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 22 / 오승철
- 그래, 그래 알겠더냐
- 날아보니 알겠더냐
- 그래, 그래 알겠더냐
- 매운맛을 알겠더냐
한 생애
그리움으로
붉어보니 알겠더냐
다 떠난 바다에 경례 / 오승철
둥실둥실 테왁아
둥실둥실 잘 가라
낮전에는 밭으로 낮후제는 바다밭
누대로 섬을 지켜온
그들이 퇴장한다
그만둘 때 지났다고 등 떠밀진 말게나
반도의 해안선 따라
바다 밑은 다 봤다는
불턱의 저 할망들도
한때 상군 아니던가
한 사람만 물질해도 온 식구 살렸는데
어머니 숨비소리
대물림 끊긴 바다
숭고한 제주 바당에 거수경례하고 싶다
오키나와의 화살표 / 오승철
오키나와 바다엔 아리랑이 부서진다
칠십 여년 잠 못 든 반도
그 건너
그 섬에는
조선의 학도병들과 떼창하는 후지키 쇼켄*
마지막 격전의 땅 가을 끝물 쑥부쟁이
“풀을 먹든 흙 파먹든
살아서 돌아가라”
그때 그 전우애마저 다 묻힌 마부니언덕
그러나 못다 묻힌 아리랑은 남아서
굽이굽이 끌려온 길,
갈 길 또한 아리랑 길
잠 깨면 그 길 모를까 그려놓은 화살표
어느 과녁으로 날아가는 중일까
나를 뺏긴 반도라도
동강 난 반도라도
물 건너 조국의 산하, 그 품에 꽂히고 싶다
*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소대장으로 참전했으며, 조선학도병 740인의 위령탑 건립과 유골 봉환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고산문학대상> 수상작
몸국 / 오승철
그래 언제쯤에 내려놓을 거냐고?
그러네, 어느 사이 가을이 이만큼 깊네
불현듯
이파리 몇 장 덜렁대는 갈참나무
그래도 따라비오름 싸락눈 비치기 전
두말떼기 가마솥 같은
분화구 걸어놓고
가난한 가문잔치에 부조하듯 꽃불을 놓아
하산길 가스름식당
주린 별빛 따라오면
펄펄 끓는 가슴에 똥돼지 고기국물
배지근 우린 그리움 몸국이 되고 싶네
<한국시조대상> 수상작
터무니 있다 / 오승철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 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4. 3땅>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꿩으로 우는 저녁
<오늘의시조문학상> 수상작
셔? / 오승철
솥뚜껑 손잡이 같네
오름 위에 돋은 무덤
노루귀 너도바람꽃 얼음새꽃 까치무릇
솥뚜껑 여닫는 사이 쇳물 끓는 봄이 오네
그런 봄 그런 오후 바람 안 나면 사람이랴
장다리꽃 담 넘어 수작하는 어느 올레
지나다 바람결에도 슬쩍 한번 묻는 말
“셔?”
그러네, 제주에선 소리보다 바람이 빨라
‘안에 계셔?’ 그 말조차 다 흘리고 지워져
마지막 겨우 당도한
고백 같은
그 말
“셔?”
<중앙시조대상> 수상작
송당 쇠똥구리 · 1 / 오승철
겨울 송당리엔 숨비소리 묻어난다
바람불지 않아도 중산간 어느 한 녘
빈 텃밭 대숲만으로 자맥질하는 섬이 있다
대한(大寒)에 집 나간 사람 찾지도 말라 했다.
누가 내 안에서 그리움을 굴리는가
마취된 겨울 산에서 빼어낸 담낭결석(膽囊結石)
눈 딱 감고 하늘 한 번 용서할 수 있을까
정월 열사흘 날, 본향당 당굿마당
4.3땅 다시 와 본다, 쌀점 치고 가는 눈발.
그렇게 가는 거다. 신의 명을 받아들면
정 하나 오름 하나 휘모리장단 하나
남도 끝, 세를 든 세상, 경단처럼 밀고 간다.
*송당리 : 북제주 구좌읍의 중산간 마을. 멸종 위기의 쇠똥구리는 이 지역 인근 오름 등에서만 볼 수 있다.
<이호우시조문학상> 수상작
사고 싶은 노을 / 오승철
제주에서 참았던 눈
일본에 다시 온다.
삽자루 괭이자루로
고향 뜬 한 무리가
대판의 어느 냇둑길
황소처럼
끌고 간다.
파라, 냇둑공사 다 끝난 땅일지라도
40여년 <4·3땅>은 다 끊긴 인연일지라도
내 가슴 화석에 박힌 사투리를 쩡쩡 파라
일본말 서울말보다
제주말이 더 잘 통하는
쓰루하시*, 저 할망들 어느 고을 태생일까
좌판에 옥돔의 눈빛 반쯤 상한 고향하늘
“송키**, 송키 사압서” 낯설고 언 하늘에
엔화 몇 장 쥐어 주고
황급히 간 내 누님아
한사코
제주로 못 가는
저 노을을 사고 싶다.
*쓰루하시 : 일본 대판에 있는 쓰루하시(鶴橋)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제주도민들이 <평야천>공사를 위하여 노역을 갔다가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곳이다.
**송키 : ‘야채반찬꺼리’의 제주어.
- 『박수기정 관점』( 2023. 문학과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