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낫으로 풀을 베어 본 적이 있는가?
5, 6년 전에 나는 낫을 한 자루 사갖고 와서 내 오두막 주위의 풀을 자르려고 했다.
내가 낫을 잘 사용하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서 있는 자세, 낫을 잡는 방법, 풀에 날이 닿는 각도 등 모두가 중요하다.
나는 내 팔의 동작고 호흡의 리듬을 일치시키고 서둘지 않고 일하면서
내 모든 행동에 깨어 있기만 하면 훨씬 더 오래 일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나는 10분만에 피곤해졌다.
어느 날 이탈리아계 프랑스 사람이 이웃집에 놀러왔을 때,
나는 그에게 낫을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낫을 잘 다루었는데, 내가 했던 것과 거의 같은 자세와 동작으로 낫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몸동작을 호흡과 매우 잘 일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이웃 사람들이 낫으로 풀을 베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이 깨어 있는 명상수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낫을 사기 전부터 나는 곡괭이, 삽, 갈퀴 같은 연장들을 사용하면서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켰다.
바윗돌을 옮긴다거나 무엇인가를 가득 채운 외발 손수레를 끄는 것 같은
힘든 노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들, 이를테면 밭을 갈고, 고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일들은 몸의 긴장을 풀고 활짝 깨어있는 마음으로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좀전에 말한 힘든 노동을 할 때는 완전히 꺠어 있기가 힘들었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피곤해지지 않고 호흡의 리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나는 몸을 혹사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연주자가 악기를 소중히 다루듯 내 몸도 그렇게 돌보고 다뤄야만 한다.
나는 내 몸을 '비폭력적'으로 대한다.
왜냐하면 내 몸은 단지 진리를 닦는 수단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내 몸은 사원일 뿐 아니라 성자다.
밭일에 사용하는 연장이나 책을 제본할 떄 쓰는 도구들 역시 나는 매우 좋아하고 소중히 여긴다.
나는 내 호흡을 따라가며 그것들을 사용하고, 그 도구들과 내가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그대가 매일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다른 일들보다 꺠어 있는 마음을 갖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글쓰는 일은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기가 어렵다.
한 문장이 끝나는 순간에야 다시 깨어 있는 마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문장을 쓰는 동안에는 지금까지도 가끔 그것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육체 노동을 많이 하고 글쓰는 일을 줄이고 있다.
누간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토마토와 상추를 심는 일이 모든 것을 통하는 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당신만큼 책과 이야기, 시를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제발 육체 노동을 하면서 시간을 전부 낭비하지는 마세요!"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는다.
씨앗을 뿌리고, 접시를 닦고, 풀을 베는 것은 시를 쓰는 것만큼 영원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어떻게 한 편의 시가 한 포기의 박하풀보다 낫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시를 쓰는 일만큼 내게 큰 기쁨을 준다.
내게 한 포기의 상추 꼭지나 박하풀은 한 편의 시만큼 시간과 공간에서 영원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해 전 한 불교 대학의 설립을 도울 때, 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학생들 중에는 젊은 남녀 수도승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오직 책과 경전과 사상만을 공부시킨 것이다.
결국 그들은 약간의 지식과 졸업장만을 손에 쥐었을 뿐이다.
과거에는 초보 수행자들이 절에 들어오면 그들은 즉시 밭으로 가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나무를 심는 법을 배우곤 했다.
그들이 첫번쨰로 읽은 책은 독테 선사가 쓴 소책자였다.
그 책에는 외투에 단추를 채우고, 손을 씻고, 시냇물을 건너고, 물 양동이를 나르고,
아침에 신발을 찾는 실제적인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꺠어 있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잛은 시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경전 공부를 시작하고, 집단 토론에 참여하고, 스승과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를 갖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조차도 학문적인 공부는 언제나 실제적인 일과 조화를 이뤘다.
혹시 또다시 대학 설립하는 일을 돕게 된다면,
나는 옛날 수도원을 모델로 한 대학을 세울 것이다.
그곳은 모든 학생들이 깨어 있음의 햇빛 속에서 먹고, 잠자고, 일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프랑스의 아르크 공동체, 북인도의 샨티 니케단이나 베트남 중앙 고원에 있는 푸옹보이 같은 공동체가 될 것이다.
나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 속에 있는 명상과 일이 서로 비슷하다고 확신한다.
그것들은 대학을 위한 좋은 모델들이다.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