으로부터 영구(營丘)를 봉지로 받은 태공망은 부임지를 향해 떠났는데, 그 여정이
매우 느긋했다. 도중에 한 여관에 들었을 때 그 곳 주인이 태공망에게 넌지시 말했다.
- 때를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합니다. 손님께서 잠자는 것을 보니 매우 편안하군요.
손님께서는 영구(營丘)로 부임하는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이런 주의를 받고 나서야 태공망은 정신을 차리고 밤을 도와 달려서 영구에 당도했다.
이때 내(萊)나라가 침공해왔다. 태공망은 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내나라 군을 물리쳐 영구를 차지하고 제(齊)나라를 열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의 제(齊)나라 영토는 내(萊)나라를 침략하여 얻은 땅인 것이다.
내나라 입장에서 보면 불공대천의 원수다.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우선 내(萊)나라를 정벌하심이 어떨는지요?"최저(崔杼)는 제영공에게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여기서 그가 '우선'이라고 말한 것은 제영공에게 패자(覇者)의 꿈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동쪽 내(萊)나라부터 취하는 것이 수순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이었다.제영공(齊靈公)은 최저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을 반짝였다.
즉각 중신들을 불러 내(萊)나라 정벌 계획안을 짜라고 지시했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제(齊)나라는 여러 차례 내(萊)나라 정벌을 시도했다. 가까이로는 제혜공 때에
내(萊)나라를 공격했었다.그러나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군사만 잃었다.
그만큼 내나라의 지세는 험하고, 군사들의 저항도 강했다.'해낼 수 있을까?'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중신들을 향해 제영공(齊靈公)은 비웃듯 말했다.
"우리 나라에는 겁쟁이들만 있는가?"모두들 아무 소리 못했다. 내(萊)나라 정벌은 결정되었다.
또 하나의 뜻밖의 명령이 떨어졌다.- 내(萊)나라 정벌 대장에 안약을 임명하노라.
조정은 수군거렸다. 반대하는 사람도 나타났다."안약(晏弱)은 외교 행정가일 뿐 장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영공(齊靈公)은 밀고 나갔다. 물론 그 뒤에 최저가 있다는 것을 중신들은 모르지 않았다.
안약(晏弱)은 장수의 자격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임치성을 출발했다. 정벌군은 1만 명.
안약(晏弱)이 성문을 나섰을 때 최저(崔杼)가 배웅을 나왔다."반드시 성공하시길......"
"저의 능력을 다할 뿐입니다.""언제쯤이면 돌아올 수 있겠소?"
정벌 기간을 얼마로 잡느냐는 물음이었다."단순한 전쟁이면 한 번 싸움으로 승패가 나겠지만,
이번 경우는 땅과 백성을 얻어야 하는 전쟁입니다. 3년 정도는 걸려야 하지 않을까요?"
나라를 합병하는 것은 싸움에 이기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않고서는 나라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
최저(崔杼)는 안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그렇소.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지요.
무운을 빕니다.""경께서도 안녕하십시오."이 말을 남기고 안약(晏弱)은 떠나갔다.
최저(崔杼)는 안약의 그 말이 단순히 감사의 인사인 줄 알았다.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안약이 내(萊)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임치성안에서는 최저의 반대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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