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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ampustory 원문보기 글쓴이: 박정우
http://www.nowar.net/bbs/board.php?bo_table=w_woww_1&wr_id=11
한국국방연구원(http://www.kida.re.kr/woww/) 자료 인용
인도네시아(이하 인니)는 세계 최대의 회교국가(2014년 기준 인구 2억 4천 7백만 명 중 회교도 87%)이며, 세계 최대의 군도국가(1만 7천여 개의 섬과 55,000㎞의 해안선)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석유 가스 목재 등 풍부한 각종 부존자원에도 불구하고 국가 통합 및 발전에 큰 장애로 작용되고 있다. 인니는 인종, 종교, 언어, 문화 등 전통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지역별로 서로 다른 피식민 전통을 갖고 있는데, 분리운동은 대체로 1970년대 초반부터 수마트라(Sumatra)섬의 아체(Aceh), 동티모르(East Timor), 서파푸아[West Papua, 이리안 자야(Irian Jaya)] 등 3개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 가운데 동티모르 분리운동은 1999년 동티모르가 독립을 쟁취하면서 종료되었고, 아체에서도 2004년 쓰나미 이후 내전이 소강상태에 들어서 현재로는 파푸아에서만 약한 강도의 분쟁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밖에도 무력충돌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역으로는 서칼리만탄[West Kalimantan, 마두르족(Madurese)족 이주자들과 다야크(Dayak) 원주민간의 유혈충돌], 리아우(Riau)주의 바탐(Batam)섬, 말루쿠(Maluku) 주의 암본(Ambon, 회교도와 기독교도 간의 유혈충돌) 등의 유혈충돌지역이 있으나, 이는 중앙정부에 대항한 분리운동이 아니라 지방세력간 분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인니는 17세기 초부터 수세기 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으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일본의 점령 하에 놓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직후 독립지도자인 수카르노(Sukarno)와 하타(Hatta)는 인니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1949년까지 지속되었다. 1949년 11월에 개최된 헤이그 회의에서는 과거 네덜란드가 통치한 모든 영토를 인도네시아 합중국(United States of Indonesia)에 이전하기로 합의했으나, 당시 네덜란드령 뉴기니(이리안 자야 = 파푸아) 문제는 보류됐다. 네덜란드는 파푸아 지역을 1954년까지 통치했고 1962년 유엔에 이전한 다음 1969년 인니가 이를 합병했다. 한편 1950년 8월 인니는 인도네시아 공화국(Republic of Indonesia) 선포, 연방제 국가에서 단일정부로 전환해 국가통합을 시작했다. 1965년 수카르노의 실각후 정권을 장악한 수하르토(Suharto)는 정권 초기 공산당(PKI) 당원 1백만명을 학살하는 등 강압적인 독재통치를 지속했다.
1) 아체
네덜란드 통치시대부터 아체 지역은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 이래 수마트라 섬의 북부 아체 주(당시 주민340만, 현재 500만명)에서 분리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무장조직을 예하에 두고 있는 자유아체운동(the Gerakan Aceh Merdeka, the Free Aceh Movement, GAM)을 중심으로 분리주의 투쟁이 진행되었다. 1993-1997년 기간 동안 인니군과 분리운동 무장조직 간의 무력충돌 및 폭동으로 약 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리비아 등지의 해외 자금지원에 힘입어 GAM은 조직의 활동과 영향력을 확대했고, 1989년 이래 인도네시아 정규군(TNI, the Tentara Nasional Indonesia)이 아체 주에 상주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인니는 무장 진압을 목표로 6천명의 특수부대를 파견했고, 1998년까지 아체 지역을 ‘군사작전구역(DOM, Daerah Opersi Militer, Military Operations Area)’으로 선포했다. 1998년 5월 인니 수도 자카르타에서 전개된 반(反)수하르토 시위로 인해 약 1200명이 사망할 당시 아체지역에서도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는데, 이는 수하르토의 하야 사태로 이어졌고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중앙정부와 아체지역 간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초부터 무장 충돌이 재개되어 대학살 사건(1999. 7. 55명의 이슬람 교사 및 학생 학살)과 1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2002년 12월 인니정부-GAM 간의 평화/정전협상이 진전되었으나 2004년에 들어 충돌이 재개되면서 인니군(TNI)이 증파되고 GAM과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2004년 12월의 인도양 쓰나미는 아체 주민 13만명 사망 및 50만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킨 대재앙이었다. 그런데 쓰나미 복구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은 아체 지역에 대한 인니 정부의 폭압정치를 종식시키는 압박으로 작용했고, 이는 핀란드의 중재에 의한 2005년 2월 평화/정전협상 개시와 2005년 12월 인니군 철수로 이어졌다. 아체 측은 독립요구를 철회하는 대신 ‘특별자치’와 무기 반납에 동의했고, 인니 특수군은 아체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했던 것이다. 이 협상과정은 유럽연합과 아세안(ASEAN) 감시요원으로 구성된 아체모니터임무단(AMM, Aceh Monitoring Mission)이 관여했다. 2006년 중반 아체지역의 자치 범위를 둘러싼 정치적 격론과정을 통해 아체특별법(ALoGA, A Law on Governing Aceh)이 비준되었다. 2006년 12월과 2007년 2월 아체 지방선거가 성공리에 실시되었는데, GAM 출신 유수프(Irwandi Yusuf)가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이후 간헐적인 폭력 사건이 발생하고는 있지만, 대체로 평화와 재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2004년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중재하고, 이후 2005년부터 아체주에서 평화감시활동을 펼쳐왔던 EU도 2012년 6월을 기점으로 아체사무소를 폐쇄하여, 아체분쟁은 사실상 종료 수순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2) 서파푸아
문화 및 인종적으로 파푸아 주민들은 나머지 인도네시아 주민들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파푸아 주민들은 말레이계의 자바족이 아니라 멜라네시안 계통이며, 이슬람교 보다는 기독교를 신봉한다. 이렇듯 이질적인 서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에 속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들의 영토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기인한다1).
네덜란드는 1949년 헤이그에서 열린 원탁회의의 결정에 따라 과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점유하고 있던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도네시아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서 파푸아에 대해서는 양도를 거부하고, 네덜란드의 위성국가를 세워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했다. 다만, 자치정부 설립을 보장하고 국명, 국가, 국기 등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1년 인도네시아의 침공으로 결국 1963년 5월 1일 유엔 서파푸아임시위원회(UN Temporary Executive Authority in West Papua, UNTEA)가 인도네시아에 통치권을 이관함으로써 서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에 속하게 되었다2).
이 때부터 시작된 파푸아의 오랜 분리투쟁은 196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분출되어왔는데, 희생자 수는 여타 분리투쟁 지역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다. 유엔총회가 인니의 파푸아 합병을 승인(1969. 11.)하기 이전인 1962년 반정부 망명자들이 파푸아청년운동(Papua Youth Movement)을 창설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를 기반으로 파푸자유운동(OPM, the Organisasi Papua Merdeka, Free Papua Movement)으로 성장했다. OPM은 1975년 동 파푸아뉴기니의 독립 이후 수백명 규모의 병력을 갖추고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는데, 이에 상응해 인니군의 진압활동도 강화되었다. 아체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니 중앙정부는 분리주의활동에 대해 강온 양면적인 대반란정책(군사압박 + ‘특별자치’)으로 대응해왔는데, 1998년 이래 활성화된 분리주의 정서를 가라앉히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파푸아 주민들은 중앙정부가 전개하고 있는 외지인 이주정책이 현지 고유의 종족문화적 전통과 특성을 말살시키려 한다는 점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3). 1975년 호주의 통치 아래 있던 뉴기니 섬의 동쪽 부분이 파푸아 뉴기니(PNG)로 독립하자, OPM 활동이 고무됐고 실제로 인니 중앙정부를 괴롭히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와의 안정적 관계를 희망하는 PNG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OPM의 조직내 갈등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또한 1999년 동티모르에 대한 국제적 개입과 독립 성취 등의 영향으로 파푸아 주민들은 정부의 양보와 자치 확대를 기대했으나, 중앙정부는 오히려 OPM의 활동에 대해 파푸아 주를 3개로 분할해 군사작전을 강화했다. 인니 보안군의 인권 유린행위는 OPM 억압과정에서도 문제가 되어왔는데, 인권단체들은 1963년 이래 인니군이 최소한 10만명의 파푸아 주민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유엔 난민기구는 인니군의 인권유린행위로부터 파푸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인접국 파푸아뉴기니로 주민이주를 개시했다. 2006-2007년 기간중 중앙정부-분리세력간 평화협상은 폭력이 재연되고 난민수가 증가하면서 부진했다. 2007년의 인니 정치권의 화두는 ‘특별자치’였다. 특별자치의 내용과 지위, 파푸아주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논의가 정치권을 지배했다. 대부분의 파푸아 활동가들은 특별자치가 중앙정부의 통치를 지속․강화하려는 연막전술이며 독립 과정을 지연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겉치레 양보로 보았다. 2008년에도 파푸아의 특별자치 이행 속도에 대해 파푸아 주민들과 시민사회의 불만과 좌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009년 파푸아 지역에 허용된 특별자치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열망은 지속되고 있다. 특별자치의 내용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푸아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부담이 부담스러운 인니정부는 해당 사안이 국내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인권 침해 등을 이유로 인니 정부에 대한 유엔차원의 압박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3) 동티모르
1701년 티모르 섬은 포르투칼의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1849년 네덜란드가 서티모르를 양도받았다.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 당시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령으로 편입되었으나, 동티모르는 1970년대 중반까지 포르투갈의 점령 하에 있었다. 1974년 포르투갈의 식민지 해방계획에 따라 동티모르 지역도 민주정치를 도입해 정당활동이 전개되었는데 3개 정당 가운데 2개는 독립을 지향했고 나머지 1개 정당은 인니에 통합되기를 원했다. 1975년 인니의 수하르토 정부는 동티모르에서 좌파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 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우려해 동티모르 내 친인니 세력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retilin 세력이 사실상 동티모르를 장악하게 되자 독립세력과 친인니세력간의 내전이 발생했고 포르투갈은 식민지 해방계획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철수했다. 1975년 11월 Fretilin이 동티모르민주공화국(DRET)을 선포하자 인니는 동년 12월 동티모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1976년 7월 동티모르를 27번째 주로 편입시켰다. 인니의 무력침공과 평정작전 과정에서 동티모르 주민(68만 명)의 약 10%가 희생되었으며, 이후 대대적인 동화정책(Indonesianization)이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 주민들의 독립투쟁과 저항의지는 약 4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동티모르 사태가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례로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인니는 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수용했고, 유엔 감시하에 민주적인 절차로 동티모르 독립이 달성되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3대 분리운동 가운데 하나인 동티모르 분쟁은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한편 서칼리만탄과 말루쿠 등지의 폭력사태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내부 집단간 투쟁으로 인니 중앙정부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중재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내분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내부집단간의 문제가 인도네시아 전체에 파급되기에는 동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니 전체가 분열의 위기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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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푸아가 위치하는 뉴기니 섬은 동서로 나뉘어 서쪽에는 파푸아가, 동쪽에는 파푸아뉴기니가 존재한다. 식민지 시기 뉴기니섬의 서쪽은 네덜란드가 동쪽은 영국이 점령했고,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령(파푸아)과 파푸아뉴기니(호주의 통치를 거쳐 1975년 독립)로 분리되었다.
2) 파푸아 독립운동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할 것. 소병국, “인도네시아 서파푸아 분리주의 운동의 근원과 전개,”『동남아의 지역주의와 종족갈등』(서울: 오름, 2004), pp. 123-161. 기존 연구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조윤미, “서파푸아분쟁과 국가폭력에 대한 제노사이드 담론의 구저와 함정,”《민주주의와 인권》(제7권 1호, 2007.4), pp. 59-84.
3) 1990년대 후반까지 이슬람 이주민의 숫자는 파푸아 전체 인구(250만명)의 1/3을 차지하면서 지역 상권을 장악하는 수준으로 커졌다. 그리고 파푸아 천연자원(금, 동) 개발과정에서 현지 주민에 대한 착취 현상은 반정부 정서를 키워갔다.
의미 및 영향
인니의 분리운동은 서로 다른 3개의 지역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운동은 중앙과 지방간 자원 개발 및 이익 분배 불균형, 정치 이념적 갈등, 그리고 종교적 반목 등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체, 서파푸아(이리안자야), 그리고 동티모르 지역의 분리운동은 석유 등 풍부한 부존자원에 비해 인니 전체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지 주민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정책적 소외와 강압통치, 그리고 경제 착취 등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미 독립을 달성한 동티모르 지역의 경우를 보면, 과거 네덜란드 식민통치 지역이 아니었다는 점, 종교 및 문화적으로 과거부터 인니의 다른 지역과 유대감이 적었다는 점, 그리고 포르투갈의 식민통치 말기에 한때 독립국가를 천명하고 실질적으로 독립국가 건설을 도모하는 과정까지 진행되었다는 점 등으로 보아 다른 분리독립운동 지역과는 차별성이 존재했다. 즉 가장 저항의지와 독립열망이 높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아체 지역은 인도네시아 서쪽 수마트라 섬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데, 인근 말레이 반도(말레이시아)와의 사이에 있는 국제해상교통로 말라카 해협의 길목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따라서 아체지역의 분리운동과 관련한 불안정 사태는 말라카 해협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고, 이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제 분쟁 종식 단계에 접어들면서 내부 정치적인 문제로 변화하고 있다. 한편 파푸아 지역의 분리운동은 다른 두 분쟁 보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구성 종족의 상이, 자원 배분의 불균형, 고문 등 인권 유린 사태 빈발 등 과거 동티모르 독립과정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에서 최근 국제적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
추후 전망
동티모르 독립의 영향으로 인도네시아의 여타 분리운동들이 고무된 바 있다. 물론 동티모르의 경우처럼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력을 보이지는 않지만, 분리운동과 연계된 무장투쟁, 정치적 시위나 폭동으로 인해 여전히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인니 중앙정부는 제2의 동티모르가 발생하지 않도록 아체와 파푸아 지역에 대해 군사대응 불사 및 ‘특별자치’ 부여라는 강온 양면정책을 취하고 있다. 특별자치라는 온건정책은 국제적 압력을 회피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주적 방식으로 집권한 인니 중앙정부의 대내외적 위상은 과거 독재정권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도 동티모르 독립 당시와는 다른 점이다. 아울러 동티모르 독립을 치욕으로 기억하고 있는 인니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특히 아체와 파푸아는 인구와 자원 규모에 있어 동티모르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분리운동이 독립 성취로 이어지는 사태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체는 2006년 선거 이후 자치주로서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인도네시아 내분의 종결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파푸아 문제에서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칼리만탄과 말루쿠 등지의 폭력사태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내부 집단 간 투쟁으로 인니 중앙정부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중재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내분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내부집단간의 문제가 인도네시아 전체에 파급되기에는 동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니 전체가 분열의 위기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
1700 | 17세기 초 네덜란드, 현재의 인도네시아 지역을 식민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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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 | 네덜란드, 아체 이슬람국을 합병. 아체주민, 30년 저항투쟁(성전) 개시 |
1942-03~ 1945 | 일본 점령 |
1945-08 | 인도네시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수카르노 대통령, 공화국 독립 선포 |
1949-11 | 헤이그협정 조인, 4년간의 무력항쟁 종결, 인도네시아 주권국가 승인 |
12 | 인도네시아연방공화국(United States of Indonesia) 수립 ※ 이리안 자야(파푸아) 문제는 보류 |
1950-08 | 단일정부인 인도네시아공화국 복귀 선포 |
09 | 유엔 가입 |
1956-02 | 1949년 헤이그 협정을 일방 폐기하고 완전한 자유 독립국가 달성 |
1965-09 | 인니군, 공산당(PKI)의 쿠데타 진압 |
1965 | 수카르노 실각 |
1966-03 | 수하르토 전략사령관, 군부통치 시작 ※ 수카르노 대통령의 실질적인 권한 이양 |
1967-03 | 수하르토 사령관, 대통령 권한 대행 취임 |
1968-03 | 수하르토, 5년 임기 대통령 취임 |
1969-08 | 인니, 이리안 자야(파푸아) 합병 |
1973-03 | 수하르토 대통령 재선 취임 |
1975 | 동 파푸아 뉴기니의 독립 이후 OPM 무장투쟁 본격화 |
12 | 포르투갈의 동티모르 500년 통치 종료 후 인니군 동 지역 강점. 동티모르 저항세력, Fretilin 결성. 유엔, 인니의 동티모르 철수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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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7 | 인니, 동티모르 27번째 주로 편입 |
1978-03 | 수하르토 대통령 3선 성공 |
1982-05 | 제4차 총선 실시 |
1983-03 | 수하르토 4선 성공 |
1984 | 자유파푸아운동(the Organisasi Papua Merdeka, Free Papua Movement, OPM), ‘서파푸아’ 국가 수립투쟁 지속 |
1987-04 | 제5차 총선 실시 |
1988-04 | 수하르토 대통령 5선 |
1989 | 수마트라 아체 지역 폭동 격화 ※ 1989-1991 기간중 아체 파견 인니군, 아체 주민 2000명 사살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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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1 | 인니군, 동티모르 독립시위대 250명 사살 |
1992-06 | 제6차 총선 실시 |
11 | 동티모르(Fretilin)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체포 |
1993-04 | 수하르토 대통령 6선 |
1993~1997 | 아체지역 폭동 및 충돌로 4만명 사망 |
1995-09 | 동티모르에서 폭동 발생 |
1996-01 | 인니-포르투갈간 동티모르 장래에 대한 런던회의 개최 |
10 | 독립운동가 카를로스 벨로(Carlos Bello)와 호세 라모스 오르타(Jose Ramos-Horta), 노벨평화상 수상 |
1997-05 | 제7차 총선 실시 |
1998-01 | 이리안자야 주에서 폭동 발생 |
05 | 수하르토 대통령 하야, 하비비(Habibie) 부통령 승계. 자카르타 폭동으로 1,200명 사망 |
06 | 인니 외무장관, 동티모르 자치안 제의. 인권단체, 지난 5년 동안 수마트라의 아체지역에서 전투로 인해 39,0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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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이리안자야 지역에서 분리주의자에 대한 경찰 발포로 3명 사망, 41명 부상 |
10 | 뉴욕에서 인니-포르투갈 간 동티모르 자치협상 개막 |
1999-03-29 | 말루쿠 암본(Ambon) 지역에서 이슬람-기독교간 폭력 활동 지속 |
05 | 인니 정부, 동티모르 선거에 대한 유엔 감시활동 수용. 아체지역 폭력사태로 30명 이상 사망. 인니, 아체지역에서 군의 시위대 40명 사살 사건에 대한 전면 수사를 약속하고 지역 주둔군 대신 전투경찰 파견. 지역경찰, 분리주의자 74명 체포. 인니, 파푸아뉴기니 접경 일대를 “군사작전구역”으로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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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제8차 총선 실시 |
08 | UN 및 인니, 동티모르 주민투표 실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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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 | 동티모르 주민 자치/독립 투표 실시 |
09-04 | 개표 결과 동티모르 주민 78.5% 독립 찬성 |
09-07 | 인니, 동티모르 계엄령 선포. 동티모르 지도자 구스마오 공식 석방 |
09-13 | 인니, 평화유지군 수용 발표 |
09-15 | 유엔 안보리, 한국정부에 동티모르 파병 요청 |
09-16 | 한국 NSC, 동티모르 400명 파병 결정 |
09-29 | 말루쿠 섬의 암본지역에서 회교도-기독교도 충돌로 2명 사망. 최근 3개월간 사망자 217명을 포함하여 사상자 600명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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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 인니 대통령에 와히드 당선(부통령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
10-22 | 이리안 자야 지역에서 3천명 시위대가 독립 및 '서파푸아' 국가 건설 촉구 |
10-29 | 아체주 2만명 시위대, 독립 위한 주민투표 실시 요구 |
11-16 | 인니 정부, 아체주에 대해서 동티모르식 주민투표 검토. 대부분의 인니 국민은 아체주(500만 인구, 풍부한 천연자원 등을 이유로)의 독립을 적극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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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 1990년대 들어 아체주 독립 관련 충돌로 2000명 사망 집계 |
11-27 | 말루쿠 섬 종교 충돌로 지난 11개월 동안 693명 사망, 1534명 부상, 3만명 난민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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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 인니군, 말루쿠 섬 질서 회복 위해 1개 대대 추가 파견, 현재 총 15개 대대 9천명 규모 파견. 1999년 피해 상황은 사망 1200명, 부상 2000명, 건물 파손 9000개소 |
2001-07 | 메가와티(Megawati Sukarnoputri) 대통령 취임 |
2004-04 | 제9차 총선 실시 |
07-05 | 대통령 선거 실시 |
09-20 | 대선 결선투표 실시 |
10-20 |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대통령 취임 |
12-26 | 아체주가 위치한 북부 수마트라 지역 강진 및 해일 발생(약 12만명 사망) |
2005-08-15 | 아체 분리주의 무장단체와 평화협정 체결 ※ 평화협정 체결 이후 GAM(Free Aceh Movement), 군사조직 해체 |
2006-12 | 아체 민주선거 실시 |
2009-04 | 싱가포르, 말라카 해협 주변의 해운 위협 관련 정보의 수집과 전파를 위해 싱가포르 해군정보융합센터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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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9 | 총선 실시. 유도요노 대통령의 민주당(PD), 총의석 560석 중 148석(26%)을 획득해 제4당에서 제1당으로 부상 |
07-09 | 대통령 선거(1차 투표) 실시. 민주당의 후보(유도요노-부디오노), 60.8% 지지로 당선 확정 ※ 제2당 골까르당 후보(칼라) 12.4%, 제3당 투쟁민주당 후보(메가와티) 26.8% |
10-20 | 유도요노 대통령 5년 임기 개시. 연립내각(집권 민주당, 제2야당 골까르당, 이슬람계 군소정당)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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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 자유 파푸아 운동(Free Papuan Movement, 약칭 OPM), 항공 사령관 새로 임명 |
01-24 | 정체 불명의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해 9명이 부상을 입음. OPM은 자신들의 연루설에 대해 부인 |
02-15 | 파푸아주에서 경찰이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 발생 |
02-22 | 파푸아 의사당 앞에서 파푸아 독립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 발생 |
03-02 | 서파푸아국가위원회(KNPB), 인도네시아 정부에 OPM 사령관 살해 |
03-22 | 인도네시아 정규군과 OPM간의 교전 발생 |
04-13 | 총격사건으로 3명 사망, 배후로 OPM 의혹 |
05-17 | 인도네시아 보안군, OPM 한 명 사살 |
06-03 | GAM 설립자 하산 디 티로 타계 |
06-11 | MRP와 파푸아 토착민들은 협의를 통해 특별자치법을 인도네시아 정부에 반환하기로 합의 |
06-18 | 수천 명이 운집해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 시위 |
07-08 | 수천 명이 운집해 자결권에 대한 국민투표 요구 |
07-22 | OPM, 독립을 위해 계속해서 투쟁할 것을 천명 |
11 | OPM,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방문 시 시위 주도 |
12-07 | 인도네시아군 장교 집에 폭탄 폭발 |
2011-01-26 | 자야푸라에서 파푸아 인 수천 명이 파푸아의회(MRP) 해산과 의원 선거 취소를 요구하며 가두 시위 |
02-22 | 유엔인권이사회, 서파푸아에서의 인권 침해에 대한 청문회 개최 |
04-06 | 서파푸아 남부에서 인도네시아군과 OPM 및 파푸아토착민 간의 무력 충돌 발생 |
05-02 | 6,000여 명의 서파푸아인들이 자야푸라에서 인도네시아의 서파푸아 불법 점령에 항의하며 시위 |
05-14 | 파푸아 인 한 명이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사망 |
06-11 | 수백명의 파푸아인들이 서파푸아 독립과 수감된 파푸아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 |
07-14 | 서파푸아 푼착 자야에서 3쌍의 모자가 총격으로 받음. 서푸파푸아 언론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소행이라고 주장 |
08-04 | 총격으로 사망한 군인을 호송하던 헬리콥터가 공격을 받음. 경찰은 OPM이 배후라고 지목 |
09-07 |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 서파푸아 문제는 유엔 식민종식위원회(Decolonisation Committee)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밝힘 |
10-10 | 서파푸아에서의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 |
10-29 | 유도요노 대통령, 파푸에서의 분쟁 해결을 위한 부서 창설 |
11-24 | 인도네시아 경찰, OPM으로 의심되는 12명 체포 중 한 명 사망 |
12 | 인도네시아 정부의 서파푸아에 대한 군사작전으로 12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25,000명 이상이 피난민이 되었다고 파푸아 인권 단체가 주장 |
2012-01-01 | '11년 12월 31일과 ‘12년 1월 1일에 걸쳐 아체주에서 세 차례 무장괴한에 의한 총격이 발생에 5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 |
04-08 | 신문기자가 항공기에서 총에 맞아 사망. 인도네시아 당국은 OPM을 배후로 지목 |
04-17 | 아체에서 전 반군 지도자 자이니 압둘라가 주지사로 선출됨 |
04-20 | 서파푸아에서 5,000명 이상이 사파푸아 국기인 ‘모닝스타’기를 흔들며 시위 |
06 | EU, 2005년부터 수행해 온 아체주의 평화감시 활동 종료. 서파푸아에서 사망사건 연이어 발생, 인도네시아 정보당국은 OPM이 배후라고 밝힘 |
07-05 | OPM, 인도네시아가 유엔이 참석하는 회의를 개최한다면 정전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 |
07-21 | 서파푸아 에나로탈리 공항에서 경찰관이 총격을 당함. 당국은 OPM 소행이라고 밝힘 |
08 | 서파푸아에서 괴한에 의한 총격 사망 사건이 연이어 발생 |
09-04 | 인도네시아 경찰, 파푸아 분리독립운동 지도자 대니얼 코고야 등 OPM 일원 22명 체포 |
10 | [아체] 반다아체시 이슬람 과격단체 ‘이슬람방어전선(FPI)의 압력에 밀려 교회9곳과 불교사원 6곳에 폐쇄를 명령 |
10-23 | [서파푸아] 서파푸아국민위원회(KNPB)가 주최한 독립지지 집회 중 참가자들과경찰이 충돌해 최소 8명 부상 |
11-04 | [서파푸아] KNPB, 지도자인 폴 호리스(Paul Horis)가 인도네시아군 특수부대의총격으로 사망했다고 발표 |
11-28 | [서파푸아] 독립운동단체인 OPM으로 추정되는 무장괴한들이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 3명 사망 |
12-16 | [서파푸아] 와메나에서 KNPB 2명이 총에 맞아 사망 |
2013-01-29 | [서파푸아] 파푸아 파니아이 지역의 한 건설현장에서 노동자 9명이 무장 괴한12명에게 납치되었다가 5시간 만에 풀려남. 현지 경찰은 OPM의 파니아이 지역의 지도자인 존 요기의 동생이 주축이 된 것으로 판단 |
02-21 | [서파푸아] 두 차례 OPM의 공격으로 인도네시아군 8명 사망 |
04-06 | [아체] 아체특별자치주, 무장 독립투쟁단체의 깃발을 주(州)의 깃발로 채택. 중앙정부는 철회를 강력히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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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 [서파푸아] OPM과 연계된 루디 오라레이(Ruddy Orarey) 반군 단체가 경찰을칼로 찔러 살해 |
05-26 | [서파푸아] OPM 대변인, 군경 단속으로 11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실종되었다고 비난. 인도네시아 정부는 즉각 반박 |
06-10 | [아체]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반대하는 소셜미디어 운동에 대해 이슬람율법청샤리잘 아바스 청장이 강력히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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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 | [서파푸아] 서파푸아 반군 지도자 타부니(Tabuni)는 인도네시아 군 3명을사살한 것이 자신의 지시였다고 주장 |
08-19 | [서파푸아] 인도네시아 정부, 파푸아주 주민들의 독립을 지지하는 국제단체 등의 선박이 자국 영해에 진입하면 나포할 것이라고 경고 |
09-23 | [서파푸아] 인도네시아 전경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 |
11-26 | [서파푸아] KNPB가 주최하고 500여 명이 참석한 평화적 모임에 경찰이 발포하여 최소 1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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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4 | [서파푸아] 인도네시아 보안군, 서파푸아에서의 충돌로 군인 1명과 OPM 3명이 사망했다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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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1 | [서파푸아] 인도네시아 경찰이 서야펜에서 회의 중이던 OPM을 급습하여 1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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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8 | [아체] 아체 주정부, 비(非)이슬람신자도 이슬람율법을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는 조례 추진 |
04-05 | [서파푸아] 30여 명의 OPM이 자야푸라에서 인도네시아 보안군에게 총격을 가해 보안군 2명과 OPM 측 3명이 부상 |
동티모르 독립의 의의
1999년 8월 동티모르 주민들이 민주적 방식에 의해 독립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구스마오가 이끄는 독립파의 줄기찬 투쟁과 유엔 및 가톨릭 국가, 그리고 국제여론 등 국제사회의 지지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인니 정부의 내정 불안과 경제 침체도 동티모르 분쟁의 해결에 한 몫을 했다. 군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압통치를 실시해온 인니정부가 체제운영 및 통합능력에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과거 냉전기에는 내전형 분쟁에 대해서는 국제적 개입이 대체로 힘들었다. 국가 주권의 불가침성과 내정 불간섭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탈냉전기에 들어 국제사회에서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존중되면서 이제 대량학살과 난민이 발생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비록 국내정치적 성격의 분쟁이라 할지라도 세계 각국 및 인권단체들의 성토 대상이 되며 인도적 개입 명분을 부여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편 동티모르 독립은 인니가 체제 관리능력이 취약한 다민족국가라는 상황 여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수하르토 정권의 퇴진을 전후해 인니에서는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와 비효율적인 경제위기 관리능력, 군부의 분열상 등이 나타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물론 분리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중국, 인도, 러시아 등 다민족국가들도 있기는 하지만 인니의 경우는 이들 국가보다 국제적 위상이 확고한 편은 아니며 다민족국가로서는 유일한 도서국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민주화 운동 이래 군부와 공안조직을 활용한 정보정치도 변방의 고립된 지역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감시와 통제가 쉽지 않았다.
동티모르 사태는 분쟁관리를 위한 지역적 기능과 역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전통, 해양으로 격리된 지리적 여건, 국제협력의 관행 미정착 등으로 협력의 제도화는 아직 초보단계이다. 대표적인 지역협력기구인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역시 동티모르 사태를 주도적으로 관리조정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그동안 ASEAN은 회원국의 국내문제 논의를 자제해 왔으며, ARF 역시 안보 ‘대화’ 수준에 불과한 기구였기 때문이다. 결국 동티모르 사태와 같은 중대한 지역안보 문제에 대해 향후 적절한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지닌 지역협력체가 필요하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당사국 현황
○ 대통령 중심제, 양원제
○ 면적: 190만㎢(한반도의 9배)
○ 인구: 2억 4천만명(세계 4위, 인구증가율 1.4%), 세계최대 이슬람인구(2억) 보유
※ 자바 1억 1500만, 수마트라 4100만, 술라웨시 1400만, 칼리만탄 1000만, 이리안자야 200만
※ 종교: 회교87%, 개신교6%, 카톨릭3%, 힌두교2%, 불교1% 등
○ 수도: 자카르타(인구 약 1050만명, 662㎢)
○ 세계 최대 군도국가(도서 17,508개)
○ 언어: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 문맹율 16%
○ 국민총생산/1인당(2007년): $4381억 / $1947
※ 수출/수입(2007년): $1139억 / $744억
○ 주요 자원: 석유, 천연가스, 목재, 주석, 석탄, 보크사이트, 망간, 동, 니켈 등
○ 최근 현안: 빈곤 퇴치, 교육 개선, 테러 방지, 민주주의 확립(40년 권위주의 척결), 경제금융 개혁 추진,
부패 척결, 인권 침해 방지, 기후변화 대처, 조류독감 예방 등